제가 사학과와 관계있는 사람은 아니지만은 임진왜란 7년간의 기록만큼은 너무나 많아서 정리조차 잘 안되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과의 전쟁이니만큼 일본과 대조까지 가능하므로 웬만한 사실만큼은 충분히 짐작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옛날 조선시대 왕조차도 함부로 들여다 보지 못했습니다. 사서는 기록에 만큼은 엄청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나요.
전세계에서 조선왕조실록만큼 객관적으로 적은 역사서를 찾기 어렵다지요.
배경: 유성룡과 친우였던 이순신은 남인이라 볼수 있습니다. 남인은 소수였고 대세는 서인과 북인이였습니다. 특히 서인이 실세였고 서인의 수좌로는 윤두수 형제로 원균과 친족이였고 이순신에게 무척이나 해를 끼쳤습니다.
원균이 이순신을 옥에 가두게 되는 장계를 올리기전 사전작업으로 먼저 상소를 올린이가 윤씨 형제였습니다.
수정실록은 서인의 주도로 이루어진 작업이였고 거기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공이 작지 않음이 기록됩니다. 반대로 원균은 서인쪽이였지만 평가가 좋지 않습니다.
(아마 정치쪽으로 이야기한다면 원균은 윤두수형제에 의해 놀아난 꼭두각시정도)
이순신이 위대한 이유중 하나가 나라에서 지원은 커녕 끌어내리기에 바쁜데 매번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1.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음... 그 당시 주도 세력은 서인이였고 이순신은 서인에게도 또한 왕인 선조에게도 골치아픈 존재였을수 있었습니다. 그의 전공은 일본과 자료 교차대조 가능하며 기록된것 이상의 전공을 올린것이 사실입니다.
진실로 이순신 장군이 영웅이라고 내세운 사람은 다름아닌 후대 왕인 정조입니다.
정조왕은 그의 선대 왕인 선조가 이순신을 옥에 가둔것이 잘못이였다고 했으며 그것은 왕조 자체에 누가 될수있는 일이지만(왕조의 프라이드는 엄청납니다) 그렇게 하고 이충무공전서를 지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리었습니다.
임진왜란은 국가대 국가간의 뺏기냐 뺏기나 하는 전력전이고 그 당시 일본의 신식무기인 조총은 세계적으로 좋은무기였고 많은 국지전으로 그들의 전력은 그야말로 막강했고 우리 조선은 오히려 조선초보다 많이 약해진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투에는 전력은 상대보다 몇배정도는 기본으로 적었습니다. 누구는 이기는 싸움만 했다고 하는데 당연히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에서 안그래도 전력이 딸리는데 한,두번만 지더라도 끝장입니다. 이순신 부대는 자체적으로 군량미조달하고 배 업그레이드하고 화약만들고 배만들고(배만드는거 어렵고 오래걸립니다.) 다 했습니다.
적국에서 적국의 장수를 영웅이라 칭하는가? 그저 자신들이 졌기때문에 쪼팔려서 인가? 그것도 군신으로까지 얘기한다면 .....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은 세계해전역사상 최고의 4대해전중의 하나이며 그의 전술은 현대까지도 일본등 여러나라에서 연구 대상이였습니다.
일본은 이순신장군에게 파괴된 배수까지 꼼꼼히 적어서 기록해 두었는데, 원균장군에 대한 기록은 없는것으로 압니다. 아마 기록할만큼의 전공이 없는것으로...
원균의 전공을 찾자면 북방장군으로 근무시절로 가야되겠지요. 조그만 전공이라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짤막하게나마 적힌것 같은데, 원균에 대한 전공이 한줄 있기는 있습니다. (북방에서 공이 없다고는 할수 없으나 많다고는 할수 없지요)
반면 이순신도 북방에서 근무했는데 이순신도 나름대로 공을 세워 정언신과 다른 장수의 추천을 받아 진급하게 되었습니다.
2. 원균의 1등공신이유...
선조만큼은 원균을 좋아했습니다. 명장이니 맹장이니 기록에 있는것은 거의다 선조가 말한 것입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제일먼저 피난부터 갔죠...
선조가 임진왜란 뒤에 공신책정을 했는데 임진왜란시 일본군과 싸운 장수들 위주로 선무공신 18명을 책정하고 왕이 피난갈때 같이 간 86명을 호성공신에 책봉했답니다.
이때 억욱하게 의병장 김덕령을 고문끝에 죽이고 곽재우는 선조를 피해 산속으로 은둔하였습니다.
1등공신에는 처음엔 이순신밖에 올라오지 않았다는데 선조가 원균은 어디있냐고 묻자 패군지장에 생사 확인도 안된사람을 어떻게 1등공신에 올립니까? 2등공신도 과분합니다라고 했는데 , 선조의 뜻대로 이순신,권율,원균이 올라간 것입니다.
3. 원균의 전공.
1) 임진왜란 시작되는 시점에 이순신은 전라 좌수영 , 원균은 경상 우수영 이였습니다. 전라좌수영은 가용 전투선 수가 판옥선 12척, 최대 20척 정도이였고 (모집시) 병력은 최대 4000명정도 , 경상 우수영은 가용전투선 판옥선 40척 최대 70척 정도이고 병력은 만명정도입니다.(70척 모집시)
전라좌수영의 5관 5포에는 순천 도호부(부사.), 광양현(현감), 낙안군(군수), 보성군(군수),흥양현(현감)의 5관과 방답, 사도(첨사) 그리고 발포, 녹도, 여도진(만호)가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경상 우수영에는 8관 16포가 있지요. 그것은
거제현, 남해현,고성군, 사천군, 곤양군 등의 8관과 옥포, 율포, 지세포, 영등포 등의 16포입니다.
5관 5포와 8관 16포. 경상우수군의 관포수가 전라좌수군의 2~3배나 되지요. 비록 같은 정삼품수군절도사라 해도 다스리는 범위가 큰 경상우수사가 권한이 클 수밖에요.
그러니까 경상우수사, 좌수사 -- 전라우수사 ,전라좌수사 정도로 경상수사는 전라수사보다 권한이 컷겠지요.
대충 이렇게 일본과 근거리 해안을 지키는 경상도 쪽에 당연히 병력이 집중되어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하여간 임진왜란 시작시에 일본의 전략은 바로 동래쪽으로 침투해서 일직선으로 왕인 선조를 죽여서 조선을 차지한다는 거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일본천황처럼 대빵만 잡으면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듯...
하여간에 일본배 대군이 쳐들어 오자 동래쪽에 있는 경상좌수사 박홍은 긴급 소집령을 내리긴 했는데 병력를 해산시키고 도망칩니다. 일본군은 바로 동래쪽으로 침투했으니 박홍은 350여척이 넘는 일본의 대군에 바로 겁을 집어먹고 도망간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점은 일본군은 전술은 경상우수영이나 전라수영들을 거치지 않고 바로 경상좌수영 관할쪽인 동래쪽으로 상륙해서 바로 북진하는거였습니다.
그러므로 거제도쪽에 있던 경상우수영인 원균은 일본배가 오기도 전에 소식만 듣고 배를 자진방화하고 그 많은 병력중 달랑 판옥선 1척으로 이순신이 있는 전라수영쪽으로 피해갑니다. 이때 도중에 일본전선을 격퇴햇다는것은 좀 난감한 소리지요...
어떻게 어떻게 같이 도주하는 부하 판옥선 2척을 발견하여 3척이 되어 이순신에게 합류하게 되지요. 이때 이순신에게 자신을 지원하러 오라고 하는것은 오바지요. 물론 원래 자신이 권한이 더 크긴 하지만 배 3척을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것은...
이때 이순신 장군은 최대가용 전투선이상인 24척을 출전 준비중이였죠. 그런데 왜 원균의 장계를 받고도 빨리 출전하지 않았냐는것은 우선 조정의 회답을 들어야 하는것이였고(이때 전라수사의 배가 자신의 지역을 벗어날려면 왕명이 있어야죠, 배의 수조차도 제한적이라 이순신이 배를 늘리는것도 힘들었음)
이순신은 혼자 24척의 판옥선으로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죠 적 배 50여척을 함포사격만으로 26척을 격침하고 1명 찰과상? 뭐 하여튼 이순신이 이 전투에 승리함으로써 적의 배의 특징, 화력등을 분석할수 있었고 그대로 무적의 이순신 함대가 되어간것 같습니다. 쉽게 이긴듯 하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낮았고 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첫 전투를 대승으로 이긴것은 대단한 성과지요.
나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의 수군과는 싸우지 말고 보이면 도망가라고 문서로 써서 하달했다지요.
원균은 이순신이 얘써 만들어놓은 무적의 함대 150여척과 거북선등을 한번의 칠천량 전투로 몰살시켰죠. 그것도 수군총사령관이 육지로 도망가면서...
모진고문을 받고 풀려난 이순신 장군 , 선조가 니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육군해라 라고 하자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옥살이후 이곳 저곳을 다니며 버려진 판옥선을 모음) 라고 상서를 올리죠.....
아... 12척의 판옥선만으로 우리기록으로는 135척 일본기록으로는 200여척의 대군을 막아낸 장군..... 배 한척도 잃지 않은 기록,.... 신화이지요.
(참고로, 판옥선은 화력은 강하고 튼튼하지만 느렸습니다. 일본배는 작고 대포는 거의 없었고 조총으로 무장하고 그 대신 빨랐습니다. 판옥선이 무적이냐? 아니지요. 적의 조총은 정확도가 높고 일본군의 배는 빠르기 때문에 근거리 접근해서 백병전으로 이끌면 백병전 최고 수준인 일본군이 이길것을 예상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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