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작성자
Lv.77 꼼사리
작성
03.04.25 07:21
조회
776

동네 책방에 들렀더니 누가 들여다볼까 구석진 곳에 책 한 권이 꽂혀 있다. 제목인즉 ‘선생님 죽이기’. 때가 때인지라 그 살벌한 제목에 끌려 사들고 와서 읽었다. 덴마크 작가 한스 쉘피그가 쓴 장편소설인데 원제는 ‘잃어버린 봄’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제목으로 출판했을까?

코펜하겐 명문 고등학교의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 25년 만에 반창회를 열기로 하고 하나 둘씩 만찬장에 모여든다. 모임이 시작되고, 학창시절에 대한 회상으로 이어진다. 당시 생활은 오직 공부, 공부, 또 공부였다. 그 공부를 채근하는 여러 선생님들이 희화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모두는 학생들에게 죽일 놈들로 비쳐진다.

“선생들이 없다면 인생은 행복할 텐데…”. 학생들의 불만은 비밀 결사 ‘검은 손’을 조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암호는 ‘블룸에게 죽음을!’. 블룸은 라틴어를 가르치는 선생을 말한다. ‘검은 손’ 에드바트는 블룸 선생이 좋아하는 맥아사탕 하나에 구멍을 뚫고 치명적인 흰 가루를 집어넣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선생은 퇴근 후 산책길에 그 맥아사탕을 먹고 독살된다.

그러나 에드바트는 대상을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그들을 ‘억압’한 것은 성적, 입시, 교육제도였을 텐데 그 억압은 과연 누가 산출한 것인가. 작가는 후기에서 말한다. “내가 공격하고자 했던 것은 학교와 선생, 혹은 행정당국이 아니라, 사회였다”

학교가 있으면 어디든 ‘검은 손’은 있다. 우리 학교에서 몇달 전에 있었던 일. 아침에 출근하니 학교가 엉망이었다. 학생 하나가 쪼르르 달려오며 외친다. “선생님, 학교가 바보 됐어요!”

유리창이 깨지고, 화분들이 몽땅 엎질러지고, 진입로와 벽에는 하얀 페인트로 ‘홍길동 죽어라’ ‘개새끼 홍길동’ 등등이 요란하게 씌어 있었다. 홍길동은 학생주임의 이름이다. 며칠간의 수색 끝에 혁명적 ‘검은 손’들의 신원이 파악되었다. 이들도 역시 대상을 잘못 고른 것이다. 학생주임 홍길동은 자기 직무에 충실했을 따름이 아닌가. 이 ‘검은 손’의 적은 선생이 아니라 학교가 정한 규칙을 이행할 수 없는 나약한 자기 자신들인 것을.

보성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기간제 여교사와의 ‘차 심부름 사건’을 보자. 보도에 따르면 이 조그만 학교에는 ‘차 접대 및 기구관리’라는 사무분장이 있었던 것 같다. 일반인들은 교사는 수업만 하는 줄 알지만 주당 20시간 전후의 수업은 기본이고, 학급 담임 업무량이 상당하다. 특별활동 지도를 위해 뭔가 특기도 하나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 이른바 ‘사무’가 하나 더 붙는 것이다. 단위 학교마다 사무의 종류는 거의 똑같으니 규모가 작은 학교일수록 한 교사가 담당할 사무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교사의 일이 아닌 것이 사무로 덧붙여지기도 한다. 가령 ‘식당 운영’은 선생님들의 점심 식사를 마련하는 업무다. 매일 식단을 짜고 찬거리를 사고 설거지하고 식비를 거두는 게 일이다. 교사가 할 일인가? 또 ‘교과서 주문’을 보자. 필요한 교과서 수량을 일일이 조사 주문하고 일일이 금액을 매겨 수금한 다음, 교과서가 오면 수요와 공급이 딱 맞게 배부하고 정산까지 해야 한다. 역시 교사가 할 일은 아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차 접대’ 같은 것도 사무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사정을 두루 살핀다면 보성초등학교 사건이 좀 달리 보일 수도 있다. 기간제 여교사는 분노의 대상을 ‘교장’으로 찍었지만 과연 제대로 찍은 것일까? 교사를 교사 되게 하지 못하는 소규모 학교의 실정, 즉 공교육 현장을 이토록 가난하게 방치하는 남루한 사회제도라야 하지 않았을까.

‘선생님 죽이기’를 읽고 나니, 내게는 이 교장 선생님이 불행한 희생양, 또 하나의 블룸 선생으로 비쳐진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제목을 바꿔 책을 낸 출판사처럼 이 비극적 죽음을 자기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세력은 부디 없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석범/서울 신원중 교사·소설가〉


Comment ' 4

  • 작성자
    Lv.77 꼼사리
    작성일
    03.04.25 07:22
    No. 1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아서 올려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이창환
    작성일
    03.04.25 09:44
    No. 2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문제 같네요..
    실제로 우리나라 교사들의 일종의 푸념이라고 밖에 볼수 없는 것같습니다.
    선진국 교육시스템은 그렇지 않다. 교사는 가르치는 것 만 하고 잡무는
    따로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30,40대에 설문조사 한걸 보면
    형편만 되면 이민가고 싶다 에 이유들 중에 우리나라 교육을 믿을수 없다는데 교육 시스템도 문제지만 교사 개개인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자기가 겪은 교사들에 대한 대중적 신뢰가 믿을수 없다는
    겁니다.
    얼마전 검사들 단체행동한 것 과도 일단은 비슷하게 볼수 있죠.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 제도를 실행하는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는데
    제도만 아무로 좋게 바꿔 바야 소용없다는 거죠.
    제가 얼마전에 어떤 특파원이 프랑스에 갓을때, 교육 시스템 에도
    놀랐지만, 그 교육제도 안에 있는 교사나 그외 의 사람들에 대한 부분도
    상당히 수준이 높았다고 하더군요.
    사회나가서 취직하면 회사에서 여사원들에게 커피 심부름 시키는 거
    아직도 많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문제삼는 여사원들 많지 않습
    니다. 불평하긴 하지만요.
    이것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사가 되시려는 분들
    미완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가르키고 인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교사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의 직업으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쉬는 날 많고 안정적인 그 직업의 메리트만 보고 취직 했다면
    일반 직장에 취직 한 사람이랑 가진 마음이 같은데. 스승이라 불리울수
    있는 마음 가짐이 아닌데. 그런 대접을 받아야 된다고 푸념한다면.
    우스운 일 아닐까 함니다.
    그냥 투덜투덜 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검은광대
    작성일
    03.04.25 12:57
    No. 3

    흠.. 글 내용에 공감이 되는 부분이 적지은 않습니다만
    교장의 자살사건 관련 부분은 보는 관점이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분명 교장의 차시중 요구와 그에 반발, 다시 그에 대해 기간제 교사에게
    가해진 일들은 그것이 사회제도에 의해 벌어졌다고 할 수는 없겠죠.

    이창환님, 차시중을 왜 하필 기간제 교사에게 요구했을까요?
    요즘 심각한 임시직 노동자 관련된 문제로 그렇게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닙니다. 이창환님의 글을 보면 모든 직장여성은 당연히 차시중을 해야 하거나 혹은 그런 요구를 받았을 때 해야된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차별과 관련된 문제죠.
    여성에 대한 차시중 요구는 사소하거나 무시해야 될 것이 아닙니다.
    사소한 일부터 무시당하고 차별당하면 큰 일에는 더 큰 차별을 받는 법입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임시직 노동자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일부세력이 교장의 자살이라는 것으로 전교조를 일방적으로 압박하는데
    일부 매체에서 정보를 얻지 마시고 다양한 곳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어보십시오.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홍길동
    작성일
    03.04.25 20:40
    No. 4

    헉 내 닉이랑..-_-;;

    놀람...-0-

    찬성: 0 | 반대: 0 삭제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강호정담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7500 무지개 떳슴니다아아아아~!! +5 쌀…떨어졌네 03.04.25 427
7499 1) 일주일만에 왔더니... +2 Lv.33 장군 03.04.25 337
7498 아이콘 @@ 사람 환장하게 하는군요 +4 Lv.43 劍1 03.04.25 630
7497 쿨럭 월하연서님.. Lv.30 남채화 03.04.25 350
7496 ㅠ.ㅠ 울고 싶어라...어흥...ㅡㅡ. +7 Lv.20 흑저사랑 03.04.25 466
7495 여성분들은 절대 클릭금지!!! 남성분들만 들어오세용^^ ... +13 東方龍 03.04.25 1,058
7494 같은 노래 다른 느낌 임재범(너를 위해) : 에스더(송애) +3 Lv.1 푸른이삭2 03.04.25 857
7493 백야님의 돌아오심를 기원하면서... +1 Lv.60 횡소천군 03.04.25 640
7492 김병현, 솔로 홈런 한방에 패전투수 +7 Lv.99 寤寐不忘 03.04.25 685
7491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까?) 노래를 하나 퍼왔습니다. +6 녹슨 03.04.25 724
7490 [절대19금]유방사진이라오..ㅡㅡ\'\' +12 Lv.1 술퍼교교주 03.04.25 1,234
7489 와~ 이렇게 좋은 게시판이 있었군 +_+ +1 후라이드먼치킨 03.04.25 548
» \'선생님 죽이기\'-경향신문에 난 글 +4 Lv.77 꼼사리 03.04.25 777
7487 아시는 분 손 번쩍 들어주세요. +12 Lv.1 조돈형 03.04.25 795
7486 [공통점]고무림에서 자의든 타의든간에 논란이 되었던 회... +10 Lv.60 횡소천군 03.04.25 817
7485 선생님, 우리 애좀 이쁘게 만들어 주세요... +2 Lv.1 등로 03.04.25 592
7484 고등학교시절 추억 1편... +2 Lv.60 횡소천군 03.04.24 369
7483 [베스티즈 펌] 뚫흙 송 가사해석! (중복일지도...) +1 Lv.1 OGRE 03.04.24 555
7482 전쟁입니다. 말년이 왜이리 꼬인건지...ㅜㅜ +2 Lv.43 은파람 03.04.24 644
7481 [잡설]... 피곤하다... +7 Lv.18 검마 03.04.24 566
7480 \"청룡맹\' 연재 재개되다. +5 진우천 03.04.24 487
7479 오늘 다른 날 보다 빠르다.. Lv.20 흑저사랑 03.04.24 325
7478 {펌}사랑한다는 내용의 노래가 합쳐진거 +2 Lv.15 千金笑묵혼 03.04.24 345
7477 제목수정~술퍼님의 전생같은.....원래제목 술장미소녀 캔... +9 Lv.15 千金笑묵혼 03.04.24 429
7476 학교 급식에 관하여. +20 Lv.23 바둑 03.04.24 653
7475 시험 때문에 집에서 쫒겨나야하다니... T^T +2 매화곰돌이 03.04.24 356
7474 무협소설들이 내 손에 놓여질때 난 행복하다. +8 Lv.60 횡소천군 03.04.24 477
7473 등교거부란 이름... +5 Lv.11 향수(向秀) 03.04.24 450
7472 서효원님..의 작품.. +1 전조 03.04.24 411
7471 [추천]사라 브라이트만… +6 가영(可詠) 03.04.24 782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genre @title
> @subjec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