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제 나이 스물 두엇 무렵, 저는 재종(再從)형이 꾸리던 양식장에서 몇 달 동안 일을 거든 적이 있습니다.
경남의 충무시(현재의 지명으론 통영) 외곽 한 곳에 위치했던 이 현장은 흔히 생각하는 가두리 양식장과는 좀 다르고,
대개 부부지간이나 형제로 이루어진 어부들이 주로 소형어선으로 바다에서 먹고 잠자며 밤새 거두어 올린 물고기(붕장어, 곰장어, 능성어, 우럭 따위)들을 싣고 와서는 저울에 달아 그 수확을 환산해가는...
이를테면 본격 경매에 오르기 전의 중간상인 역할이라고 상상하시면 맞겠습니다.
언제나 바다 위에 떠 있어 오고가는 파도의 물살에 항상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반면 굳건히 고정되어 있는 그 뗏목 안에서 먹고 자는 일을 포함한 모든 생활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고, 눈을 들어보면 지척(咫尺)인 육지...
충무 시내의 야경과 변함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데도 바다위에 둥둥 뜬 채로 그 화려하던 일루미네이션 앞에서 서글퍼하던 외로움이라니...
그때 제일로 절실하던 것이 바로 책이었습니다. 아니,
꼭 책만이 아니더라도 활자로 이루어진 모든 것.. 해묵은 신문 쪼가리라도 좋고, 표지조차 너덜너덜 떨어져나간 도색잡지라도 좋았고, 무슨 흑백 광고 전단지라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저 아무거라도 읽을 수 있게끔 활자로 이루어진 것이면 우선 반가운 마음부터 덮쳤으니까요.
생필품이 떨어진다든가...어쩌다 뗏목에 매어달린 조그만 배로 노를 저어 뭍으로 나가.. 시내의 만화방 같은 데서 무협지를 빌려오기라도하는 날이면 으레 느끼게 되는 포만감이란 지금도 쉽게 표현하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모순..부조리...
돌이켜보면 참 콧바람 납니다.
왜 그랬을까..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아넣고도 부족해 흠씬 두들겨 맞으며
고통속에서 고통을 즐긴 한심한 피학(被虐) 음란 같기도하고...
그 시절 가방 맨 아래 옷가지 밑에 깔린 내 소유의 책들에는 또 어찌 그리 소화불량 상태였던지...
오늘 황기록님의 외인계 1,2권을 대여해오다가
문득 이런 생각들에 빠지고 말았네요.
맹독성 독사로 일컬어지는 작가님에게서 벌써 중독증세가..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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