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이란 단어를 인생에서 빼지 않는 한 "그"가 내 추억에서 조차 잊혀질 일은 없겠군요. 오늘 낮에 문득 떠오른 책 역시 그의 손을 통해 읽게 된 것이니 말입니다.
"그"는 오래된 책 대여점에서 보석같은 무협지를 골라내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죠.
나란히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듯 동네를 돌고나면
그는 의레히 중국집 옆 대여점에서 비디오나 만화책 그리고 무협지 등을 빌리곤 했답니다.
그날 저녁도 그는 내가 끓여준 말도 안되는 찌개를 맛있게 먹어치운뒤
( 글쎄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처럼 먹성 좋은 이를 다시 보긴 어려울 것 같답니다. 요리실력이 형편없는 내가 끓이는 잡탕 찌개에 이름을 붙여 먹는 걸 보면 늘 감탄스럽곤 했죠.. -_-;; )
쓰레기 좀 버리고 오자는 내 성화에 못이겨 어슬렁 어슬렁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답니다. 도로변의 도둑 고양이를 보며 우리도 고양이나 기를까 하는 잡담을 나누며 어스름녁의 거리를 걸어다녔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갑자기 그러더군요.
"오늘은 어쩐지 느낌이 좋아. 뭔가 재밌는걸 찾을 것 같다구!!"
일요일 늦은 오후인지라 다음날 출근이 걱정돼 그냥 들어가자는 나를 질질 끌고 대여점으로 향하는 그.
밉살스런 등짝에 혀를 낼름 내밀었보았답니다.
그리곤 그는 사천당문 (진산 지음 출판산 기억 안남) 을 찾아냈죠.
두권의 책을 손에 든채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뭐랬어 ^_____________^ 흐믓"
그의 안중엔 이미 내가 없었답니다.
진산님의 필체는 어떻구 경력은 어떻구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엮으며 어쩌구 좌백님의 안사람 되시며 어쩌구 일장연설 -,,-
어쨌거나 그날 밤은 몽땅 모두 사천당문에 그를 빼앗겨야 했죠.
그렇게 읽게된 사천당문은 그때까지 제가 읽었던 여느 무협지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답니다.
( 사실 읽은게 별로 없어서 상당히 소견 좁은 평 혹은 잔소리에 불과하지만 말이죠 )
지나치리만큼 잔인한 묘사 대신 행간 사이사이에 감정이 밀려들어갔다 밀려나오고 있었죠.
꼭 여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쓸 수 있는거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여자인 진산이 글을 엮어 나갔기에 있을 수 있는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답니다.
( 난 페미니스트 입니다 라고 떠들며 다니는 사람은 아니지만.. 상대방이 나를 볼 때 혹은 내가 상대방을 볼 때 아.. 여자구나 혹은 아.. 남자구나 라고가 아니라 우린 같은 땅을 밟고 선 인간이구나 라고 생각해고 받아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 사람이긴 하죠.. )
꼭 조여진 전개 속의 무림 그 뒤에 잔잔하게 흐를 사랑
잠시 머리도 식힐겸 찻물을 올려놓고 있다간..
문득 그를 떠올렸답니다.
"아.. 난 그가 좋은 남자라는 걸 깨닫는데 5년이란 시간을 보내야 했구나.." 란
생각과 함께 사천당문이 떠오르더군요.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어쩌면 충직하게 여인을 사랑한 "무"의 모습 위로 "그"를 얹어 보았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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