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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몇 천년 전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움집터(수혈식 주거)에서 볼 수 있는 중앙로(집의 가운데 설치한 화덕자리)는 취사와 난방은 물론이요, 어둠을 밝히는 조명수단으로도 이용됐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부차적인 용도에 국한되었던 조명수단이 사람의 지혜가 발달되고 어둠을 밝히고자 하는 절실한 필요에 의해 음식으로 먹던 짐승의 고깃덩이에서 떼어낸 기름을 그릇이나 돌에 담아 불을 밝히는 방법이 고안되었다고 보여진다. 이것이 점차 개량되어 기름에 심지를 넣어 사용하는 본격적인 등잔으로 발전했다. 우리나라는 석유와 같은 인화성이 강한 광물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예로부터 동물의 지방이나 씨앗에서 짜낸 식용유로 불을 밝혔다. 동물의 지방과 식물성 기름들은 모두 인화성이 약하므로 종지에 담고 심지를 박아 불을 밝혀도 한번에 인화되거나 연소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종지형 등잔은 조선시대 말 석유가 수입되고 뚜껑에 심지뽑이가 달린 호형(壺形) 등잔이 출현되기 이전까지 사용된 등잔의 기본형태이다.
초는 만드는 법이 비교적 까다로웠고 원료인 벌집[蜜蠟]이 예전에는 양봉을 많이 하지 않아 귀했으므로 등잔보다 늦게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민들은 평소에 초를 사용할 수 없었고 혼례나 제사 등 의·예식용으로만 배급받아 사용할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제했다. 초가 귀했으므로 암거래되었으며, 그러한 초는 양반들에게 바치는 뇌물로도 이용됐다. 그러므로 촛대는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나타내지만,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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