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글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저도 제갈미미님과 같은 점을 많이 느꼈던 작품입니다. 그러다가 살짝 생각을 바꿨습니다.
강자와의 싸움에 급급하고 어떻게 보면 우연의 산물인 의형제들과의 의리에 집착하며 강해져야 한다는 것에 강박증을 보이고 여유가 없던 초반에 비해 약간 강해진 후에 스스로가 그랬던 이유를 깨닫고 약간의 여유를 가지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이것은 완성된 주인공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수많은 방황과 고난 후에 단련되어 가는 협객혼을 보여주려는 작품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최초에 좁은 시야와 협이라기 보다는 그냥 살아남는 것에 집착하던 주인공이 점점 성장하여 나중에 제목 그대로의 혼을 지닌 대협이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라구요. 그렇게 생각하니 그냥 제목을 받아들이게 되더군요.
뭐 아무튼 수작아닙니까? 기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진부동님 소설은 개인적으로 스키퍼를 제일 좋아하지만 무협도 좋군요.
문피아 연재 당시에도 살짝(?) 논란이 있었던 부분으로 기억되네요.
작가님이 초반부에 독자들에게 주인공의 카리스마, 의리, 통쾌함 등을 주려고 별 생각없이
연출한 사건이 아닌가 싶을만큼 좀 황당한 부분이죠.
윗분처럼 협객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성장물이기 때문이다라는 이유도 말이 안되고요.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든 나중에 협객만 되면 다 용서되는건 아니잖아요?
누가 뭐라해도 저 에피소드는 잔인한 살인이고, 억울한 개죽임이죠.
어차피 재미만을 추구하는 장르소설인지라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하필이면 작가분이 제목을 "협객혼"으로 하신 바람에 치명적인 오류가 되버렸습니다.
無轍迹님의 말씀처럼 주인공이 나중에라도 대협객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을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여준 주인공의 행보와, 무엇보다 스타일에 변화가 거의 없는편인 진부동님의 글쓰기 방식이 그런 기대를 옅게 만듭니다.
스키퍼도, 디펜더도, 머큐리도, 킬더킹도... 주인공들은 "영웅"이라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협객"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들 이니까요. 그들은 모두 '내 사람들에겐 따뜻하지만 적에게는 냉혹한' 비정강호적인 캐릭터였거든요. 협객혼의 주인공도 아직까진 그렇습니다.
사실 지금 주인공의 모습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변한다면 그건 극의 흐름을 망칠수도 있겠죠. 제 생각에 협객혼의 주인공은 머큐리와 킬더킹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 처럼 난세를 헤쳐나가며 동료들과 무림의 패자로 등극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해보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실 협객과는 어울리지 않는 길이겠죠. 그 대영웅이 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협객의 모습을 더 담아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협이라는 개념은 사실 박애주의적인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중국에서 옛날에(사마천의 유협열전 보면 말이죠) 처음 쓰였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협은 기사도의 이상적인 모습도 아니고 현대의 수퍼영웅과도 다릅니다. 사실 유협열전에 나오는 협객들은 한가지 목적을 위해 다른 모든 것-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명예나 자존심까지도 버려가면서-을 무릅쓰는 독종들이지요. 협객이라는 말의 많이 발전해서 요즘은 광명정대한 의인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지금 논의되는 상황이 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대인의 준법정신과는 다를 뿐이지요.
저 역시 시대적인 협의 의미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협(義俠)이라는 말은 자신의 욕망보다는 이상과 신념, 그리고 불의에 저항하고 자신이 믿는 바를 끝까지 이루어내는 정신입니다. 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면 무엇이 그 시대의 정의인가.. 하는 점이겠죠. 단순히 욕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것을 협이라고 부르진 않습니다. 이것이 시대의 정의라는것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협사라 불리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면에서 협객혼의 주인공을 다시 살펴봤을때, 그의 행동이 그 시대의 보편적인 정의를 반영한 것이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실제로 극중 무당의 제자역시 그 행동이 옳지못하다 비판했고, 무림맹주마저 그렇게 죽여야 했었나고 되물을 정도였습니다. 맹주가 결국 아무말도 못한건 주인공이 자신의 친인이기 때문이었죠. 주인공은 자신의 지인이 당한 가벼운 모욕에는 과민반응하면서 친인의 죽음에 분노하는 가족에게는 냉소로 일관합니다. 그의 기준은 이기적입니다. 그리고 잔혹합니다. 그러한 행동은 아무리 그러한 시대라 해도 효웅이라는 말은 들을지언정 협사라고 불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협객이냐 아니냐를 따지며 그렇게 문제가 될만한 내용이었던가요? 한 사람의 독자로서 저는 그 부분에서 이가장의 둘째 공자는 죽을 놈이 죽었구나 속 시원하네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협이란 게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닙니다. 생판 남인 이가장의 둘째 공자가 제 형제를 모욕했습니다. 망나니 하나 봐주자고 형제의 의리를 저버리면 과연 협객일까요? 손을 과하게 썼다는 의견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무협은 냉혹비정한 세계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다라는데 형제를 모욕한 이를 베어 죽인 것 정도로 협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제 형제의 명예를 위해 칼을 든 주인공의 의기를 높게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잘못을 한 사람이 자신의 형제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독자들이야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되는 작가의 설명을 보고 이가장 공자의 인간됨이나 속마음을 다 알수 있었지만, 그 동료였던 사람은 이가장 공자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무림맹과 영웅맹은 원래 한 뿌리에서 나온 가족이라는 말이 계속 등장하는 소설인데 적을 눈앞에 두고 대치중인 상황에서 같은편 사람이 적을 꾸짖다가 낭패를 당하자 그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당나귀에 바보천지"라며 욕을 하다뇨??
다시 말하지만 이가장 공자는 약자를 핍박한것도 아니고 불의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작가님이 악의적으로 묘사하신 인간됨과 속마음 설명을 제외하고 겉으로만 보면 그는 위선자들을 성토하려 했으나 능력이 부족하여 곤란함을 겪은 무림초출의 공자일 뿐입니다. 주인공이 협사운운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최소한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가지고 명예를 아는 무인이라면 대뜸 모욕을 한 자신의 동료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사과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그러나 주인공은 오히려 기회를 잘 만났다는듯이 이가장 공자가 행한 정당한 화풀이(공개적인 장소에서 받은 모욕에 뺨 한대로 끝낸건 정말 정당한 화풀이라고 생각합니다.)에 죽음이라는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것도 상대방과의 정정당당한 대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가장 공자가 당황하여 사과하는 도중에 기습적으로 목을 날려버리죠. 백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주인공이 무림맹 시절에 겪었던 무림세가 자제들에 대한 증오심의 폭발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히 자신의 뜻한바를 행한다는 점에서 그는 정말로 뛰어난 독심장부일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의 선후를 따지지 않고 식구의 허물은 탓하지 않는 모습에서 협객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며, 저는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함입니다. 본문에 썼듯이 그 하나을 제외한 다른부분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다.
그 당시의 협이 지금과 다르다는 걸 말씀하시는 분들은 뭔가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말은 정확합니다. 당시의 협이 지금과 다릅니다.
그런데 뭐를 착각했다고 하는 이유는 협은 손해를 봐야만 한다라는 겁니다.
지금의 협도 그렇지만, 그때의 협도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지금의 협은 옳바르고,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손해를 보는 걸 협이라고 하죠.
당시의 협은 자존심과 사상을 위해 손해를 보는 것이 협입니다.
즉, 동료가 따귀를 맞자 칼로 찔러 죽였다. 당시의 기준으로도 악이라고 할수도 있고, 협이라 할수도 있습니다.
협이라 부를땐 그 것 때문에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즉, 목숨이요.
자기보다 강하고 큰 세력의 위험한 사람이 자신의 친인에게 따귀를 때렸다면, 그 자존심 회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대항해서 기필코 복수를 했을때 협이라고 합니다. 그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좋은 일을 힘으로 했다면, 협이라고 부릅니다. 그때에도요.
자, 위의 예가 협이라고 부를수 있나요?
협은 의로움이죠. 고대 유협들이 법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만한 의로움을 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의리든 신념이든 사상이든 '뜻'를 품고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을 협객이라고 부르는 거죠.
독심장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진 마음으로 목표에 매진하란 뜻이지, 그냥 잔인하고 표독한 것은 '독종'일 뿐이죠.
언급된 내용은 '협'으로 보기엔 무리고, 현대사회였다면 충동 조절 장애나 반사회적 인격장애 진단 나올만한 폭력행위정도로 밖에 안보입니다.
다만 제목은 소영웅심리(중2병)에서 '진정한 협객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으로 보면 문제가 없을 것 같기는 합니다.
제목 좋은사람
조폭b가 일반인c가 하는짓이 맘에 안든다고 면전에서 쌍욕을하고 시비를 걸자 욱한 c와 멱살잡이 정도의 사소한 다툼이 있었는데
그걸본 이제 막 동료가된 주인공 조폭a가 니가 감히 내 동료를 건드려 말로 해결하거나 주먹질 한두번으로 끝날일을 c를 그자리에서 구지 몽둥이와 사시미로 패죽이고..
아 역시 난 쿨하고 의리가 짱이라니깐..동료를 위하는 난 정말 의리있고 착한놈이야...동료를 위하는 이런게 좋은사람 아니겠어.
그리고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꾸미는데 a의 가족이 와서 왜 내 아들를 죽였냐고 울분을 토하니.
네 자식이 약해서 뒤진거지..억울하고 꼬우면 맞장 뜨던가...이 세계가 다 그런거 아니겠어 난 졸라 의리있고 쿨하거든.
그러자 지금까지 정황을 다 지켜본 주변 사람들이 이런 조폭 양아치 같은 넘아 하니.
헐 왜 내가 조폭 양아치야 김두환 몰라? 일제시대 기준으로 하면 우리도 다 협객이라고 우리가 싸움을 얼마나 잘하고 우리끼리 의리가 얼마나 강하고 친한데..그리고 어차피 나중가면 다 손 털고 좋은사람 될거거든
이가장의 이공 이립이 악한 짓을 한 근거가 없고, 당나귀 같은 놈이라는 욕을 한 주인공의 동료에게 문제가 있다. 그것은 협이 아니다. 이런 말 같은데요.
이립은 이미 함무로 말을 하면서 끊임 없이 분란을 조장하였습니다. 상문객과의 싸움까지도 연계를 해보면 그의 생각없는 말 때문에 주변 상황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까지 오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잘못을 탓하고 비난하는 말까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또한 이것을 협의다 아니다. 라고 논하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예를 들어 약자를 보호하는 것을 협이라고 한다면 이가장의 둘째공자는 약자가 될 수 없고, 칼밥을 먹고 살아가는 강호인은 전부 약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공자의 죽음에 억울한 부분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 강호의 생리면서 비정강호 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은원관계 역시 정당화 됩니다.
때문에 그들의 관계를 협의로 놓고 협의다, 아니다 말 할 수 없다고 봅니다.
또한 주인공과 동료들은 아직 의형제를 맺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주인공과 수많은 전투를 함께한 전우로써 끈끈한 우정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 관계를 놓고 참견이다 아니다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저는 둘째공자를 죽인 행위는 협을 할려는 그의 의지의 결과물이면서 시작을 알리는 수단이라고 봤습니다. 의리를 지키는 것이 협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강호의 세계는 의리를 지키기 힘든 구조에 있습니다. 그가 의리를 위해 이가장+ 무림맹+영웅맹에 맞설 결심을 한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협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문객의 일은 그렇게 쉽게 말할계제가 아닙니다. 주인공부터 자신이 싸우고싶다는 욕심 하나로 돌아가려던 상문객을 돌려세우지 않았나요? 그가 작품의 주인공이기에 죽지않고 그 와중에 무공도 발전한거죠. 엑스트라1이 그랬다면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동료들을 죽음의 위기에 빠뜨린 죽어마땅한 놈이 됐겠죠.
그리고 초끈님의 주장은 좀 극단적입니다. 강호인은 칼밥을 먹고 살기에 애초에 약자가 될 수 없는 존재고 억울할일도 없다면 애초에 무림인에게 은원이란 성립이 안되겠군요. 약해서 죽은것뿐이니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주인공의 사상과 정확히 일치하시는듯 합니다.
사실 무림에는 이미 일의 잘잘못이나 선후를 따지지 않고 오직 힘의 우열을 최고로 치며 이긴놈이 정의라고 부르짖는 단체가 있습니다. 바로 마교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야기되는 성교가 아니라 마인들의 단체인 그런 단순한 마교를 생각해봅시다.) 주인공은 마교의 후계자로 들어간다면 정말 어울릴듯하네요.
정파라는 사람들이 왜 정파라고 불릴까요. 그들이 힘이없고 사람을 죽일줄 몰라서 정파인게 아닙니다. 힘을 행하기 전에 이치를 따지고 명분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는것을 그들이 모를까요? 그럼에도 그런 신념을 지켜나가는 것은 그것에 협이 깃들여있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에게 협이 없다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겠죠. 전 단지 그 기준이 너무 이기적이며, 제 생각에는 협객이라 불릴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뿐입니다.
아니죠. 상문객은 주인공 자신의 실력으로 판세를 바꾼겁니다. 또한 힘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호승심의 발동을 계산적으로 평가하여 정당하냐 아니냐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는 주장은 칼밥으로 먹고 살고 힘으로 말하는 강호,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무엇이 협의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짐승이 아니라 사람임을 증명하는 겁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목숨을 걸고 행할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이 잘못된 길이 아니라는 떳떳함 그것이 협의지심의 시작이죠.
미미님이 말하는 정의는 그냥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의견이 정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고 이것은 지독한 공리주의일 뿐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협의지심이란 것은 자신에 대한 도전이고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완성에서 나오는 긍정적인 결과물을 세상은 협객혼이라 불러주는 겁니다.
p.s 제대로 썼다가 한번 오류나는 바람에 쩝..
무림의 세계에서 개인의 완성이 정의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대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죠. 무인이라면 응당 무공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은 더할나위없이 뛰어난 무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공의 완성을 위해 무림의 고수를 찾아다니며 비무행을 하여 천번을 싸운다한들 그를 협객이라고 불러주진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무공을 왜구토벌에 바쳐 희생과 피 속에서 완성시켰다면 그는 협객이라고 불리겠죠.
협은 개인이 혼자서 추구하여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사람들과 어찌 관계맻는지, 그의 힘과 무력이 언제 어떤 식으로 사용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민하고 행했을때 협이라는 개념의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때문에 협사를 논함에 있어서는 공리적인 가치판단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문객에게 도전한 주인공의 용기를 낮게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낭패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약간만 패퇴했더라도 작게는 영웅맹의 임무를 망치는것에서부터 크게는 동료들의 목숨까지도 잃게되는 상황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모든것을 걸고 도박을 한 거죠. 도박의 이유역시 동료를 위해서라거든가 대의를 위해서라든가 하는것이 아니라 오직 싸워보고싶다는 - 무공의 완성을 위한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료들이야 같이 목숨을 걸 각오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가장 공자를 죽이는 장면도 다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작품속에서 주인공이 이가장 공자를 죽이는 이유를 직접 언급하기를, "너같은 놈이 살아있으면 이가장의 체면만 상할뿐이니 그냥 내가 죽여주마" 라고합니다. 이 얼마나 치졸한 이유인가요. 본문을 쓸땐 몰랐는데 다시 읽어보니 정말 소름끼치는 문장이군요. 그는 살인의 이유가 이가장을 위한 호생지덕이라고 포장하고 있는것 아닙니까. 차라리 이기적인 이유였으면 더 나았을텐데 이건 정말 아닙니다.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이야기하는 바지만, 그는 뛰어난 무인이고 훌륭한 영웅이 될 수 있지만 협사라고 불릴수는 없다는 이유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아래 댓글에서 미르네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도 오히려 협사의 모습에서 점점 멀어지기만 하기도 하구요.
협이라는 주제로 큰 개념을 논하는것도 즐겁습니다만, 사실 협이라는것이 워낙 모호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 논쟁을 위한 논쟁이 되어가는것 같아 이만 줄이겠습니다.
미미님 글에서 제 의견을 잘못 받아들이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무공의 완성 = 개인의 완성이 아닙니다. 무공은 부가적인 것이고요. 내면의 완성 = 개인의 완성 인 것이죠. 내면의 완성은 인과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고 봅니다.
즉 주인공이 상문객을 비롯한 고수에게 호승심 부리는 이유는 이기심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내면적 가치판단에 의한 움직임 입니다. 또한 저는 이러한 가치 판단이 협의지심으로 향하는 정확한 방향이다. 라고 해석 하고 있습니다.
제가 개인의 가치판단, 두려움을 극복하는 내면의 완성을 협의지도 라고 하는 이유는 칼밥 먹는 강호의 생리상 의리를 지키기 힘든 구조에요, 어떤 일이든 전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의리를 지키겠어요. 그래서 의리를 지키기 위해 협을 행하기 위해 제일 먼저 선행되어야 할것이 바로 개인의 가치판단, 신념을 이용한 두려움에 극복이죠.
미미님이 이기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불이익을 참아라 하는 것과 같고, 전체가 지향하는 가치가 개인의 가치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결론은 내어 보자면 미미님의 저의 생각은 정반대 군요. 논쟁을 위한 논쟁이 된다는 말씀에 동의 할 수밖에 없군요.
흠 그리고 "너같은 놈이 살아있으면 이가장의 체면만 상할뿐이니 그냥 내가 죽여주마" 이 부분은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네요. 있다면 해서는 안될 말을 한 것이지만, 해석에 영향을 줄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지 퀄리티를 떨어뜨릴 뿐.
p.s 갈수록 협사의 모습에서 멀어진다는 것도 인정할 수 없네요. 3권까지 보았지만 갈수록 재미있었기 때문에...뭐 그덕에 이렇게 변론아닌 변론은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지만 각자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참 힘들군요.
1권에서 주인공이 이립을 죽인 일을 가지고 협객이다 아니다라고 말하는건 조금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1권에서의 주인공은 아직 자신만의 확고한 무언가가 성립되지 않은 모습이었고, 이립을 죽인 것은 이립이 그간 보여준 행동에 대한 불쾌감과 더불어 주인공이 무림맹에서 당했던 일들에 대한 억눌린 분노, 전우를 모욕한 이립에 대한 분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아직 글 속에서 협객이라고 할만한 무언가가 나타난 모습도 아니었죠.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건 3권에서의 주인공입니다. 숙부인 무림맹주가 이립을 꼭 죽였어야 했냐는 물음에 주인공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헌데 그 이유라는 것이 형제가 모욕을 당하면 참으선 안된다는 겁니다. 이 때 주인공의 생각에선 이립의 배경을 염려해 그를 놔둬야 했는가? 죽여야 했는가? 식의 고민만 있지, 죽음 이외의 방법으로 동료의 모욕을 보상하려는 생각 따윈 없더군요.
협객이라고 하면 보통 의혐심이 있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흔히 떠올리게 되는 건 곤경을 처한 사람을 대가 없이 돕고,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를 벌하고, 신의를 지키는 모습 등이 있습니다. 동료로서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모욕한 상대를 죽이는 것이 과연 협객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요? 간단한 상황을 들어 천지 모르고 날뛰는 한 인물이 주인공 일행의 겉모습만 보고 모욕했다면 그는 무조건 죽어야 할까요? 천풍신검님께서는 실제 중국 역사에서의 협객에 대한 이미지를 얘기하셨지만 그러한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게 아니라면 누가 장르 소설을 보며 실제 중국에서의 협객에 대한 걸 찾아 연상시킬까요.
더 어이가 없던 것은 주인공 일행이 무림맹에 들어가서의 일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무릎 꿇으라는 이립의 아버지 이승림(이가장의 장주)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합니다. 이립이 죽은 것은 자신보다 약해서 일뿐이라며 나보다 강한 자가 있으면 싸워주겠다고 합니다. 이승림이 '지금 무링맹에 적대하는 것이냐'고 하니 '나도 무림맹 소속이다. 난 무림맹을 상대로 싸운다고 한 적도 없고, 당신 아들 복수를 하고 싶다면 직접 덤벼라'고 합니다. 무림맹은 정파의 연합입니다. 결코 마교가 아니죠. 같은 무림맹 소속이라는 걸 인식했다면 자신의 감정대로 하기 보다 일의 여파를 고려해 행동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분명히 살인 외의 방법으로도 징치가 가능했으니까요. 그 논리에 수긍하는 주위 사람들도 우습더군요. 그 누구도 주인공의 행동이 과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중립을 지켜야 할 무림맹주와 군사는 주인공 숙부라 주인공 편들기 바쁩니다. 차라리 주인공이 동료를 위해 무림맹마저도 상대하겠다는 의기를 보여줬다면 좋았을꺼 같습니다.
협객의 판별기준을 선악으로 둔다면, 강호에서 협객은 존재할수 없습니다.
칼들고 살인을 일삼는 무리가 협객으로 본다는 것자체가 우끼는 일이죠.
그래서 기준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판별기준을 용기 라고 해보죠
이가장 둘째공자를 처단하는데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둘째공자의 개인무력은 주인공보다 처집니다만 세가의 권력은 월등하여, 무림공적 운운하며 압박하는 상황은 강자임을 뜻합니다.
강자의 부당한 행위에 맞서 싸우는것을 용기라고 할수 있다면 주인공은 협객이 맞습니다.
어찌됬던 협객의 판별여부를 결과인 죽음 유무로 판단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들어 주인공이 그상황에서 둘째공자의 뺨 한대로 마무리한다면 협객인가요?
결국 협객이란 단어는 모호한 단어이고 시대와 국가에 따라 판별기준이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코마님도 역시 모순을 가지고 계시네요. 협객의 판별기준이 시대에 따라 다른 만큼 선악의 판별기준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릅니다.
즉, 협객이 살인을 했다 - 선행을 했다도 시대에 따라 바른 말입니다.
시대가 살인도 선행에 들어갈수 있는 시대(법이 그렇다는게 아니라 악인이 참하는걸 다수가 공감하는 시대상황이라는 겁니다.)에 협객이 악인의 목을 자르면 협행이자 선행인 겁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요.
즉, 협행 = 선행의 일부입니다. 일치하지는 않지만, 배척되지도 않습니다.
주인공의 행동은 그때도 악행에 가까우리라 생각됩니다. 절대 협행이 아니죠.
무협소설 이라는 말에서 알수 있듯이, 무 와 협은 장르소설의 가장 오래된 주제 입니다만,
협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소설은 손에 꼽을듯 합니다. 얼마없는 협객의 모습도 많은사람들의
공감을 받는지도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대와 나이, 장소,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감받는 협객의 모습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그런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한것인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저만 궁금한것이 아니기에 이런 비판이 나온것이 아닌가 합니다. '협객혼' 이라는 제목 자체가
이런 비판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낸다고 봅니다.
아직 작가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것 같습니다만, 같은 작가의 풍운강호에서
'무림맹주 되는법' 강의에서 살짝 그 답을 엿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글에서 제기되었던 선악, 살인 이런 개념과는 살짝 거리가 있어,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지는 미지수 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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