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글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중고독자님 안녕하세요~^^
중고독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본문의 글은 비평이라기 보다는 감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후미에도 그렇게 언급을 해 두었구요.
말씀처럼 여러가지 이유로 글을 씀에 있어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글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듯 사람에도 수 많은 종류가 있어 꼭 신랄한 꼬집음만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많은 부분을 감안하여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작품을 읽음에 있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 두 가지를 선택해 글을 쓴 것이었고, 그 아쉬움이 어떤 연유에 의해서인지, 그리고 어찌하면(제 짧은 생각이겠지만) 글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을지에 대해 짧게 적어보았습니다.
요는,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가의 발전을 어떻게 도울수 있는가?"
였죠.
항상 그것을 최우선으로 두기 때문에 어쩌면 중고독자님이 원하시는 신랄한 비평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분석을 위해서 남의 글을 읽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단순한 비난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견실한 비판의 글을 장문으로 남긴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F.카프카님께서 소중한 본인의 시간을 내어 글을 써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습니다.
옳지만 매력 없는 글이라는 지적이 상당히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소설이나 시나리오 류의 글은 이번 이능력자가 처음이었습니다. 과거 분석이나 보고서 류의 글만 썼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소설 스타일의 글이 무엇인지 더 연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등장인물의 동작에 대한 많은 묘사와 수치에 관한 부분은 아마 제 성격과 경험이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액션신 같은 경우 제 대학시절 운동 경험을 바탕 삼아 동작에 대한 묘사를 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수치 또한 숫자로 표현하면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에 그런 스타일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은 장점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어떻게 하면 소설과 이런 스타일을 접목 시킬 수 있을 것인지 연구해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대립집단과 갈등구조의 경우 저도 그 것 때문에 글이 늘어지고 부연 설명이 들어가 읽는 분들의 호흡을 방해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도 시간이 나시면 지금과 같이 저에게 약이 되는 조언을 해주시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소중한 시간을 내주어 제 글의 발전을 위해 글을 써주신 것에 대해 F.카프카님께 감사드리며 서재에다가 제 고마움에 대한 표시(?)를 남기고 싶습니다.
ㅎㅎ가후선생님 제 비평에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읽는 내내 가후선생님의 말씀처럼, 작가(가후선생)가 소설이나 시 같은 예술문 보다는 보고서 형식의 글에 익숙한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 부분을 언급할까말까 고민도 했구요.
사실, 제가 예술문이라고 칭한 소설, 시, 희곡 등은 테크닉도 물론 중요하지만, 감각적인 부분이 상당히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혹시나 시간이 되신다면 그런 감각적인 글을 읽어보심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이왕이면 번역서가 아닌 국내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는 것이 그런 감성 및 감각을 기르는 데는 더욱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갈등 구조에 관한 부분은... 독자를 조금 더 믿어 보세요~^^
에... 무슨 말인고 하니.. 글이란 결국 독자와 저자의 대화입니다. 그런데 대화란 상세한 설명도 필요하지만, 일정 부분은 비언어적인 부분으로 표현을 해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극단적으로 침묵을 표현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장르문학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에 지양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일정부분은 독자의 해석을 믿어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책이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주체로서의 생명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책이 저자의 손을 떠나서도 객체로써 남아있으면, 그것은 죽은 책입니다. 여기에서 주체와 객체의 차이는... "스스로의 행위 가능성"입니다.
즉, 책이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책은 그것만으로써 또 다른 재해석이 가능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저자가 의도했던 그대로 독자가 이해한다면 그건 그저 또다른 복제품(..의미 전달이 잘 안되네요..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를 말하는 것입니다)에 불과하죠. 그것은 이미 죽은 책입니다.
저자와 독자사이의 틈바구니가 있어 그리고 거기에서의 오해가 있어 책은 비로소 생명을 가질 수 있고 창조성을 재생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ㅎㅎ 아무튼 말이 좀 길었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고마움에 대한 표시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ㅎㅎ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위에 언급하신 말씀은... 그런 겁니다.
언어란 필연적으로 오해를 수반할 수 없으며, 그것이 글인 이상 그런 오해는 더욱 커지게 마련이죠.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문학은 이런 다중적 해석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문학작품이 텍스트 그대로의 의미 밖에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학이니 아니니를 따질 단계가 아니죠.
사실 이걸 제대로 설명드리기 위해서는 데리다까지 끌고 와야하겠지만...
아마 가후선생님이 느끼신 뉘앙스 정도로만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후선생님식의 표현을 빌자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100이라면, 20이든 30이든 일정 부분은 독자에게 이임하는 것도 방법이며, 거기에서 전혀 뜻밖의 의미가 재탄생 될 수도 있다는 말이죠. 가후선생님은 20을 비워 두어 그것을 독자에게 맏겼지만, 독자는 그 비어있는 20에서 50을 만들수도 있고 100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소설의 기능일 수도 있습니다.
이걸 묘사에도 대입시켜 볼 수도 있겠죠. 혹은 서술이나 상황 설명에도 대입시킬 수 있을 테고요.
그래서 독자에게 일정 부분은 믿고 맡겨 보라는 말씀을 드렸던 것이죠.
제가 이 부분을 정확히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길게 써도 설명이 어렵군요.
차후에 기회가 닿는다면 조금 더 자세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카프카님의 [독자를 믿어라 독자에게 상상할 기회를 줘라] 라는 부분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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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전에 다른 분께 쪽지로 말씀드렸던 것이 생각나네요
간략하게 내용을 정리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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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퍼 동감 그렇지 않아도 어제 다른 분 글에 댓글로
작가의 필력이 뛰어남에도
독자가 느낄 감상까지 혹시 못 느꼈을까봐
일일이 설명하고 서술리 길어지니 마치 감상마저 이렇게 느껴라 하고 주입하는거 같아서 읽는 맛이 없다고 적었었죠
마치 실력이 뛰어난 요리사가 요리를 내 오면서 젓가락질한번 할때마다 옆에서 어떤 맛이고 어떤 향신료를 썻고 무엇에 포인트를 주고 맛을 음미하라고 강요하는거 같아 불편했다고요
박진영이 대충 부를 때 대중이 감동을 느끼듯이
제발 필력은 좋으니 대충 써 달라고요
귀하의 지적과 제 생각이 일맥 상통하는거 같아 반갑네요 ㅎㅎ
칼쟁이 중고독자입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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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내용이었죠
.
제가 문학적인 지식이나 스킬은 부족하지만
아마도 느낌은 비슷하게 통한거 같아 반갑네요 ^^
저도 이 글 잠깐 읽어봤었는데, 한 가지 의문이 있었으니 그것은 원더러스입니다. 한국은 분명 영어권 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적떼'를 일컫는 명칭이 원더러스라니 의아했습니다. 물론 게임에 어울리는 명칭이긴 하지만 그 배경을 생각하면 상당히 괴리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뭐, 한 발 양보해서 국가에서 그리 부르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명명이야 자유니까요. 하지만 민간에서조차, 특히 신한국 영토 밖에 위치한 이들까지 그리 부르는 것은 조금 생각해 봐야할 문제인 듯 합니다. 위와 같은 [명칭]이 퍼지는 일반적인 경로는 TV, 혹은 라디오인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중계기가 필요한 매체입니다. 그러나 소위 버림받은 자들의 영역에 제대로 된 중계기(혹은 중계소)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결국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것인데 그조차도 서로를 믿지 못해 밀집하지 못하니 [통칭]이 정립되기 매우 어려운 상황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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