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글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월야환담 시리즈를 좋아하긴 하지만 솔직히 잘 쓴 글이라고 보기에는........... 모르겠습니다-_-; 전투씬 하나는 일품이지만요. 제가 보기엔 캐릭터성에 너무 공을 들였고 그 캐릭터에 의존해 이야기를 끌어나가려는 느낌이 좀 들었던 것 같아요.
특히 한세건! 얘는 창월야에선 주인공도 아닌 주제에 주인공보다 더 부각되죠. 또 개인의 심리 자체가 일관적이지 않고, 한세건을 예로 들자면 채월야와 창월야에서 좀 달라요. 채월야에서는 '부모님을 잃었으나 복수할 상대 자체가 사라졌으므로 흡혈귀를 죽인다'인데 창월야에서는 '부모님이 죽은 것 자체를 실감하지 못하는 내가 미워서, 나를 미워하기 위해서 흡혈귀를 죽인다' 였던가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ㅠㅠ 기억이 안나는걸 어떡해요ㅠㅠ)
그냥 제 생각에는 월야환담 시리즈의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중2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_-; 특히 한세건이랑 실베스테르 이 두 인물이 그렇고요. 제가 창월야를 채월야보다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가 서린 때문이었는데, 세건의 억지스러운 심리와는 다르게 서린은 좀 자연스럽거든요. 물론 적 앞에 두고 '쟤를 어떻게 죽여ㅠㅠ'라고 징징대는 건 좀 짜증나지만, 만약 내가 서린이라면- 이라는 가정 하에서 생각해 보면 서린처럼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 고등학생이 사람을 죽이기가 그토록 쉬울까요-_;..
채월야가 문체나 구성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건 동의하지만, 딱히 그건 채월야만이 아니고,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점입니다. 인상파에까지 비교할 필요가 있나 싶군요.
그리고 어떻게 일본색채가 작품을 평가절하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까? 감정의 찌꺼기라고 하시지만, 애초에 그러한 점은 전작이 더 심했습니다. 사실 전 시리즈의 테마자체가 그렇습니다.
창월야가 광월야 보다 전작에 대한 의존도가 심한이유는 전작의 주인공인 한세건이 창월야에서도 주연으로 나오기 때문이죠. 광월야에선 조연이고요. 단순히 이점이 다를 뿐입니다. 구성면에서도 미국 시트콤같은 구성이라고 하셨는데, 창월야와 좀 다른건 사실이나, 채월야와는 다를게 없습니다. 때문에 굳이 광월야에서만 작가가 주제를 바로잡는다라는걸 느낄 이유는 없을것 같네요. 전 오히려 세건과 이사카의 대화를 통해 혼란만 유도하는 것 같더군요.
위도 님// 음? 일본 색채가 작품을 평가절하하게 만든다는 말은 없지 않았나요?
전작과는 다르게 내용이나 캐릭터성 면에서 일본의 대중적인 만화의 설정을 주체의식 없이 가져다 썼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점이 눈에 거슬렸다, 라는 의미로 쓴 것이고 그런 식의 내용이 나오게 된 이유는 작가 스스로가 의식해서라기보다는 그런 것을 많이 접하면서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억지로 쌓인 감정의 부산물과 잔재들이 발로한 것 같다, 이거 좋지 못하다, 이런 의미였는데... 제가 글을 너무 대충 썼나 보네요 =_=;; 즉 창월야가 가진 결함은 '재패니메이션을 썼다'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재패니메이션에 대해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인상으로 캐릭터를 썼다'에서 비롯한 거지요 'ㅁ' 결코 일본과 관련된 것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광월야는, 음, 전 구성에 관련해서 진보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광월야는 사건에서 서현이 시작과 끝을 다 장식하기보다는, 다른 이의 사건을 보여주면서 미국 히어로물처럼 '뜻밖의 구원자'로써 서현이 등장해서 사건을 풀어나가지 않습니까? 그걸 바라보는 눈은 시종일관 아무것도 모르는 제 3자의 시선을 기반으로 하고 있구요.
그런데 눈을 부릅뜨고 자세한 내용을 살피면 변한게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솔직히 작가 홍정훈님의 글이 논란의 여지가 많은 글을 쓰지만, 개성도 없고 그냥찍어내기만 하는 인간들이 넘쳐나는데 유독 쓴소리 듣는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확실히 홍정훈님의 글은 깔끔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감성적인 폭발력은 누구도 따라갈수 없다고 보거든요. 우리가 늘 당연하다고 여기는것이 과연 당연한 것인지, 세건의 경우처럼 주체할수도 없고 혼란한 인간성도 그렇고, 여러가지면에서 하고싶어도 하면 안될것 같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쏟아내는 점에서 큰 점수를 줍니다.
그리고 일본빠니 뭐니 하는데, 전 차라리 일본처럼 지를땐 지르고 가다듬을땐 가다듬는게 좋더군요. 일본식 오바가 거북하다는 분들이 많지만, 우리나라의 애니나 만화를 보면 웃기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지한것도 아니고, 뭔가 굉장히 어중간해서 이 사람이 스스로의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쓰는지 그냥 이야기 흐름에 따라 적당히 끼워맞추는지 모르겠더군요.
아무튼 홍정훈님의 글은 깔끔하지는 않지만 생생한 에너지가 느껴지는게 큰 장점이 아닐까 합니다.
글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채월야를 제일 높게 칩니다만, 이 부분은 넘기고. 미술 화풍을 통한 비유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월야환담을 통해 작가의 글이 점차 진보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는데, 미술에서의 진보가 수직적 관계도 아닐뿐더러 인상파와 피카소, 앤디 워홀은 절대 동일 선상에서 해석할 수 없는 카테고리입니다. 미술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관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며, '미술'이라는 관념이 당대의 시대정신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단 하나, 인상파를 위시로 한 모더니즘부터 앤디 워홀까지 이어지는 대격변에서 일정하게 보여지는 특성, 혹은 흐름을 꼽으라면 관념의 확장과 재구성, 탈 구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틀을 거부하면서 시작되던 것이, 그리스도 아이콘 이후 새로운 아이콘의 시각적 창출이라는 광대한 야망을 지나, 앤디 워홀을 끝으로 이윽고 예술의 종말을 선언하게 되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의미하는 것은 '미학 관념'의 해체 입니다. 그리고 이 해체와 탈구성은 이성 중심주의의 관념론을 넘어 포스트모던으로의 진입 시기와 일치합니다. 인간이 기나긴 자아도취적인 유아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 스스로에게 겸손해질 수 있는 시기라 볼 수 있죠 (아이러니하게도 포스트모던이라는 것이 더 방만하게 이해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만).
즉, 끊임없는 해체의 과정이 인간 자체의 의식적 진보 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글 구성력의 진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해체 작업 자체는 글이든 미술이든 '구성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파괴'에 가깝습니다), 예로 드신 비유는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덧붙이겠습니다. Taeyang 님이 어떤 의도로 비유를 드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단지, 미술을 언급하는데 있어 사회적 위배는 있을 수 없죠; 비교할라 치면 중세미술과 초현실주의도 충분히 비교 가능합니다. 사회적 위배의 문제가 아니라 그 비유적 표현이 피상적입니다.
그저 보여지는 화풍에서의 시각적 특징만을 언급하셨는데 소봉님 말씀처럼 명확한 이해 없이는 넣지 않는 것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정확히 그 화풍이 어떤 이념과 이상 아래서 만들어졌고, 그러한 표현으로서 표출됐는지 안다면 저렇게 넣지는 않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화가의 그것과 같이 이미지로 승부할 뿐이구나’ 라는 문장에서는 실소가 나왔습니다.
홍정훈 작가가 글의 느낌을 바꾸면서 서술방법도 조금씩 다르게 하는 것은 알고 있고, 그것을 진보라고 한다면 진보가 맞습니다. 단지 그 진보를 언급함에 있어 드신 미술적 비유들을 홍정훈 한 개인에 맞춰 서술되고 있는데, 자칫 미술이 일정한 방향성으로만 진보한다는 것처럼 예를 드셔서 댓글을 달았던 겁니다. 그리고 위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모더니즘 이후의 미술에서의 진보는 ‘구성력’이라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파괴’에 가깝기 때문에 ‘홍정훈의 구성력적 진보’에 대한 예시로서는 잘못된 경우입니다.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이 작가는 5년간 단 세 개의 소설을 출간했습니다. 각기 시대의 전환점을 무대로 글을 적었는데 (르네상스 직전, 메이지 시대 말기, 프랑스 혁명기), 각 시대에 어울리는 화법을 탐구하고 습득해서 글을 적었습니다. 특히 '장송' 같은 경우엔 그의 고전소설적 기법의 완성도가 남다른데, 사화의 근대화와 함께 현대문학에서 어떤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가려 하기 위해 철저하게 기존의 것들을 추구했던 경우입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포스트모던에서의 고전주의적 탐색이라는 면에서도 가치가 있습니다만, 그의 장송 이후의 책을 접하면 특히나 더 그 의의가 남다릅니다. 대단히 실험적인 단편들이 이후에 여럿 되는데, 하나같이 기존의 기법과는 상당히 그 궤가 다릅니다. 기법 파괴에 가까운 시도들을 보이는데, 그의 이러한 시도들은 그가 이 전에 철저하게 추구했던 기존 기법들의 이해라는 토대 위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언급하셨던 미술을 이용한 비유라면 이쪽이 훨씬 가깝다고 봅니다. 히라노의 글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재 구축과 탈 구축의 의의와 그 이상 때문에, 그의 최근 소설에서 보여지는 탈 구성적 작법 때문에 그렇습니다.
홍정훈이 보이는 글 표현의 변화가 흥미롭기는 해도, 그가 탈 구성적 작법을 시도한 경우는 없습니다. 사실 네러티브의 중요도가 큰 장르 문학에서 탈 구성적 작법을 시도할 이유도 없고요. 유테르柔瑞님 말씀대로 굳이 비교하자면 장르문학은 팝 아트적 성질이 다분하니까요.
'미친 달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거 보는 순간 전율이 흐르며 책을 고이 접고 책방에 돌려 놨던 기억이 납니다. 소름이 다 돋더군요. 하드보일드 뱀파이어 장르라고 해서 봤는데 하드보일드가 아니라 나루토에 뱀파이어헌터 시리즈를 합쳐논 느낌이더군요.
십덕 코드라는 건 단순합니다. 별것도 없는 놈들이 괜히 허세나 부리고 있다는 거죠. 일본식 표현으로 중2병이라고 하는 그 허세 말이죠.
고뇌하는 영웅의 원조인 미국 코믹북과 똑같이 고뇌하지만 허세와 중2병이 되는 일본 장르매체. 그리고 마찬가지로 고뇌하는 주인공이지만 씹덕소설로 분류되는 홍정훈 소설. 과연 이유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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