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재미있는것을 찾고 있지만, 습기와 더위가 공격하는 밤에는 잠도 안 오고 해서 옛날에 재미있게 읽던 책을 곱씹어 보곤 합니다. 그러다 문득 '베스트 5'를 꼽아서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끄적거려봅니다.
새로운 것을 찾는 분이라면 별 감흥이 없으시겠지만, 더운 여름밤에 더위도 잊고 집중할 수 있는, 제 나름대로의 베스트 5를 적어봅니다.
판타지
5. 은하영웅전설.
양, 율리안, 쉔코프, 포플런, 프리데리커, 라인하르트, 키르히아이스, 미터마이어, 로엔그람, 오벨슈타인...
'우주에서 벌어지는 전술 - 전략의 향연!!!' 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인물끼리의 소소한 에피소드는 많지 않습니다. 굳이 꼽자면 '외전'에 속하는 율리안의 일기 정도나 소소한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술과 전략, 그리고 주인공들의 개성있는 특징들.
귀찮아하면서도, 그리고 자기 자신은 매우 싫어해서 항상 역사가가 되고 싶었지만 역사의 흐름에 의해 '대전략가'가 되어버린 사람. '황제'에게 빼앗긴 누이를 위해 '황제', 아니 '왕조'에 복수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
작품 자체는 극한 영웅주의를 품에 안고 있었지만, 그 영웅들의 사람들이 '역사'속을 관통하면서 보여주는 모습들이 멋지기 그지 없습니다. 더운 여름밤에 전략과 전술, 그리고 영웅들의 모습 속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이 보고 싶다면, 한번쯤 다시금 읽어보시는것도 좋겠습니다.
(이건 '사족'에 가까운 것입니다만, 이 작품 내에서는 부패한 민주정치보다는 건실한 전제정치쪽에 손을 크게 들어줍니다. 작가가 '전제정치'를 무작정 좋아한다기 보다는 '영웅'이 있어야 어느 것이든 잘 돌아간다... 식의 모습을 보여주는듯 싶습니다. 일례로, 양의 직속 관할인 이젤론은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가 되기도 하지요...)
4. 하얀 로냐프강.
사실, 최근 나오는 판타지들과는 동떨어진, 말하자면 '엘프'는 안 나오고 '용'도 코빼기도 안 나오며 지나가다 주인공의 칼침 가볍게 맞아죽고 죽는 몬스터는 하나도 안 나옵니다.
대신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몇십만명씩 싸우고 한다는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움직이며 흥미를 갖게 만드는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강한것만이 모두인 나라에서, 어머니마저 뺏은 사람에게 커서 복수한 후 최고가 되어 다른 나라로 침공하는 사람.
공주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리고 천민과 귀족인 자신의 계급 차이의 한계를 알면서도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천민을 사랑하고 마는 사람.
전쟁으로 인해 인질로 잡힌, 자신이 사모하는 공주를 향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사모해주는 기사를 품에 안으며 탑에서 떨어지는 사람.
각자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일들 하나하나가, 말초 신경이 아닌 심장 속의 '무언가'를 건드려주는 멋진 소설입니다. 감수성이 풍부하시다거나, 주인공과 주인공 주변의 몇 사람만 '존재 가치'가 있어 보이는 작품과는 전혀 다른 소설입니다. 사실, '톨킨'을 기준으로 잡는 우리나라에서는 이 작품이 '판타지'가 아니라 '기사도 문학' 정도로 보여지지 않을까 싶습니다만서도...
3. 쿠베린.
위와는 정 반대입니다. 너무너무 잘생기고 강하며 자기 잘난 줄 아는 주인공은 '하얀 로냐프강' 과는 다르게, 로맨스는 하나도 없습니다. 잘 생기고 성깔 있는 모습에, 주변 여자들이 빠져드는, 말하자면 '할렘'물격입니다.
강하기도 무지 강합니다. 그 자신만 강한것이 아니라 그가 거느리는 종족도 강합니다. 사람 병사 몇만명은 종족들 몇십명이 모이면 쉽게 죽이지요. 가히 '먼치킨'의 류에 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쿠베린은 잔정이 많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보다 먼저 죽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잃을때마다 그는 슬퍼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잃는것에 안타까워하고, 자신이 무언가를 해주지 못하는것에 슬퍼합니다.
동료를 잃고도 다음장을 넘기면 '하하하' 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주인공이 아닌겁니다. 자신이 죽인 자신의 연인을 잊지 못하고, 자신이 구해준 자신의 부하를 잊지 못하고, 자신이 돌봐준 사람들을 잊지 않습니다.
에, 말 그대로 '인간 같은' 짐승이겠지요.
작가님이 후기에 적었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이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동물의 왕국에 사는 수컷 한 놈의 허세와 허욕에 가득 찬 일생(?)을 그린 이야기.'
라시는군요.
2. 폴라리스 랩소디
사실, 이영도님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성공작, 혹은 '수작'이라 불릴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묵향'은 언제 완결이 날 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도 자신만의 '포스'를 발휘하시는 이영도 작가님이지요.
이렇게 수작이 많고, 저도 이영도님의 작품은 모두 좋아하는 편입니다만 그중에서도 '다시 읽는다' 라는 예를 든다면 '폴라리스 랩소디'를 들고 싶습니다. (특히 판타지 책 유일하게 군데군데 삽화가 첨부가... 전 그림도 좋아하는 편이라서...)
이영도 작가님은 각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는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1인칭 시점으로, 등장 인물들 모두를 '구체화' 시킨 '드래곤 라자' 라던가, 기존의 판타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만들며 종족과 인물들을 만들어낸 '눈물을 마시는 새'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하지만, '폴라리스 랩소디'만큼 사람이 벌떡벌떡 일어나서 지금이라도 내 눈앞에 사람들이 뛰쳐나와 배 위에서 칼부림을 하는 해적들을 보거나, 석양의 무법자처럼 양손에 핸드건을 들고 펑펑 쏘는 신부님이 나오거나, '당신'을 외치며 보이지 않는 길을 가는 길잡이, 자신의 긴 이름가지고도 유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매력적인 공주님, 그리고 가지려 하지 않기에 자유로운 '노예'가 눈에 보이는 작품은 없을겁니다. 더운 여름밤에 시원시원하고 즐거운 사람들을 보는것도 별미입니다.
1. 퇴마록.
여름밤입니다!
혼세편이나 말세편에 가면 '무협'에 가깝게 변질되지만, 국내편만해도 단순한 무협보다는 공포적 성격이 강합니다.
사실, '한국적 판타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작품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한'이라는 요소. 퇴마록 국내편에는 그 요소들이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주인공들과 맞물려 공포스러우면서도 슬픈, 그리고 즐거운 이야기들을 내어줍니다.
죽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해 불이 되어 쫓아다니다, 종내에는 서로를 끌어안고 사라져버리는 이야기,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죽어서도 동생을 깨워주는 형의 이야기, 자신이 키운 개의 유령을 무서워하면서도 위로해 주는 아이의 이야기...
여름밤에 제격인 '공포물' 이지만, 마음에 뭔가 찡하고 남는 것이 있는 '퇴마록' 국내편을 베스트 1으로 잡았습니다.
짧디 짧은 여름밤이지만, 잠은 더럽게 안 오는 날들이 계속되신다면, 여름밤에 저런 작품들을 읽으시면서 판타지 세계에 한번쯤 심취하시면서 시원한 여름밤을 지내시는것도 좋을듯 싶습니다.
여름밤 잘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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