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이가 드리고 싶은 말
나는 무협 작가가 아닙니다.
애당초 ‘작가’라 부를 수 있는 위인도 아닌 것을요.
하지만 늘 글을 쓰고 싶다, 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랑시를 끊임없이 적어대기도 하다가, 추리 소설을 구상하기도 하고, 그러다 정신이 들어보면 대하 역사 소설을 쓰자, 는 허황된 망상에 젖어있기도 합니다.
다만 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길 좋아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요, 내가 좋아하는 건 ‘이야기’입니다.
이전에 한 번, 어리석은 자만심에 찬 무협 습작을 이곳저곳 올려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글을 반도 채 끝맺지 못하고 접었습니다. 그때는 그 정도밖엔 되지 못하는 실력이었겠지요. 그랬었기에 연재, 라는 행위가 가지고 있는 어려움, 책임의 무거움과 적어도 남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스스로 갖추어야 할 것들의 엄정함을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고 생각합니다.
꼭 무협 소설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저 ‘이야기’입니다. 무협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책을 볼 때 무협 소설만 읽지 않는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이지 ‘무협’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 이야기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연애 소설인 것입니다.
다만 사랑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무협의 배경을 뒤집어쓰게 된 까닭은,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필요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 시대 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일까요, 사랑에 관해 쓰고, 읽고, 말하고, 들어 왔습니다. 어쩌면 유치하고, 진부해서, 그래서 말이지요, 이젠 뻔하고 들어줄 수 없는 것이 사랑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두 명의 무라카미 중 한 사람은 말했지요, “달빛, 사랑 노래, 정열, 질투, 증오, 이런 것들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오래 되었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들,” 이라고.
아마도 분명히 그래서일 겁니다.
나는 그래서 사랑 이야기를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 문학 동아리에서 Q, 라는 중편 소설을 쓴 적이 있습니다. 밀레니엄을 기점으로 했던, 오늘을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남자는 뉴욕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화가였고, 여자는 소더비의 큐레이터였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대학생이 남긴 소설의 재미없는 내용은 각설하고, (웃음) 그 글에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지나치리만큼 고독하고 쓸쓸합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엔, 그런 사랑을 ‘쿨’하다고 말한다는 걸.
헤어질 때 매달리는 여자를 보고 ‘짜증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불꽃보다도 뜨거웠던 마음이 식어버리자, 뒤도 보지 않고 곧바로 그 사람을 떠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디지털 같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어느 정도 즐기고 있기도 하고, 평소의 나는 그런 것들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 사색을 즐기는 남자가 결코 될 수 없으니까요.
단지, 아주 가끔씩.
입에 맞지 않는 와인을 마셨다거나,
길거리에서 싸우면서도 남들의 눈을 의식해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고 있는 연인들을 보았다거나,
아니라면 이별을 고하고 훌훌 떠나가 버린 연인을 2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는 바보 같은 여자와 만났다거나 할 땐,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지금 우리들. 흑백 무성 영화 속의 느릿함과 옛 명필들이 남긴 글씨처럼 진중함이 담긴 아날로그 같은 사랑을 나눌 수는 없는 건지. 그 순수함과 지고지순함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어찌 보면, 이런 생각조차 이미 진부하고,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문제인데 말입니다. (웃음)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는데, 나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무협의 세계’에서라면, 강호를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라면, 어쩌면 우리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강호는 원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실제로 있기도 했고, 또한 없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눈 사랑은, 내 생각대로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없을 수도 있는 것이겠습니다.
그런 사랑의 이야기를, 나는 들려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취화음(醉花陰)이란 제목은 이청조의 송사(宋詞) 제목으로부터 따왔습니다. 자, 그럼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시작될 이야기는, 연애 소설입니다. 사랑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자, 정말로 마지막입니다.
...... 연애 소설입니다. (웃음)
몽환 배상
추신 - 스피디한 연재를 기대하시는 분들께선, 가급적이면 읽지 말아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연재는 매주 월요일, 한 번만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연재를 해 나가면서 고무판 독자 여러분과 많은 이야길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모쪼록 많은 관심과 따뜻한 성원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부족한 재주로 강호 제현들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을 머리 숙여 사죄드리며, 늘 건승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4. 8. 31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