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울새]님의 글을 보니 요즘에 식상한 히로인의 등장과 배경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분들이 계신 것 같은데요. 제가 보기엔 단순히 그 존재의 유무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협 혹은 판타지와 같은 장르문학에 히로인의 등장이 정형화 된, 어쩌면 보편타당한 계기가 된 이유는 아무래도 그러한 인물을 배치하여 얻게되는 사건의 특수성 그리고 사랑 관계를 매개체로 비교적 쉽게 이끌어낼 수 있는 재미의 부분 때문이겠죠.
그렇게 되면 히로인과 그리고 주변 인물들을의 캐릭터를 얼마만큼 잘 살리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신선함이 갈린다고 보는데요. 물론 히로인이 나오지 않는 스토리가 더 흥미를 이끌고 참신함을 갖출 수도 있고 그 작품의 수도 무궁무진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중에서 저는 동명소설 하얀거탑이 떠오르는군요.
식상함의 주된 문제의 원인은 히로인에 대한 묘사가 지극히 외적으로만 치중되고 있기 때문이라 조심스레 생각합니다. 위험한 발언이긴 하지만 감히 제 생각을 따르자면 현재 문피아에 연재되는 꽤 다수의 글이 그렇다고 봅니다......
겉모습은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백옥같은 피부며 붓으로 찍어 그린 듯한 눈썹이며 하늘거리는 옷자락이며......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보다 더한 고급 어휘들은 죄다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예쁜 것은 알겠지만 사랑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단지 잘 꾸며진 인형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냥 주인공과 함께 존재할 뿐입니다. 주인공 혹은 다른 인물들과 어떠한 감정의 교류를 겪어 여러 갈래의 사건으로 승화시키는 예가 드물죠.
그 이유는 바로 심리묘사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로인이 이야기의 연관성과 존재감을 잃지 않으려면 보다 현실적인 인물이 되어야겠지요. 시대적 배경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으로서, 또 여자로서 가지는 공통된 심리는 분명 존재한다고 봅니다.
뜬금 없는 얘기지만 이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무협 소설 작가들 중에 김용, 고룡 이 두사람의 여성 캐릭터 묘사는 그야말로 완벽에 가깝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작품속에서 히로인의 대화 한 구절 한 구절은 너무나도 섬세하여 비록 번역 된 내용이더라도 살아 숨쉰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죠.
신조협려. 그 방대한 이야기 속에서 히로인으로 등장하는 소용녀는 사실 그녀의 외모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많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녀가 나이에 비해 앳된 얼굴이고 흰 옷을 즐겨입는다는 정도만 알 수 있지요. 하지만 독자들마다 그녀를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단연코 최고의 미인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이유는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들, 그녀가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환경들, 그리고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에 반응하는 주변 인물들의 구체적인 감정들 때문이 아닐까요?
고묘 안에서 세상 물정을 모르며 자랐기에 사제간의 본분을 예속으로 볼 줄 모르는 천진난만함. 반평생 오욕칠정을 금하며 도통 어떠한 것에도 반응할 줄을 모르던 그녀의 차디찬 감정이 양과를 남자로서 처음 알게 되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 그로 인해 비롯된 수많은 오해와 이별과 재회. 이 모든 언어적 심리묘사가 대화와 행동에 녹아들어 그것만을 읽고도 독자들은 그녀를 때로는 사랑스럽게,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신비스럽게, 외에도 수많은 미묘한 감정들 조차 공유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이러한 심리묘사가 능숙하지 못한 작품 속 여주인공은 현실과 거리가 멀게끔 표현됩니다. 특별한 일이 아닌데 과도하게 화를 내거나 시도 때도 없이 부끄러워하거나 아니면 아예 말 수가 없거나, 많거나 등등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감정들이 구술되어 주인공 혹은 다른 인물들과 조율이 잘 안되곤 합니다. 과연 이런 이야기들을 실제로 나눌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생각이 들만큼요. 한 인물이 가진 본질적인 성격이 줄곧 일관되어야 하는데 각각의 말투마다 한 인물이면서 간혹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즉, 판타지나 무협소설과 같은 장르소설도 본질은 소설이며 소설은 결국엔 사람과 사람간의 이야기가 주가 되어야 하는데 너무 세계관과 조직도를 형성하는데에만 치우쳐 주가 되어야하는 인물들간의 감정과 갈등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소홀하지 않았나. 그래서 배경만 다르고 이야기 구조는 취약한, 그속에서 아름답기만 할뿐 주변과 반응하고 호흡하는 캐릭터가 아닌 형식적인 대화만을 갖춘 이야기의 연결고리로 전락한 히로인 때문에 독자들이 식상함을 느끼지 않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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