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의 반역의 상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리와 같이 돌아본다는 낭고상(狼顧相)으로부터 시작하여, 무제 조조가 그에게 절대 병권을 맡기지 말 것을 후대에까지 강력하게 경고하였으며, 조비가 죽고 어린 조예가 즉위할 즈음에는 그 유훈을 깨고 고명대신으로 지명될 만큼 출세하였으나 다른 고명대신들로부터 배척당하여 일시간 군권을 잃기도 하였다. 태양과 같이 스스로 빛났던 조조와 달리 달과 같이 은밀하면서도 날카롭게 자신의 재능을 드러냈던 사마의에 대하여 정권과 그 친위세력들은 항시 경계의 시선을 떼지 못하였으며 항상 경계하고 견제하기를 늦추지 아니하였다. 이처럼 많은 사료에서는 마치 그의 반역이 예상되어 있었다는 듯 세간에서 그의 반역의 상을 의심하고 견제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의심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사마의 자신은 위에 충성을 다하였으며 자식들에게도 위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당부하였다. 실제로 위를 멸망으로 밀어넣은 것은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 대였고 그 자신은 조상을 물리치고 군권을 장악한 뒤에도 위의 왕권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그의 인생이 상부와 주변의 의심과 핍박으로 얼룩져있다는 점을 볼 때 이것은 매우 의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한창 활약하던 서기 235년. 위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위의 세력이 닿는 모든 지역에 내린 총동원령에 의해 동원된 위군은 각지에서 쓰디쓴 패배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는 노도독 육손의 주도하에 형주를 수복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으며 촉은 강유가 어수선한 내부를 정리하고 다시금 북벌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북흉노 출신의 이민족들이 이를 드러내어 서량을 장악하고 장안을 불태우려 하고 있었다. 위군은 각지에서 발목을 잡혀 움직일 수 없었고 사마의 자신도 제갈량이 죽은 현재 최대의 적수인 육손과 형주에서 필사의 각오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움직이지 않는다 하여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었다. 또한 독단으로 군을 움직여 후일 책임을 묻게 될 위험도 있었다. 제갈량과의 결전으로 많은 부분 그의 전공은 인정받았지만 조정에서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훗날 보여지는 것처럼 조씨 일족의 그에 대한 경계도 이미 도를 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의는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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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 제대로 보이나요? 사마의 시각에서의 현황 설명이라 겸사겸사 사마의 선생님의 명대사 넣었습니다.
현재 제 4장까지 연재된 적랑비가 홍보입니다. 북흉노 좌현왕 시진과 그 일족들에 의하여 변경된 중국 삼국시대 후기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고, 감상을 나누어주셨으면 합니다.
비가 오고 있습니다만 곧 다가올 봄의 전조려니 하시고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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