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410년 전,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로 우리들에게 익숙한 근대 합리주의 철학자이지요. 그는 비록 길지는 않은 생을 살았지만, 서구 문명은 그에게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그 빚은 바로, '주체'라는 개념입니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라는 극단적인 회의 속에서, 생각하는 한 자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악령이 속인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주체로서, 생각한다는 사실만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데카르트적인 주체는 확고한 인식 위에 서있는 절대군주의 성인 셈입니다. 하지만 주체는 대상(타자)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성립시키고, 그 과정에서 타자를 강제로 연결하는 '끈'이 되어서, 전제적인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환경의 파괴와,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식민지화, 독점 자본주의의 폐혜. 셀 수 없는 '타자에의 폭력'이 주체에 의해서 행해졌습니다. 이런 부조리가 나타나게된 이유는, 주체가 폭력을 행사하게된 이유는, 바로 인간이 아담의 언어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언어는, 바로 만물일여의 세계입니다. 자신과 타자의 구분이 없고, 모두가 오롯이 서로를 인식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모두가 주체이지만, 폭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실락원을 박차고 나왔고, 바벨탑은 무너졌으며, 지상에 엎드려 비루하게 대지를 기어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신이 되지 못한 인간은, 완전하지 못한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정명한 인식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지요. 주체는 타자에게 권력을 행사했을 따름입니다. '차이'를 오롯이 응시하지 못하고, 그 차이를 제거해버리려 했을 따름입니다. 그리하여 주체는 타자를 자신의 발 아래 귀속시켜 노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자신은 주인이 되어 스스로의 오만한 이성으로 만물을 인식하고 자신에게 귀속시키려고 하였지요. '절대적'인 것으로 변한 주체가, '도그마'가 되어버린 주체가 비판될 빌미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신이 담보하는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진리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은 강자들의 법칙이요, 주관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항구불변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의 진리를 따르는 것은 타자에게 의존하는 것, 또다른 폭력의 여지를 제공하는 것, '약자'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니체는 '초인이 되어라!'라고 외칩니다. 초인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그 심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습니다. 데카르트적인 주체처럼 타자를 인식함으로써, 타자에게 기댐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니체가 상정하는 '초인'은 약자의 도덕과 진리를 넘어선, '실존'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니체와 프로이트, 그리고 맑스가 그 막을 연 포스트 모더니즘은 결국, 모더니즘으로부터의 도피, 즉 '근대적 주체의 해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통일적인 자아는, 데카르트가 상정하는 완전한 주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적인 이성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쾌락원칙에 따르는 '욕구하는 동물'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프로이트는 데카르트 이래로 수많은 근대 철학자들이 인간에게 부여한 '숭고성'을 단숨에 앗아가버립니다.
이런 논의는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대인들이 '자명'하게 여기고 있었던 '진리'들을 하나하나 깨부숴가고 있지요. 데카르트가 정초한 주체의 개념도, 과학의 확정성도, 인간 이성의 숭고함도 잘근잘근 분해되어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결이 숭고하게 외치듯이, 인간은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손을 통해 자신의 이성을 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손의 활동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은 자신의 주체적인 이성으로 손을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날개는 날기 위한 목적으로만 존재합니다. 하지만 손은 모든 목적을 위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손을 통해 글을 쓸 수도 있고 공구를 만들 수도 있으며 팔을 긁을 수도 있으며 돌을 조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노동의 과정에서 진정으로 본질적인 것은 노동 주체 자신의 이성과 의지일 뿐이지 타인의 기대도, 그리고 타자의 규정도 아닙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의 오롯한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결은 손을 통해 모든 것이 해체되어가는 세계 속에서, '주체'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해체됨 속에서, 불완전성과 불안과 허무 속에서, 은결이 바라는 주체는,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타자와 공존하며, 타자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주체'가 아닐까요? 이제 해답이 머지 않았습니다. 은결이라는 소년의 고독하고 숭고한 행보, 현대 철학의 다양한 논의가 함축되어있는 카이첼님의 희망을 위한 찬가를 추천합니다.
사족. 추천글이긴 추천글입니다만, 제 나름대로의 견해도 포함된 글이라 사실 감상문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건은 나오지 않았으니 걱정 마시고 달려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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