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담

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천산유록> 서장

작성자
Lv.8 이정수A
작성
04.12.23 21:03
조회
469

천산유록(天山有錄)

서장

적막한 숲.

바람이 나무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숲은 고요했다. 간간히 새 우는 소리와 흔들거리는 신록(新綠)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숲을 가로지르는 길을 사이에 두고 양 편의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는 짙은 살기가 뻗쳐오르고 있었다.

숲의 나무에 바싹 기대어 숨은 사람들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들 만큼 긴장을 하고 있었다. 마치 폭풍 전의 전야라도 되는 듯이 손에 든 둥그런 활은 짠물에 젖어 조용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내가 활을 다시 꽉 고쳐쥐며 길 한가운데를 노려보았다. 한적한 길.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외딴 길에 일단의 무리가 걸어들어 왔다. 그들은 열 몇 명이 좀 넘는 사람들로 무리를 이루었는데, 저마다 등에 봇짐을 잔뜩 짊어지고, 마찬가지로 산더미 같은 짐을 져 힘겨워하는 나귀들을 끌고 있었다. 옆에 있던 부하가 소곤거렸다.

“서역으로 가는 교역상단입니다. 공격할까요?”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사내, 두목은 부하의 얼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부하가 찔끔하며 뒤로 물러섰다. 두목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정신이 있는 소릴 지껄여라. 눈앞의 보물을 놔두고 저런 허접때기를 주워 먹겠다는 거냐?”

두목이 수신호를 하자 길 좌우에서 활을 치켜들고 있던 부하들이 팽팽히 당겨진 활을 슬그머니 내렸다. 교역상인들은 자신들이 방금까지 날카로운 독화살의 먹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저만치로 사라져 갔다. 한숨을 돌리던 두목의 눈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가 그토록 고대하던 먹이가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바람에 쓸려 사라졌던 땀방울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숲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기세를 알아차렸는지 새들도 우짖는 것을 멈추었다. 바람도 가라앉았다. 날개짓 소리 하나까지 들을 정도로 적막해지자 길 위를 걷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무거운 남자의 발걸음 하나, 불편한 듯 발을 약간 끄는 여자의 발걸음 하나, 가벼운 아이의 발걸음 하나였다. 모두 세 개의 발소리.

그들을 날카롭게 쳐다보던 두목의 시선이 한 곁에 머물렀다. 길을 걷는 장년 남자의 허리춤. 그 자리에 두목이 그토록 원하는 보물이 있었다.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만큼이나 두목의 신경도 당겨졌다. 쿵덕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심장을 무시한 채 두목이 손을 치켜 들었다. 삼십 여 발의 독화살이 일제히 길을 걷고 있는 일행에게 향했다.

‘아직이다…… 아직이야.’

두목은 숨을 고르며 숫자를 세었다. 화살의 사정거리에 완연히 들어오기 위해서는 저들이 앞으로 사십여 걸음을 더 걸어야 했다. 그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숨을 죽이고 조용히.

그러나 일단 거리 안에만 들어오면 설혹 화살이 빗맞아도 그들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화살에 칠해진 독은 칠현사(七絢蛇)의 맹독이었다. 닿으면 그 자리에서 피부가 누렇게 변색되어 죽는다. 하지만 그 전에 저들이 낌새를 눈치 챈다면 모든 계획이 무산되어 버리고 만다. 두목이 노리는 자는 고수(高手)였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숨이 멈췄다. 길 위의 그들은 딱 사십 걸음을 걸은 뒤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두목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젠장! 눈치챘나?’

두목은 망설였다. 화살을 쏴야 하나? 하지만 아직 사정거리 밖이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삼십 발이나 되는 화살 중에 하나 정도는 저들의 몸에 스칠 수도 있다. 하지만 공격이 실패한다면……?

두목이 망설이는 틈에 그들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더니, 장년의 남자가 등에 맨 봇짐에서 육포를 꺼냈다. 그 육포를 아이가 받아들어 맛나게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이에게 육포를 주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길을.

두목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그들은 자신들을 노리는 독화살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듯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들이 내딛는 한 걸음마다 두목의 심장도 거기에 박자를 맞추어 뛰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제 됐다!’

두목이 막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숲의 한 곳에서 퉁하며 화살 한 발이 쏘아졌다.

“빌어먹을!”

두목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분명 어제 들어온 신참이 실수를 한 것이 뻔했다.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활시위의 강인한 힘을 못 견디고 놓치고 말았으리라. 사람 수를 조금이라도 늘려보려고 그 신참을 끌어들인게 잘못이었다. 이렇게 된 바에 사내는 신에게 빌 수밖에 없었다.

“제발 맞아라!”

그러나 힘없는 주인에게서 쏘아진 화살은 길 위의 남자의 손에 잡혀 버리고 말았다. 의아한 눈빛으로 손아귀에 있는 화살을 쳐다보는 장년 남자. 그 남자의 의문이 사라지기 전에 두목은 발작하듯이 외쳤다.

“모두 공격해! 쏴! 다 죽여 버렷!”

순식간에 삼십여 발의 화살이 바람을 뚫으며 길 위의 목표에게 쏟아졌다. 하늘을 뒤덮는 화살무리들. 주위 공기는 비릿한 독냄새로 가득 물들었다.

장년의 남자는 급히 허리춤의 검을 빼들었다. 남자의 검이 메뚜기떼 같은 화살무리를 뚫고 찬란한 빛을 뿜어 냈다. 두목은 검의 휘광에 눈을 바로 뜨지 못했다. 하지만 곧 두목은 두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남자가 뽑은 검을 귀신에 홀린 듯 쳐다보았다. 두목의 눈이 탐욕으로 넘쳐 흘렀다.

“저것이다! 내 보물! 저 검을 뺏아라!”

그러나 두목의 외침은 검의 빛에 파묻히고 말았다. 은색의 막(膜). 길 위의 그들을 둘러싼 것은 빛으로 만들어진 막이었다. 마치 쇠로 된 그릇을 그들의 머리에 엎어놓기라도 한 듯이 화살은 빛의 막에 의해 모두 튕겨졌다. 두목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막이 아니었다. 너무도 빨리 휘둘러지는 검에 의해 마치 막이라도 생긴 것 같은 착시 현상이 벌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보여준 신기(神技)에 산적들은 모두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을 잊었다. 그 몇 초간의 틈. 숨 한 번 쉴 그 틈을 남자는 놓치지 않았다.

두목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시 화살 쏘기를 재촉했지만 이미 늦었다. 통에서 화살을 꺼내고 그 화살을 활에 장전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5초 남짓. 그러나 그 순간에 피보라가 뿜어졌다.

흐릿한 갈색의 잔영. 그리고 그 뒤에 남는 새빨간 피의 향연(香煙). 마치 질풍이 휩쓸어 버린 듯, 일직선의 파괴. 놀라웠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두목이 기겁을 하는 동안 부하들은 하나 둘 씩 모두 남자의 검에 베어졌다. 그가 훗날 질책하려 했던 신참도 목이 잘려 땅에 나뒹굴었다.

‘도망가야 된다!’

가슴 속에 울려대는 경보는 뇌를 강타하고 있지만 마음 뿐이었다. 이미 다리는 의지를 거역하고 풀썩 꺾어져 버렸다. 벌벌 딸리는 다리. 오줌이라도 안 싼 게 다행이었다. 그것으로나마 두목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모두 멈칫하는 순간 절반 이상의 부하들이 죽었다.

남은 부하들은 화살을 장전했지만 그들의 목표는 맞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잔영 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몸놀림에 어디를 쏘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순간 빛이 다시 번쩍였고 동료가 또 한 명 죽어나갔다. 두목이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쏴! 죽여버렷! 어디든지 쏴버렷! 죽이란 말얏!”

다시 화살이 발사되었지만 방향을 잃은 화살은 남자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화살에 발라진 독이 무색하리만치 화살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휘링.

수천 번 정제된 철판이 구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청아하고 맑게 울리는 소리. 그러나 소리가 이루어낸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끔찍한 장면이 숲의 고요를 깨뜨렸다. 악마. 파괴의 악마. 거칠 것 없는 남자의 걸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지나간 곳. 피가 흐트러지고 시체가 널부러진 곳.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악마의 목표는 그를 공격한 무리들의 우두머리, 곧 두목 자신이었다. 남자가 눈앞에 우뚝 서자 두목은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돌에 걸려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한낱 산적 따위가 무림의 고수를 건드린 결과가 이것인가.

주위를 돌아보니 살아 있는 부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절망에 찬 눈을 들자 남자가 물었다.

“우리를 공격한 이유가 뭐지?”

남자의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랬다. 남자는 한족(漢族)이 아니었다. 이족(異族)의 어색한 발음. 안그래도 뇌의 활동이 정지 일보 직전인 상태의 두목은 남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남자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내뻗은 검만을 두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검(劍).

남자의 검은 일반의 검과 달랐다. 검은 여인의 요대마냥 날씬했는데 검신 전체가 은빛으로 둘러싸여 은은한 빛을 냈다. 호리호리한 검신(劍身)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었는데, 그 날이 하도 얇고 가녀려 물 위에서도 동동 뜰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의 손아귀에 쥐어든 검병(劍柄)은 보통의 검에 비하여 길었는데 그 끝은 작은 은빛 종달새 두 마리가 조각되어져 있었다.

검은 마치 눈이 휘날리는 하얀 산에 홀로 서 있는 설녀(雪女)를 연상케 했다. 차갑고 범접할 수 없는 날카로움으로 치장한 눈의 미녀(美女).

두목은 정신이 나간 듯 남자의 검을 향해 손을 들었다. 마치 첫사랑 연인을 만지듯이 경애와 두려움이 가득 찬 마음이었다. 만년빙(萬年氷)과 같이 싸늘한 한기를 내뿜는 검. 서른이 넘는 부하들을 살상한 검, 악마의 검이었으나 그 이름은 그렇지 않았다.

소예검(素叡劍).

눈처럼 희디 흰 밝음을 드러내는 검의 이름.

이 보검을 위해 두목의 수하들이 모두 죽었다. 장년의 남자는 두목의 더러운 손길을 검을 통해 느끼자 손을 가볍게 떨쳤다. 두목의 손가락이 날카로운 예기에 잘려나가 버렸다.

그러자 흠칫 정신이 든 듯 두목이 눈을 버럭 들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사나운 눈길이었다. 그것은 부하들을 죽인 원수를 보는 눈이라기보다는 연인을 빼앗긴 질투의 눈이었다.

“네 놈이…… 네 놈 따위가 감히 중원의 보물을 가지고 있단 말이냐! 한낱 이족인 주제에!”

남자가 두목을 묵묵히 쳐다보다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너의 목적도 이것이었더냐.”

‘도’라는 어미에 남자의 고뇌가 담겨져 나왔다. 이미 이러한 일을 여러 번 겪어본 듯 했다. 두목이 완전히 악에 받쳐 끔찍한 목소리로 절규했다.

“이건 내 거야! 오랑캐 새끼가 감히 소예검을 쥐고 있다니! 간덩이가 부었……!”

신랄하게 욕을 퍼부으려던 두목의 입은 마지막을 맺지 못했다. 남자의 손이 움직이고 빛이 작렬했다. 뒤이어 새빨간 선혈이 뿜어졌다.


Comment ' 1

  • 작성자
    Lv.8 이정수A
    작성일
    04.12.23 21:05
    No. 1

    정담지기님은... 잠수중이시겠죠?? 휘이휘이~~ (-- )( --)~~
    <천산유록>은 고무협에서 연재 중입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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