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토의 중세 상인> 중에서 발췌, 수록. 굵은 글씨와 색글씨는 본인이 임의로.
요즘 판타지 소설에 보면 노예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오죠. 실제 중세는 어땠을까 한번 엿보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고증을 따라야 한다기보다, 흥미로운 ‘소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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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사업 분야인 노예무역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것 역시 에스파냐와 제노바 지점들을 개설한 후이다. 당시 발레아레스 제도는 서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노예무역 중심지였다. 물론 이 시기에 노예무역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 에스파냐는 서유럽에서 가장 큰 노예무역 시장이었고, 1128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온 상인들이 제노바 시장에서 이슬람 노예를 팔고 있었다. 그런데 1348년 흑사병이 돈 이후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갑자기 가내 노예 수요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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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 1336년에 공포된 시 법령은 노예들이 이교도, 즉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조건으로 노예 수입을 공식 허가했고, 곧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거의 모든 부유한 가정이 노예를 두게 되었다.
노예들은 종족이 다양했고, 그중 많은 수가 9~10세 된 어린이였다. 황색 피부에 눈초리가 치켜 올라간 타타르인(몽골인), 잘생긴 금발의 체르케스인, 그리스인, 러시아인, 조지아인, 알란인, 레스기아인이 있었다. 부모들이 빵 한 조각을 받고 팔거나, 타타르인 약탈자 또는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납치된 노예들은 타나, 카파, 콘스탄티노플, 키프로스와 크레타의 노예시장에서 베네치아와 제네바 부두로 수송되었고, 그곳에서 거래상들에게 매입되어 내륙 소비자에게 판매되었다.
14세기 토스카나 지방의 부유한 가정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의 노예를 거느리지 않은 집이 거의 없었다. 신부는 노예를 지참금의 일부로 가져갔고, 의사들은 진료비 대신 노예를 받기도 했으며, 사제직에 종사하는 노예를 찾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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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거래 규모가 크지 않았고, 대개 다른 상품을 선적하면서 노예 몇 명을 포함시키는 수준이었지만, 많은 편지들이 이러한 거래의 존재를 분명히 입증한다. 예를 들어 1396년 5월 21일 로마니아 지방에서 제노바로 들어온 한 선박의 화물목록에는 순례자용 의복 37자루, 납덩이 191개와 함께 80명의 노예가 기록되어 있다.
시라쿠사에서 마요르카로 들어온 또 다른 서박은 짐승 가죽 1,547필과 노예 열 명을 운송했고, 베네치아에서 이비사로 가는 한 선박은 대청 128자루, 놋쇠 55자루, 원면 열다섯 자루, 면사 다섯 자루, 종이 네 자루, 오배자 다섯 통과 함께 아홉 명의 터키 노예를 운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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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주인들의 손길이 얼마나 먼 곳까지 미쳤는지, 당시 상사들 간의 유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바르셀로나에서 아비뇽에 있는 부오니세냐 디 마테오에게 보낸 카탈루냐어 편지에 잘 나와 있다. 이 편지의 발신인은 프로방스 지방으로 달아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두 명의 노예를 잡아 달라고 요청했던 듯 하다.
“그중 한 명은 이름이 드미트리이고, 크고 잘생긴 남자입니다. 그는 젊고 건강하며 피부가 발그레합니다.” “다른 노예는 앞니가 몇 개 없고 녹색빛 도는 피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하건대 그들을 잡아 꽁꽁 묶어서 배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상인들이 노예의 경우에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종종 여행의 위험에 대비해 보험을 들었음이 분명하다. 다티니의 문서에 피사 항에서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탈루냐 출신의 구매자에게 보낸 ‘마르게리타’라 불리는 타타르인 노예에 대해 1401년 5월 9일 날짜로 가입한 보험증서가 포함되어 있다. “신의 손, 바다, 인간, 물물교환 또는 주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위험”에 대비해 금화 50피오리노의 보험을 들었다. 그러나 “여자 노예가 자신의 의지로 물에 빠지는” 것과 같은 자살이나 도주 시도에 대해서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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