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무언가를 만드는 제작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기 마련입니다. 영화, 노래, 소설, 그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만들어졌고요.
물론 그런 이야기들이 많아짐에 따라 보는 사람의 취향도 점점 더 까다로워지게 됩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라 여러 이야기들을 보면서 몇 가지 기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제작자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그대로 갖다 쓰면 안 됩니다.
물론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만, 자신의 창작혼을 불태우며 과거로 돌아온 주인공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먼저 덥석 갖다 쓰면 아무래도 좀 궁색해보이더군요. 이득을 얻기에는 가장 쉬운 길이지만 역으로 쉬운 길을 가지 않는 주인공일수록 진정성이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주인공일수록 매력적이고요.
두 번째. 제작자가 과거의 거장들에게 존중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그래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보통 창작에서 개인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는 존재고, 그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은 우스꽝스러워보일 때가 많습니다. 자신이 영감을 받은 거장들에게 미래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오만하게 행동하는 건 주인공의 바닥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꺼려지게 되더군요.
세 번째. 제작자가 자신의 분야에 대해서 설득력 있게 설명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긴 설명이 재미를 없애거나 몰입을 깰 때가 있지만, 이런 제작자의 이야기에서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분야에 대해 알아가는 건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잘 쓴 소설들은 독자가 그 시절의 분야를 직접 경험해서 올라오는 듯한 체험을 하게 해줍니다. 다 읽고 나면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처럼 가슴 벅찬 기분이 몰려오는 건 덤이고요.
정리하자면 제작자가 다른 사람의 작품을 그대로 갖다 쓰지도 않고 동시에 다른 거장들에게 존중심을 보이며 자기 분야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까지 재밌게 잘 해줘야 하는 작품이 제가 보는 작품이 되겠습니다. 많이 양심 없는 기준입니다만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그런 글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갓겜의 제국 1998은 위의 요소들을 정확히 만족시켰고 덕분에 제가 본 게임 제작자 소설들 중 가장 재밌는 소설이 되었습니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저는 이 소설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생동감이라고 생각합니다.
1998년으로 떨어진 게임 개발자 주인공이 다시 게임 개발에 도전한다.
이 소설의 기본 플롯입니다. 이 어떻게 보면 흔한 플롯에 작가님은 확실한 생동감을 불어넣었습니다.
누구나 여기 다음에는 '주인공은 컴퓨터를 들여놓고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작가님은 1998년의 물가, 용산 풍경, PC 게임샵의 모습, 그 때 유행한 게임들, 그 때 사용하던 전자기기들. 이런 것들을 주인공의 눈으로 훑으면서 하나하나 고민하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동시에 게임 개발도 단순히 이걸 하겠다가 아닌, 그 시대의 기술력 한계로 가능한 게임들과 유행하는 게임들, 그 시절 게이머들이 가진 사고의 한계 등 다양한 요소들을 짚어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제가 그 시절을 직접 체험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습니다.
이게 바로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 생동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게임 개발 이후로도 이런 장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쓰다보면 잊을 법한데도 작가님은 꾸준히 시대의 생동감을 묘사합니다. 게임을 만들어서 배포할 때도(지금처럼 편하게 사이트에 올려서 배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보니 그 시대에 맞는 방법이 동원됩니다), 학교에 들어가서 컴퓨터를 사용할 때도, 그 뒤에 다른 게임 제작사들과 접촉할 때도, 이 모든 것들이 그 시대 속에 녹아들어서 존재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하고 어떻게 보면 품을 들이는 것에 비해 티가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저는 이런 요소들에 커다란 재미를 느꼈습니다.
지금 추천글을 쓰고 있는 동안, 오늘 전개에서 주인공은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알 법한, 게임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들의 출현에 맞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벌써부터 너무나 기대가 되고, 동시에 이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읽으면서 저와 같은 취향을 가지셨거나 조금이라도 공감한 분들은 이 글을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글이라고 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