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무림서부 / 평점: ★★★★☆ (4,0)
한줄평: 조금은 올드한, 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작품
[시놉시스]
무공이 실재하는 세계, 이 세상의 중국은 콜럼버스보다 먼저 신대륙을 점령했다.
무림인들과 황제의 충실한 신하들, 꿈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 어우러진 신대륙.
이 세계에 환생한 지구인 장건은 애마 조조와 함께 신대륙을 떠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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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 지는 황야, 낡은 옷을 뒤집어쓴 건맨(혹은 카우보이)은 자신이 구한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홀로 정처없는 여행을 떠난다. 내일쯤이면 그는 또 어디에선가 약자들을 위해 총을 뽑을 것이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서부극의 이미지입니다. 저는 사실 서부극을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각종 서브컬처를 통해 다시 만들어진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죠, 다양한 형태로 활용된 서부극의 요소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낭만'이 아닐까 합니다. 거칠지만 사실은 선한 주인공, 홀로 악당들과 맞서는 용기, 성공이나 보상에 연연하지 않는 초연함...요즘 트렌드에 비추어 보자면 올드한 소재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제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가만... 그런데 어째 쓰다 보니 서부극의 낭만이란 요소는 우리에게 익숙한 무협 장르와도 통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래서 무협을 좋아하는 걸까요...?) 컵라면 작가님의 '무림서부'는 이런 무협과 서부극의 공통점을 묶다 못해 아예 하나의 무대에서 폭발시켜 버리는 작품입니다.
작품 제목에 어울리게, 무림서부의 주 무대는 카우보이들이 달리던 신대륙입니다. 무림이 먼저 점령한 신대륙인 만큼, 카우보이대신 무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죠. 배경에 맞춰 장건이 살아가는 무림도 묘하게 비틀려 있습니다.
무림인들이 신대륙에서 투닥대는 동안, 그들의 무공은 본토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변했습니다. 서부극의 백미인 결투씬처럼, 무인들 역시 단 한번의 칼질에 모든 것을 걸기 시작합니다. 그 칼질에 방해되는 잡다한 무공들(진기도인, 점혈법, 경공술...)은모두 버려졌지요.이제 신대륙에서 중원 정통의 무공을 기억하는 것은 세가를 비롯해 '무림 문파'로서 유지되는 극히 일부의 무림인들 뿐입니다.
총이 칼로 바뀌기는 했지만, 서부극에서 일어나는 일은 늘 똑같습니다. 악당들은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우리의 주인공 장건은 악당들을 응징하고 쿨하게 떠나갑니다. 신대륙의 무인들에게 협이나 정의라는 단어는 몹시 낯섭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장건 역시 겉보기로는 그들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도박을 하다 가진 돈을 다 잃고,조그만 의뢰라도 철저하게 돈을 받아냅니다. 하지만 장건은 자신에게만 보이는 어떤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척박한 무림서부의 세계에서 장건은 '착한 사람'으로 불리기에 충분합니다. 신대륙에서는 잊힌 단어이지만, 중원이었다면 협객으로 불렸겠죠. 협객, 무협에서 지겹게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절대경지에 오른 초인이 입에 담는 ‘협’과, 여기저기 칼침을 맞고 다니는 장건의 ‘협’은 느낌이 다르네요. 심지어 장건은 스스로 ‘협’을 입에 담지도 않습니다. 낡은 흑백영화 시절, 서부극의 주인공이 이런 느낌이었을까요.
무림+서부, 사실 이 작품은 제목부터 어딘지 올드한 느낌을 풍깁니다. 최근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전개속도도 느린 편이고,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날뛰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주인공은 ‘그럭저럭 강해보이는 수준’으로 무협소설 하면 떠오르는 절대고수와는 거리가 멉니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약해서 밸런스가 잘 맞기는 하지요 ㅎㅎ) 거기다 장건이 만나는 사건들도 어딘가 찜찜함을 남기며 마무리되는 등 흔히 말하는 사이다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을 적절히 배합해 멋지게 풀어냈기에, 무림서부는 트렌드와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도 많은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좋았던 점은, 작가님이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서부극을 소재로 삼는다면, 더 쉬운 길이 분명히 있거든요. 가장 쉬운 방법은 서부극스러운 캐릭터의 활용일 겁니다. 예를 들어 히트작이었던 <다른 세계에서 주워왔습니다>의 경우, 카우보이 캐릭터인 사이보그 '셰인'은 주인공보다 더 강한 개성을 보이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분위기만을 원한다면 이 쪽도 좋은 방법이겠죠. 하지만 무림서부는 배경부터 공을 들여 '서부극스러움'을 만들고 있습니다. 현대의 기억을 가진 주인공조차 '서부극'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나, 장건의 행동은 충분히 '무림서부'라는 제목과 어울립니다. 이렇게 배경,분위기 등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율하는 것은 특색있는 캐릭터 하나를 넣는 것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가는 일입니다. 작가님께서 더 많은 공을 들이신 만큼, 무림서부의 멋지게 완성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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