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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유래[편집]
서원의 명칭은 당나라 현종 때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 등의 설치에서 유래하였다. 원래 내외의 명현(名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기르는 사설기관이었는데, 선현을 제사하는 사(祠)와 자제를 교육하는 재(齋)를 합하여 설립되었다고 한다.
설립 배경[편집]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 중심 정책을 써서 고려의 사원(寺院)을 대신하여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선현사(先賢祠)·향현사(鄕賢祠) 등을 장려하였다. 세종은 특히 이를 장려하여 상을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서원은 재와 사의 두 기능을 겸한 것이 못 되었으니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었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서원이 생겼으며, 1550년(명종 5년)에는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액(額 : 간판)을 하사하고 책·노비·전결(田結) 등을 주어 장려하였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으며 마침 황폐해 가는 향교에 대신하여 국가의 보조를 받는 서원이 각처에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백 24개, 숙종 때에는 1도에 80 ~ 90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기능[편집]
서원은 명목상으로 그곳에 배향된 선현의 정신과 뜻을 되새겨 학문과 덕행을 닦고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는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는 설립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학업과 과거 합격이 주목적이었던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그 기능이 달랐다.
그밖에도 지방 사족의 지위를 강화해 주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으며, 사화로 말미암아 향촌에 은거하여 생활하던 사림의 활동 기반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급속히 발전한다.[1]
이와 같이 서원은 유학의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 또는 사묘의 역할, 향약 등의 향촌 질서를 정하고 백성들을 계도하는 역할, 단순한 교육이 아닌 학문 연구와 발전의 기능을 하는 연구소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향촌의 사림을 결집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또한 서원은 교육 기관이므로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부터 견제를 적게 받는다는 이점이 있고, 문중 서원의 경우에는 자기 문중을 과시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에 시대가 내려올수록 번창하게 되었다.[1]
폐단[편집]
서원은 양적으로 증가하면서 일종의 특권적인 것이 되어[2] 여기에 부속된 토지에는 조세를 과하지 않았고, 또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을 기피하는 곳이 되었다. 유생은 향교보다도 서원에 들어가 학문을 공부하는 대신 붕당(朋黨)에 가담하여 당쟁에 골몰하고 심지어는 서원을 근거로 하여 양민을 토색하는 폐단도 생기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서원의 남설(濫設), 누설(累設)은 조정의 중대한 두통거리가 되어 1644년(인조 22년)에는 서원 설치를 허가제로 하였고, 1657년(효종 8년)에는 서원을 누설한 자는 처벌하는 규정을 발표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영조, 정조, 철종 등도 서원 정비에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여 정조 때는 650개의 서원이 남아 있었다. 그 중 유명한 것은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 송악서원(松嶽書院), 화양서원(華陽書院), 만동묘 등이었다. (위키백과 참조)
경상도를 배경으로 하는 본 작품의 지정학상 설정을 볼때, 도산서원을 율곡검원으로 쓴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현재의 개념으로 학원과 같은 느낌의 장소를 배경으로 한 덕분에 학원이능배틀차원전쟁역사대체물 정도로 본 작품을 개념정리 할수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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