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정통무협 ‘격랑’ 에 관한 추천사입니다.
격랑은 운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천지간에 의지할 사람이라곤 자신밖에 없던 한 아이에게 뜻밖의 선물처럼 주어진 운명.
아이는 그 선물의 포장지도 벗겨보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과정에서 회의와 고민은 생략됩니다.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그 선물과도 같았던 운명의 정체가 다름 아닌 인연이었음을 아이는 깨닫게 됩니다.
그는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아온 주변인들과 함께 시대의 격랑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듭니다. 그 또한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격랑은 독특한 무협소설입니다.
다루는 소재도 그렇고 등장인물 또한 그러합니다.
주인공인 영읍은 영악하지만, 그것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배갑과 복갑에 얽힌 전대의 다툼, 자미두수로 대표되는 운명의 강제성이
항상 그의 뒤를 그림자의 형태로 뒤쫓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의협(義俠)을 상징합니다.
무협이라고 불리는 장르에서 협이라는 개념이 망각될 때
얼마나 헛헛한 작품이 되는지를 필자는 숱하게 보아왔습니다.
잠깐 한비의 오좀설을 펼치자면,
칼을 차고 도당을 만들어 법을 범하는 무리―라는 설명과 함께 유협이란 말이 등장합니다.
요컨대 정사에 기록된 유협(유비, 관우, 하후연 등등)이 아닌, 역사에서 누락된 유협의 서사가 바로 무협입니다.
우월한 완력을 갖고 있되 제도권에서 유리된, 그럼에도 도처에 산재한 비적과는 다른 가치관(협)을 지닌 자들.
협은 그런 그들과 비적을 나누는 가장 확실한 준거가 됩니다.
그리고 영읍 또한 이 작품에서 그와 같은 준거가 되고자 합니다.
협의 본질이 백성을 향한 마음가짐임을 그는 이미 꿰뚫고 있습니다.
도르페네(동평).
갈 족인 그녀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이자 영읍의 보호자입니다.
피어린 도랑을 철벅이며 살아왔음에도 그녀는 자신의 여성성을 모성애로 확인받고자 합니다.
영읍에게 있어 그녀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모친이며, 어린 남동생에게 자신이 먹을 당과를 주저 없이 양보하는 누이이자,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스승입니다.
영읍이 자신의 영악함을 이용, 타인을 기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녀의 훈육 덕분이었습니다.
특히 작가 특유의 의고체로 그녀의 외양을 형용하는 장면에선 그 아름다운 자태가 머릿속에 순식간에 그려져 눈앞에 실물이 둥둥 떠다닐 지경입니다. 실로 매혹적인 여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격랑은, 결투 장면에 있어서도 그 독특한 텐션을 유지합니다.
흡사 고룡의 작품에서나 접했던 그것에 화려한 색채가 더해진 느낌입니다.
통상의 속도로 진행되던 장면들이 결투의 순간에 이르러선 갑자기 프레임 수가 늘어나면서 이른바 슬로우 모션으로 전환됩니다.
시간이 멈춘 듯합니다.
동백나무에서 동백꽃이 꽃봉오리째 떨어집니다.
영읍은 검을 뽑고 호흡을 머금은 채 상대를 향해 짓쳐 들어갑니다.
그의 소맷자락이 푸른빛으로 펄럭입니다.
합을 주고받고 생사를 교환하는 사이, 초식의 이름과 혈 자리의 나열 등이 무용에 가까운 것으로 전락합니다.
영읍이 쓰러진 상대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마치 하늘을 대하는 듯합니다.
그가 검집에 검을 밀어 넣습니다.
떨어지던 동백도 마침내 바닥에 닿습니다.
격랑의 서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고아로 자란 아이가 천하의 판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복갑의 주인으로 선택받고 이후 어엿한 장부로 성장하여 대륙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세력과 맞서게 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골자입니다.
때는 명초 선덕제 연간입니다.
이미 두 번이나 추천받았던 작품이기에 이 이상의 언급은 자제토록 하겠습니다.
작가는 본인이 보유한 수많은 낱말 가운데서 시대상에 적합한, 그럼에도 그리 어렵지 않고 생경하지 않은 것들만 골라 문장을 구성합니다.
비범한 재능입니다.
길어야 할 때는 길어지고 짧아야 할 땐 여지없이 짧아집니다.
가독성을 고려, 문단을 억지로 나누지 않아도 별다른 저항감 없이 읽히는 이유입니다.
한국말이 가진 리듬, 특히 산문시에 대한 이해와 편력을 거치지 않고선 나오기 힘든 문장이라고 필자는 단언합니다.
이 배(격랑)가 과연 얼마만큼 긴 항적을 거느릴지, 또 어떤 항구에 닿아 마침표와 같은 닻을 내리게 될지 필자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지금까지 기존의 무협을 통해 봐왔던 도착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예측만 조심스레 할 뿐입니다.
이 배에 오르지 않으시렵니까?
승선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격랑은 그런 작품입니다.
장황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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