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읽은 글이기에 추천글을 쓰려고 했지만, 필자가 남의 허물을 보는데 익숙하고 칭찬에 인색한 까닭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법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소설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글자들의 나열, 그리고 그것들이 자아내는 이야기. 글자들의 나열이란 무엇인가 하면 소위 '필력이 좋다'고 할 때 쓰이는, 묘사에 쓰이는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고, 그것을 이어 문장을 만들고, 그것을 이어 문단을 만드는 기예를 말합니다. 네,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죽도록 배우는 부분입니다. 순문학이라면 꼰대 내지는 적폐라고 여기실 분들이 많겠지만, 그들의 공부가 완전히 무용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순문학을 즐기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문장의 나열에는 오직 그것만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이 글은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도 없이 같은 단어를 반복하고 어미를 되풀이하는 것을 입시문예에서는 어휘력 부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어휘력이 부족합니다. 상황에 맞는 어휘를 쓰는 꼬라지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정확한 단어를 사용했을 때 절로 감탄하게 되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범용한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에 맛이 살아날 리가 없겠죠. 문단 구성에 들어서는 기예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한국어를 할 줄 압니다. 글을 읽으면서 너무 많은 정보를 담으려다 구조가 무너져버린 문장이 없습니다. 아주 완벽하지는 않지만 틀리지 않은 단어를 구사합니다. 이 기예라는 것은 글을 쓰면 쓸수록 발전하게 되어, 최신화를 보면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한국인인데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게 무슨 칭찬이야 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본인의 선작목록에서 읽을때 불편하고 관성으로 따라간다고 생각하는 글을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오.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 느껴지는 글이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그들은 한국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겁니다. 늦기 전에 익절하십시오.
물론, 이 소설의 매력을 기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용, 즉 이야기일 수밖에 없겠죠? 소설의 3요소, 인물 사건 배경이 자아내는 이야기입니다.
배경에 고심한 흔적이 보입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아슬아슬한 합격이 아니라 꽤 고점을 줘도 괜찮겠지요. 독창적이고 참신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빌려온 배경으로 유세부리는 자들보단 낫습니다. 적어도 자신이 어디에서 무언가를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조절하니까요.
일어나는 사건도 나쁘지 않습니다. 역시 참신하다고는 하기 어렵겠습니다. 게임의 주인공의 조력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수없이 많이 시도되었고, 이 소설은 그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게임의 주인공을 아서 하나가 아니라 이반 등 다섯 명으로 둠으로서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좋았다고 봅니다. 다른 NPC들도 원작 주인공의 조력자로서 최소한의 개성을 보입니다.
인물 이야기에 이어서, 특히 가장 비중있게 묘사되는 에단이란 주인공은 어떨까요.
조금 뜬금없지만, 하얀늑대들이라는 소설을 아십니까? 사이다패스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하얀늑대들을 재연재한다면 고구마라고 욕이나 먹겠죠. 주인공 카셀은 약하고 회귀자도 아니고 말빨이 좀 셀 뿐이며 이마저고 양장본에서는 너프먹었습니다.
그가 가지는 유일무이한 재능은 사람들을 이끄는 능력이고, 이 리더십에서 오는 카리스마가 발휘될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습니다.
에단이라는 인물의 해석이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작가가 그렇게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네요.
잠깐 서사로 돌아와서, 게임 판타지에서 항상 지적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긴장감입니다.
주인공은 언제든 게임을 그만둘 수 있으며, npc들은 그저 데이터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게임판타지는 주인공을 게임을 그만두지 못하게 하고, 게임과 닮은 이세계로 보내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세계의 주민들을 대하는 태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무생물적이라면 그것도 나름 재밌겠습니다만, NPC들에게 인격을 불어넣은 이상 작가는 주인공이 그 세계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에단은 꽤 오랜 시간동안 불치병에 걸린 19세 청년입니다.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한 유일한 예언자 에단이 아니라, "한번 죽었는데 또 죽는다고 뭐 죽기밖에 더 하겠어?" 라는 태도가 에단을 아르카디아로부터 유리시킵니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에단의 마음에 이세계의 주민들이 들어오는 과정은 충실하게 묘사하니 참 기분이 이상하네요.
어느새인가 아서를 주군으로 섬기고, 케이 경이 친구가 되고, 로즈마리를 사랑하게 되는데도 아직 죽기밖에 더 하겠어라는 생각으로 게임의 지식을 아무 주저 없이 사용합니다.아르카디아가, 알비온의 가족들이 에단에게 소중해진 과정이 충실히 묘사됨에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가족이라면서 공략에 필요한 도구의 쓰임새를 고민하는 모습이 굉장히 괴리감이 듭니다.
알비온의 가족', '주군' 아서인지, '공략이 편한 삼왕자' 아서인지. 서임은 주군을 섬기는 의식이 아니라 원탁의 기사 칭호를 받는 게임 보상으로 인식하고 말입니다.
에단이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그는 예언자고, 뭐든지 의도대로 되고, 위기는 전부 예측 범위 안입니다. 그래서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 된 아르카디아에서 아직도 게임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에단은 매력적입니다. 아서나 리샤르처럼 각오 있는 선함도 아니고, 이반처럼 마음을 고쳐먹는 성장형 주인공도 아니지만, 에단에게는 평범한 선함이 있습니다. 엑터를 구한 것은 그가 괜찮은 동료 캐릭터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받아 준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엑터의 상태창을 킬 게 아니라 후자를 더 자각했으면 매력이 느껴졌을 텐데 아쉽네요.
에단이 제공하는 계책은 게임 클리어를 빠르게 하기 위해서지만, 그것이 선한 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게임에서 현실이 된 사람들을 위해 에단은 더 나은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감히 에단에게 필요한 것이 실패라고 말하겠습니다. 자신이 세계의 구원이 아닌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취한 행동의 결과로 게임의 예지가 빗나가야만 합니다. 효율적인 대륙의 구원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을 거부하게 되었을 때, 게이머 에단이 아르카디아 주민이 되는 그 때 이 소설에서 진정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거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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