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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작성자
Lv.41 학도병
작성
03.10.22 00:52
조회
666

전형준(全炯俊·47) 서울대 중문과 교수가 최근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서울대 출판부)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의 저서를 펴내 화제다.

‘내로라’하는 국립대 교수인 데다 ‘성민엽(成民燁)’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문학평론가가 무협소설 ‘따위’의 문화적 의미를 읽어내려 한 시도에 신선하다는 반응이 적지 않은 것. 그리고 그렇게 정색을 하고 들여다본 한국 무협의 세계가 만만치 않은 ‘내공’을 쌓고 있다는 점에 독자들은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국내 무협소설 마니아는 1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무협소설의 용어를 빌리자면 동생이나 자녀가 빌려온 무협소설을 몰래 들춰보며 자격지심을 느끼는 사람은 공력에서 ‘낭인무사(浪人武士)’ 수준. 자신의 무협소설 독서이력을 자랑 삼아 늘어놓기에 열흘 낮 열흘 밤으로도 부족하다면 ‘고수(高手)’라 부를 만하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전 교수처럼 무협소설을 읽으면서 ‘대중 독자와 문화비평가의 내적 분열을 명징하게 의식’한다면 ‘대협(大俠)’에 이르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전 교수에게 지금까지 무협소설을 얼마나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어지간히 읽었다”고 했다. 시작은 중학교 1학년 때인 1969년에 읽은 워룽성(臥龍生)의 ‘야적(夜笛)’이었다.

“친구를 따라 만화방에 가서 처음 야적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빨간색 세계문학전집만 보고 또 보던 저는 ‘이렇게 신기하고 멋있는 이야기 세계가 있다니’ 하며 충격을 받았지요.”

그 후 워룽성의 ‘무유지(武游誌)’ ‘무명소(無名簫)’ ‘천애기(天涯記)’를 밤새워 읽었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무협소설을 읽다 선생님께 뺏기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저를 부르시기에 혼이 날 각오를 하고 갔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또 빌려와라’.”

전 교수가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하게 된 배경도 이런 무협소설 독서사와 무관하지 않다. 서울고 1학년 시절에는 무협소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중국사와 중국문학사를 읽고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한시작법’을 사다 한시를 짓기도 했다. 여름방학 때는 YMCA에서 중국어 강좌를 들었다.

“요즘도 읽느냐”고 물었더니 전 교수는 잠시 머쓱해하다가 말을 이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 문학과 지성사 편집위원 회의가 있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에는 꼭 술을 마시게 되는데 술 깨는 동안 근처 만화방에 들러서….”

전 교수는 “왜 무협소설을 읽는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이 1969년 발표한 글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에서 제시한 해답을 내밀곤 한다. 김현의 결론은 무협소설 읽기가 현실로부터의 도피이고 그 읽기에서 독자가 얻는 것은 대리만족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협소설이 지닌 매력인 동시에 무협소설이 저급한 대중문화로 폄하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 교수는 “김현 선생의 성찰은 대만의 무협소설에 한정된 것”이라며 “90년대 중반 이후 출간된 한국무협(신무협)은 또 다른 세계를 보여 준다”고 힘주어 말한다. 전 교수가 ‘무협소설의…’를 쓰게 된 동기도 꾸준히 진보해 온 이 신무협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란다.

한국 무협소설의 역사는 1961년 중국 웨이츠원의 ‘검해고홍(劍海孤鴻)’을 김광주씨가 번역한 정협지(情俠誌)에서 시작됐다. 무협소설의 전형은 마이너리티였던 주인공이 역경을 이겨내고 사회의 주류 질서에 편입하는 성공담이다. 그러나 1994년 무렵부터 신세대 작가들이 쓰기 시작한 신무협에서 대다수 주인공들은 중산층에 편입하고자 하는 세태를 야유하는 편에 선다.

전 교수는 “중산층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야합하던 기존의 무협을 신무협이 뒤집고 있다”며 신무협의 문제의식을 높이 샀다. 신무협이 진화하면서 등장한 여성 무협작가들의 페미니즘적 경향도 주목할 만하다.

“진산(眞山)의 ‘사천당문(四川唐門)’은 여성이 문주(門主)가 되는 과정에서 온갖 고난을 거치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묻는 작품입니다. 유사하(流沙河)의 ‘반인기(反人記)’는 예쁘지도 않고 남자보다도 무뚝뚝한 여자 주인공이 무사로서 무도의 완성에만 집중하며 젠더의 구분을 뛰어넘는….”

신무협 이전의 무협소설은 중국의 무협소설을 화교들이 초벌 번역해 놓으면 우리 윤문가들이 윤색한 것들이었다. 이들 윤문가는 70년대 후반부터 자신의 필명으로 창작 무협을 발표하기도 했다. 신무협 작가들은 이들과 달리 대학에서 영문학 독문학 철학 한문학 등을 전공하면서 문학적 소양을 쌓고 장르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전 교수는 ‘무협소설의…’ 2부로 신무협 작가와 작품론을 써볼 계획이다.

이어지는 3부는 신무협에 영향을 준 장르와 거꾸로 신무협의 영향을 받은 장르의 분석이다. 전 교수에 따르면 신무협에서는 애거사 크리스티나 스티븐 킹의 추리소설 기법과 고급 문학의 흔적이 발견된다는 것. 또 만화 영화 게임 드라마 등 다른 문화 장르에서 나타나는 무협소설적 장치들을 추적하고 ‘무협적인 것’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수용자 분석도 곁들일 예정이다. 전 교수의 앞으로의 작업이 기대된다.

이진영기자 [email protected]

▼전형준 교수는 ▼

1956년 출생

1979년 서울대 중문과 졸

1992년 서울대 중문학 박사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1983∼1986년 ‘우리시대의 문학’ 무크지 편집 동인

1987∼1999년 ‘문학과 사회’ 창간, 편집 동인

1999∼현재 문학과 지성사 편집위원

1989∼1999년 충북대 중문과 교수

1999∼현재 서울대 중문과 교수

‘현대 중국문학의 이해’ ‘현대 중국의 리얼리즘 이론’ 등의 저서와 ‘지성과 실천’ ‘문학의 빈곤’ 등의 문학평론집, ‘아Q정전’ 등의 번역서를 다양하게 펴냈다.


Comment ' 4

  • 작성자
    Lv.23 바둑
    작성일
    03.10.22 01:20
    No. 1

    킁킁 혈기린외전 조해일 교수님의 추천사가 떠오르네요...
    소설은 그저 소설일 뿐이다라는 말... @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8 검마
    작성일
    03.10.22 01:32
    No. 2
  • 작성자
    Lv.5 만화량
    작성일
    03.10.22 12:45
    No. 3

    요즘도 읽느냐”고 물었더니 전 교수는 잠시
    머쓱해하다가 말을 이었다. 흠..머쓱한 일인가요?
    왜 다 술먹고 술깨려고 무협을 읽을까요?
    평소엔 뭘 읽기에..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김자무시
    작성일
    03.10.22 14:40
    No. 4

    만화량님/머쓱해했다는 것은 기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머쓱해한 것이 아니라, 전형준 교수는 '요즘 내가 읽은 게 뭐더라?'하고
    잠시 생각을 했던 건 아닌지?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았으면 합니다.
    아무튼 평단에서 활동하는 평론가의 의미 있는 작업에
    박수를 더 보내는 게 지금은 필요할 때라고 봅니다.
    순문학 평단의 평론가가 무협에 대해 안다면 뭘 얼마나 안다고? 라고
    생각한다면, 순문학 독자들이 장르 독자들에게 보이는 배타성과 무협 독자들이
    드러내보이는 배타성이 뭐가 다른 건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열린 마음으로 지켜봐 주는 것이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요? 네 제 사견이었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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