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지망생인 저는 고교 시절, 방학 때마다 외할머니가 주지스님으로 계시는
한 암자에 가서 책을 읽으며 시나 소설을 쓰곤 했습니다. 하루는 온종일 비가
내렸는데, 그 빗속을 뚫고 한 젊은 스님이 절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법당 툇마루까지 오기도 전에 돌탑 앞에서 쓰러져버렸고 놀란 저는
여러 불자들과 함께 스님을 급히 방안으로 옮겼지요. 젊은 스님은 식은땀을
흘리며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한여름에 장작을 패 군불을 때고 미음을
먹이는 등 절 식구들의 극진한 보살핌 끝에 스님은 나흘만에 겨우 일어났지요.
그 스님이 바로 '법운 스님'이었습니다.
아직 온전하게 몸이 회복되지 않은 스님은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묵언정진(默言精進)'이라는 한자를 큼지막하게 써 문짝에 턱 붙인 다음부터는
아예 방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부터 스님의 하루 세 끼 공양
심부름은 제가 맡게 되었지요. 아침 6시, 밥상을 들고 스님 방문 앞으로 가
"스님, 아침 공양 시간인데예" 하고 노크를 세 번 한 다음 조용히 문을 열고는
밥상을 들여놓으며 안쪽을 힐끗 바라보았습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등판만 보였는데, 웃통을 발가벗고 벽을 향해 꼿꼿이 앉아있는 스님의 뒷모습은
마치 칼끝을 노려보며 정신집중을 하는 검객 같기도 했습니다. 점심공양 때
다시 스님 방에 들렀는데, 한낮의 찜통더위로 가마솥처럼 열기가 푹푹 찌며
숨이 막힐 듯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앉은 스님의 넓은 등에는 모기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고 있었지요. 하지만 스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텅 빈 벽과 방안에는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삼엄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듯
했지요.
스님이 마침내 묵언정진을 푼 것은 거의 한 달이 지나서였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난 스님은 먼저 마당을 쓸고 절 주위의 잡초들을 뽑았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비우고 또 비웠건만, 아직도 저렇게 쓸어버리고 뽑아버려야 할 잡념들이 더
남아있는 모양이구나 했습니다. 이날 오후에 전 절을 떠나는 스님과 할머니의
갑작스런 권유로 뜻밖에 같이 전국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지요. 주로 절들을
구경하는 편이었지만, 그보다도 바람 따라 구름 따라 걸으며 듣는 스님의 구수한
인생철학 이야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청도 운문사 계곡에서 앞서 걷던 스님이 갑자기 저에게 물었던 게
떠오릅니다.
"니, 성경과 불경을 딱 한 줄로 줄일 수 있겠나?"
"헛 참, 제가 그걸 알면 미쳤다고 스님을 졸졸 따라다니겠습니꺼?"
그때 스님이 저를 힐끗 보고 빙긋이 웃은 다음, 구름을 쳐다보며 마치 방랑시인
이라도 되듯 읊으셨지요.
"다- 지나가노니, 헛되고 헛되도다!"
고교 시절에 만나 1979년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헤어져 지금까지 뵙지 못하고
있지만, 전 스님이 생각날 때마다 깊은 산사로 훌쩍 떠납니다. 저녁 노을을 타고
아련히 울려오는 산사의 종소리에 제 인생의 절반을 완성시켜 준 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또 처마 끝의 풍경을 스치는 바람결에 내 마음에 묻은 속세의 먼지를
털너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산문을 넘어 돌아올 때마다 스님의 목소리가 다시 제 귓바퀴를 적셔놓곤
하지요.
"오늘 네가 산 하루는 어제 죽은 이가 그렇게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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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에세이에서 본 글을 왠지 모를 감동에 노트에 옮겨적었습니다.
고무림 가족들과 함께 보고 싶은 마음에 타이핑해 보았는데,
재미있게 읽으셨는지 모르겠네요. ^^;
흐르는 음악은 Jim Chappell의 Lullaby 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들중에 하나에요.
한번 조용히 감상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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