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젯밤에 나는 밥을 다 먹고 신문을 보고 있었고 전화가 걸려왔다.
삼촌은 풀죽은 목소리로 엄마를 바꿔달라고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고 조금 후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그 목소리는 글자 그대로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파고드는 듯 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 만큼 잘 들어맞는 말이 없었다. 응,응 하면서 대답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차츰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고 전화를 끊고 엄마는 아빠를 돌아보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돌아가셨다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엄마가 우는 것은 내가 지지난달에 학원 빼먹고 노래방 갔을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사실 19년동안 엄마가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바보같이 엄마가 외할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을 줄로 알았다. 바보같이. 당신이 딸 다섯에 겨우 얻은 아들 하나인 6남매중에 눈치 보이기 쉬운 가운뎃딸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집안 형편때문에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고 교대에 진학해야만했을지라도, 너무나 당연하게, 엄마는 할아버지를 사랑했을텐데.
나는 외갓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내가 보는 외갓집은 엄마의 발목을 잡는 족쇄와 같았다. 엄마는 이모들과 삼촌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고 가장 똑똑했고 성공한 딸이었다. 그런 엄마에 비해 엄마의 고향은 너무나 촌스럽고 초라해보였다. 이모들이 웃으면서 어렸을때의 일---외조부와 삼촌은 큰상에서 쌀밥을 먹고 이모들과 외조모는 보리밥을 먹던일---을 들을때는 짜증이 났고 화가 났다.
나의 외갓집은 교과서나 동화책에 나오는 그런 평화로운 시골이 아니었다. 집 앞은 아스팔트에 군데군데 흙더미가 쌓여있었고 사방은 논밭이었다. 개천이라던가 해수욕장은 차를 타고 멀리 나가야만 했다. 화장실은 당연히 불편했고 맛있는 것도 없었다. 그 집은 어린 나의 감수성을 충족시켜주기에 불충분했다. 외갓집에 얽힌 특별한 추억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외조부와 외조모가 몇해 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나는 시큰둥하게 이제 시골에 가지 않아도 되니 잘되었다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외갓집을 잃어버렸다.
나는 겉모습에 치우쳐있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우리가 갈때마다 무엇을 해주지 않았다', 라는 것에 치우쳐 정작 내가 받은 것은 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추억에 휘둘려 정작 나만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기억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사촌들과 밤새 킬킬대면서 놀던 웃방이 있었고 여름에 치고 자던 모기장이 있었다. 맛있는 시골 음식은 없었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우리가 오면 닭을 잡아주시곤 했다.
아마도, 아니 이제 결코 나는 외갓집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슬프지는 않다. 다만 내가 외갓집에 있던 그 시간,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즐기지 못했던 것이 계속 후회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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