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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지명6[섬서성]

작성자
Personacon 검우(劒友)
작성
03.01.04 19:27
조회
2,887

섬 서 성(陝西省)

감천(甘泉)

섬서성 돈화현( 化縣) 감천산에 있는 궁. 진이 세우고 한무제가 증축하여 피서지로 쓰이던 별궁.

경조(京兆)

섬서성 장안일대를 차지하는 행정구획. 한나라 무제때 설치, 경조윤(京兆尹)을 둔 이래, 수, 당, 송, 금을 통하여 원초에 이르기까지 행정구획이었으나 원초에 봉천로(奉天路)로 개명하였다. 경조는 천자 소재의 땅이라는 뜻.

경하(涇河)

섬서성 위하(渭河)의 지류. 경수(涇水)라고도 한다. 감숙성 농산( 山)에서 발원하여 위하평야를 거쳐 위하로 흐른다. 역사상 유명한 진(秦)의 정국거(鄭國渠), 한의 백거(白渠)는 경하를 이용하여 구축한 관계시설이다. 지금의 간거(幹渠)와 지거(支渠)와의 총 길이는 300킬로.

고장(高掌)

수경주(水經注)에 따르면 화산과 수양산(首陽山:중조산)은 원래 한 산이었다고 한다. 황하신이 손으로 밀고 발로 차서 두 산으로 쪼개고 물이 통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때의 손자국과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곤명지(昆明池)

장안 상림원(上林苑) 안에 있다. 그 안에는 한 대에 돌로 만든 고래인 석경(石鯨)을 만들어 놓았는데 크기는 삼장으로 천둥이 칠 때는 꼬리나 지느러미를 흔들며 으르렁거렸다고 한다.

과부산( 父山)

화산의 옛 이름. 전설에 의하면 옛날 주 무왕이 천하를 평정할 때 동원하였던 여덟 필의 준마를 유명한 어자(御者)(말몰이꾼)인 조부(造父)가 잡아 주목왕(周穆王)에게 바쳤다고 한다. 산의 북쪽으로는 수백리에 달하는 광대한 수풀이 있고 거의 복숭아 나무로 도림(桃林)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가 바로 고대의 유명한 도림새(桃林塞)라고 한다.

곽거병묘( 去病墓)

한나라 무제때의 명장인 곽거병의 묘. 무제는 그를 총애하여 그가 죽자 장안의 서북쪽에 조영중이던 자신의 능묘인 무릉(茂陵) 옆에 그가 활약한 무대였던 기련산(祁連山)의 모양을 본뜬 분묘를 만들어 주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그 분묘 옆에는 오늘날에도 흉노를 발로 짓밟고 있는 말의 석상등이 남아 있다.

관중

진나라가 도읍한 섬서의 장안일대는 동은 함곡(函谷), 서는 산(散) 남은 요(嶢) 혹은 무(武), 북은 소(蕭)의 4개관문에 둘러쌓여 있어 관중(關中) 혹은 관내(關內)라 불렀다.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記)에 "관중은 산하(山河)가 막히어 사색(四塞)하고, 땅은 비옥하여 도읍하여서 패(覇)가 될 지니라."라고 적혀 있다. 진, 한, 당의 각 왕조가 도읍했으므로 사적이 많다. 일명 진천(秦川).

구맥(九陌)

한나라 서울 장안의 성 안에 있던 동서남북에 통하는 아홉 큰 거리.

기(岐)

섬서성 기산(岐山)현 이북 일대. 주나라를 세운 문왕이 처음 국도로 정한 곳이라고 한다.

낙수(洛水)

섬서성의 중부에 있는 강. 정변(定邊)현의 백어산(白於山), 동성의 서북으로 발원하여 황하로 흘러간다.

남전(藍田)

장안 동남의 명승. 경옥(硬玉)의 산지이므로 옥산(玉山)이라고도 부른다.

농관( 關)

섬서성 농주( 州)의 서쪽에 있는 관. 지금은 대진관(大震關)이라 부른다. 농산 아래의 요애(要隘)에 설치되어 한나라때부터 서방과 통하는 요충지의 하나로 되었다.

농주( 州)

섬서성의 서부에 있는 도시. 명나라와 청나라때 농주라고 불리웠고 현재는 농현이라고 한다. 농주는 봉상(鳳翔)의 서북쪽에 있고 이 시의 서북은 농산산맥을 넘어 감숙성에 통하는 요충지대가 되어 있다. 농업과 축산이 발달하였고 말과 양은 옛부터 명산지로 알려졌다. 그 밖에 여러 가지 한약재가 산출되고, 부근에 임연성(臨衍城), 영신성(永信城), 농관등이 있어 역사상 유명한 곳이다.

대산관(大散關)

섬서성 보계(寶鷄)현 남동부에 있는 옛 관소. 일명 산관(山關)이라고도 하며 봉현(鳳縣)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이 관소는 한 대이래 군사상 요지로 유명하며 섬서, 사천 두 성 사이의 교통로에 해당하는 관계상, 특히 삼국시대에는 위, 촉 양국의 교전지로서 역사상 가장 유명하다.

동관(潼關)

섬서성 동부에 있는 현. 화산의 동북 기슭에 있으며 황하의 급굴곡점에 있다. 산서, 하남, 섬서의 3성의 교통요지이다. 위수분지로 들어가는 곳은 서북 관계 수출입 화물을 옮겨 싣는 중계지이다.

마외파(馬嵬坡)

장안의 서북쪽, 위하 북안의 지명. 당나라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피해 양귀비와 함께 이곳에 왔다가 강압에 못 이겨 양귀비가 죽은 곳. 양귀비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명봉령(鳴鳳嶺)

장안의 서쪽에 있는 산.

무릉(茂陵)

장안의 서북 40킬로에 있는 전한의 황제 무제의 묘. 근처는 황제들의 묘가 열 한 개나 있으나 그중 가장 크다. 저변의 길이는 240미터, 높이 46.5미터로, 외형은 사각형이고 꼭대기 부분은 평평하다. 무제 즉위 다음해부터 건조하여 53년이나 걸려서 완성시켰다.

보경사(寶慶寺)

섬서성 서안의 남문 내 보경사에 있는 불전과 전탑 벽면에 있었던 석제의 부조 불상. 이들 부조는 본디 당시대에 같은 장안의 광택방(光宅坊)에 있었던 광택시 안, 특히 측천무후의 조영에 걸린 누각칠보대(寶대) 등의 내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으로서 원래는 130석여(石餘)가 있었다고 한다.

보계(寶鷄)

섬서성의 서부 위수평야의 서쪽 끝에 있는 도시. 옛 이름은 진창(陳倉). 감숙, 섬서, 사천의 3성의 물자교류의 중심지이다.

보제사(菩 寺)

장안의 평강방(平康坊) 남문의 동쪽에 있는 절. 수나라때 농서공( 西公) 이경도(李敬道)와 중 혜영(惠英)의 상주로 이 절을 세웠다 한다. 마지의 아랫쪽에 있어 향적사와도 가깝다. 안록산의 난때 왕유(王維)가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봉상(鳳翔)

섬서성 위하유역에 있는 도시. 섬서성 서부의 중요 시장이며 감숙성 동부와의 사이에 성행하고, 한구와도 거래가 있다.

삼문협(三門峽)

산서의 용문산과 인접해 있는 계곡. 우는 황하를 가로막고 있던 산을 몇조각으로 나누어 지류를 만들었는데 산사이를 흐르는 물이 마치 세 개의 문을 지나는 것 같다고 하여 삼문(三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삼문에는 각기 고유명칭이 있는데 귀문(鬼門), 신문(神門), 인문(人門)이 그것이다. 화산삼문협잡기(華山三門峽雜記))에 보면 이곳의 풍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하 양안의 절벽에 서서 하곡을 내려다보노라면 멀리 상류 쪽에서 힘차게 들려오는 황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물은 동쪽으로 갈수록 수세가 급해지는데 삼문협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중간에 서 있는 두 개의 석도(石島)에 부딪혀 물길은 순식간에 세 가닥의 급류로 변하고 만다. 이들 급류는 다시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양안에 돌출해 있는 바위에 부딪혀 순식간에 한 가닥으로 모이게 되며 넓이가 1백 20미터쯤 되는 계곡을 박차고 나가는데 우뢰같은 소리가 협곡을 진동시킨다.'

이곳에는 우의 치수를 말해주는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우가 삼문협을 뚫을 때 팠던 우물이라는 칠구석정(七口石井)이 그것인데 그래서 삼문협을 칠정삼문(七井三門)이라고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귀문도(鬼門島)의 절벽 꼭대기에는 두 개의 둥근 원이 마치 한쌍의 말발굽처럼 파여 있는데 그 크기가 우물보다 크다. 이것을 마제와(馬蹄窩)라고 한다. 옛날 우가 지주(砥柱)를 뚫을 때 말이 삼문(三門)을 뛰어넘으면서 앞발로 이곳에다 발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삼문협의 상류에는 우묘(禹廟)도 있는데 옛날 삼문협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향을 피우고 자신들의 소원을 우에게 빌었다고 한다. 또 폭죽을 터뜨리면서 실컷 먹고 마신 다음 급류를 저어가는데 도중에는 화살같이 뾰족한 바위가 많아 순간적인 판단으로 생사가 갈릴만큼 위험한 곳이다. 따라서 현지에는 '나루터에는 불러도 대답없는 사공, 울다 지친 과부'라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옛날

용감했던 중국 사람들의 피눈물을 담고 있는 것이다.

서안비림(西安碑林)

서안의 문묘(文廟) 뒤쪽에 모아놓은 석비군(石碑群) 송나라의 여대충(呂大忠)이 개성석경(開成石經), 현종황제 어주효경비(御注孝經碑), 안진경(顔眞卿)등의 석비를 세운데서 비롯되었다. 명, 청대에 수차 수리를 하여 당, 송 이후 근대까지의 석비와 저명한 서가(書家)의 법첩(法帖)을 석각한 것을 500여개 모았다.

삭성(削城)

화산기(華山記)에 산 4면이 절벽으로 되어 깎아 만든 것 같다는 것으로 되어있다.

소릉(昭陵)

당태종의 능으로서 장안의 서북쪽 예천(醴泉) 근처에 있다.

소응(昭應)

섬서성 임동(臨潼) 여산(여산(驪山))의 서북쪽 기슭에 있다. 원래는 회창(會昌)이라고 하였으나 현종황제때 여산 화청궁의 조현각(朝玄閣)에 노자가 강림하였다는 말이 전해져서 이것이 길조라고 하여 이래 소응이라고 개명했다는 것이다.

소릉육준(昭陵六駿)

예천의 서북, 구준산(九峻山)에 있는 소릉의 석조(石彫). 처음에는 현무문(玄武門)에 있었으나 지금 서(西) 제 1석은 미국에, 다른 5석은 서안의 비림에 있다. 높이 1.5미터, 넓이 1.8미터의 각각 한 필의 말을 부조하였다. 유래는 태종이 전쟁에서 승용한 애마를 추억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한편 마찬(馬讚)의 제자(題字)는 구양순(歐陽詢), 은중용(殷仲容)이 쓴 것이라 한다.

신풍(新豊)

장안의 북동쪽에 있는 술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

아방궁(阿房宮)

진시황제의 궁전. 궁지는 섬서성 장안의 서북, 위수의 남쪽에 있다. 그 규모는 2층으로 아래층에는 5장의 깃발을 세울 수가 있고 위층에는 일만 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이다. 시황제는 위수의 남쪽에 상림원(上林苑)에 조궁(朝宮)을 짓고자 하여, 먼저 그 전전(前殿)인 아방궁을 지은 것이라 한다. 동서의 길이가 약 990미터, 남북의 길이가 약 152미터다. 당시 이 궁전의 노작(勞作)에 당하였던 형도(形徒)의 수는 70만명에 이르렀으며, 그 밖에도 여러 궁궐을 만들어 관중(關中)에는 3--개, 관외에는 4백여개 그리고 함양부근 2백리 안에 세운 궁전은 270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이사를 당한 인가가 8만호나 되었다고 한다. 아방궁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항우에 의하여 불태워져 버렸다.

여산(驪山)

섬서성 서안부에 있는 산. 여산(廬山), 회창산(會昌山)이라고도 하며 예로부터 온천으로 이름이 높다. 주나라때 여융(驪戎)이 와서 살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온천을 이용하려고 각도(閣道)를 만들었고 당의 태종은 온천궁을 지었고, 현종은 온천궁을 화청궁(華淸宮)으로 고치었다.

여산릉(驪山陵)

섬서성 임동현에 있는 여산 기슭에 있다. 사기에 의하면 시황제는 70만명을 동원하여 38년 걸려서 이 능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는 75미터, 봉상(봉상(封上))의 한변이 560미터의 방형(方型)묘이며 주위에는 3,000미터나 되는 흙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묘내에는 궁전이 있고, 문무백관의 자리가 설치되어 있으며, 궁중에서 엄선된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차 있고, 묘도둑이 접근하면 노시(弩矢)가 저절로 발사되도록 되어 있었다. 묘실의 천장은 천체를 본떠서 야광(夜光)의 옥(玉)을 박은 밤하늘이 보이고, 중국의 지형을 본뜬 바닥에는 수은의 강이 흐르고 있다. 묘속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인어(人魚)의 고(膏)를 쓰는 촉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이와같은 공사에 종사한 공장(工匠)들은 능묘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모조리 묘내에 갇혀 버렸다고 사마천은 적고 있다.

용지(龍池)

장안 흥경방(興慶坊)의 한 민가에 작은 못이 있었다. 이 못이 점점 커져서 아주 넓게 되어 늘 구름이 일고 용이 노는 것을 본 사람까지 있었다. 드디어 당의 현종이 이곳에 흥경궁을 짓고 용지라고 이름을 붙였다.

위교(渭橋)

장안 북방을 흐르는 위수에 놓은 다리. 서역에 통하는 요로로 횡교(橫橋), 중위교(中渭橋)라고도 부른다.

위하(渭河)

감숙, 섬서의 두 성에 걸쳐 흐르는 강. 위수(渭水), 위천(渭川)이라고도 한다. 감숙성 위현의 조서산(鳥鼠山)에서 발원하여 남동으로 흘러 섬서성에 들어와 봉상, 서안, 조읍(朝邑)을 거쳐 동쪽으로 동관을 돌아 황하에 이른다. 도중에 견수(견水), 경수(硬水)의 지류를 합친다. 옛날에 흑룡이 이 물을 마셨다 하여 음룡천(飮龍川)이라고도 한다. 주의 문왕은 위하의 북쪽에 있는 반계(盤溪)에서 사냥하다가 낚시를 하고 있던 여상(呂尙)을 만났다. 그는 여상을 군사로 임명하여 주의 국권을 맡겼다. 이때 여상의 나이는 팔십 세였다.

유림(楡林)

섬서성의 북부에 있는 도시. 본래 한나라의 구자(龜滋)현 및 수나라 초기의 정덕진(靜德鎭)이었고 명나라때에 유림채(儒林寀)를 두었는데, 그것을 다시 유림위(楡林衛)로 고치고 청나라때 부와 현을 두었다. 산물은 보잘것이 없고 토량도 각박하고 기후까지 한랭하고 우량도 적다. 주로 모피의 집산만이 성하다.

-출처:북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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