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망량
작품명 : 천년검로
출판사 :
예전에 문피아에서 폭풍같이 추천과 감탄을 불러온 작품이 있었다. 어느 때고 문피아에 풍랑이 잠잠한 적은 없었다지만, 이 작품은 상당히 특별했었다고 기억한다.
탈혼경인. 비뢰도라는 뿌리 위에 작가 구로수번의 독창적인 줄기가 자라고, 무수한 패러디의 잎이 피었던 작품이었다.
그렇다. 이 작품은 패러디였다. 지금껏 문피아를 흔들었던 걸출한 수작, 명작, 대작들의 주인공들이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던 것과는 달리 탈혼경인은 다양한 '검증된' 주인공들이 조연으로 등장하고 또 중첩되어 주인공 유천영을 빛나게 해준 패러디 소설이었다.
패러디. <문학>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 또는 그런 작품.(네이버 국어사전 인용)
탈혼경인을 비평하기 전에, 먼저 이 패러디를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패러디는 다른 작가의 소설의 세계관, 인물 등을 빌려서 자신의 작품으로 바꾼 소설이다.
패러디의 유형을 조금 소개하자면 먼저 글쓴이가 자신만의 세계관 안에서 다른 작가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진행시키는 패러디(ex: 드래곤 라자의 후치가 현대로 오는 패러디) , 반대로 글쓴이가 다른 작가의 세계관 속에서 자신이 창작한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패러디(ex: 슬레이어즈의 세계관에 한국인 남자가 등장하는 패러디), 혹은 아예 다른 세계관의 소설들을 서로 크로스오버 시키는 패러디(ex: 페이트 X 제로의 사역마 등 X표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패러디) 등이 있겠다.
그러나 탈혼경인은 독특하게도 수많은 작가들의 세계관을 서로 중첩시키고 그 안에 글쓴이의 오리지날 캐릭터를 등장시킨 케이스다. 가장 기본적인 틀은 비뢰도지만, 그 세계관 안에는 사이케델리아나 군림천하 등 수많은 소설들의 세계관을 품고 있으며 심지어 소설이 아닌 환세취호전이나 동방프로젝트같은 게임의 주인공들까지 등장시켰으니 가히 패러디의 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무수한 패러디들은 탈혼경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문피아를 떨쳐 울린 다른 쟁쟁한 소설들 가운데서도 탈혼경인을 돋보이게 만든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봄직 한 것 아닌가? 손오공이 셀까, 슈퍼맨이 셀까? 나루토가 닌자 기술을 쓰면 과연 루피는 어떻게 막아낼까? 이걸 무협식으로 바꾼 것이 탈혼경인이라고 생각한다. 인기있는 무수한 소설들의 주인공들이 대적으로 등장하여 구로수번 작가의 오리지날 주인공인 유천영과 대적하는 모습은 상당한 쾌감과 즐거움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패러디는 출판되지 않았을 때 빛나는 소설이었다. 구로수번이 망량이 되고, 탈혼경인이 천년검로가 되었을 때 이 소설은 가장 큰 무기이자 장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모든 패러디가 뿌리뽑히고 만 것이다.
탈혼경인의 독자들은 탈혼경인의 오리지날 스토리 뿐 아니라 탈혼경인이 품고 있는 수많은 작품들의 스토리를 같이 즐기고 있었다. 사이케델리아의 권강한은 초끈이론을 이용하여 마침네 영계까지 무너뜨린 초월자인 동시에 유천영을 가로막는 비운의 영웅이었고, 비뢰도의 비류연은 유천영의 최종 목표로서 노력을 재능으로 짖밟아버리는 최종 보스였으며 군림천하의 진산월은 비록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지만 유천영에게 자신의 신공을 남긴 신비한 종남파의 장문인이었다. 이들 뿐 아니라 탈혼경인에 나온 수많은 패러디의 등장인물들은 단순히 구로수번 작가의 조연 A,B,C가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자신들의 세계를 질주하던 주인공들이었던 것이다.
오리지날 주인공인 유천영이 가진 스토리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더 깊은 스토리를 갖고있는 조연들이 있었기에 탈혼경인은 그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이 매력적인 수많은 주인공들이자 조연들이 뿌리채 뽑혔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앙상한 줄기다. 구로수번 작가의 능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 많은 주인공급 조연들을 다룰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글솜씨를 가졌다는 것은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구로수번 작가의 오리지널 작품인 천년검로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탈혼경인을 뛰어넘지 못했다. 스토리는 비슷하게 흘러갈지언정 등장인물들의 면면이 다르기 때문이다.
애초에 탈혼경인을 보지 않고 바로 천년검로를 읽었다면 또 다른 감상이 나올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탈혼경인을 아주 재밌게 읽었고 이후 천년검로를 읽으면서 실망을 금치 못했다.
등장인물의 급이 달랐다. 내가 탈혼경인에서 유천영이 사이케델리아의 매력적인 주인공 권강한을 쓰러트렸을 때 느꼈던 희열과 천년검로에서 유천영이 만독지체 당산을 쓰러트렸을 떄 느낀 감상은 전혀 달랐다.
탈혼경인의 유천영이 비뢰도의 지글지글한 주인공 비류연을 쓰러트리기 위해 미친듯이 천년검로를 밟아가는 것을 보는 것과 천년검로의 유천영이 절룡신군에게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천년검로를 밟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물론 탈혼경인의 비류연은 절룡신군이 아니라 천년검로의 김하나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둘 다 백년 노력을 재능으로 짓밟아버리는 스타일이니까. 절룡신군은 아마 유천영이 적어도 구두룡급 무력을 지니게 하기 위해 노력하게 만드는 소설적 장치인 칠년살 때문에 등장한 인물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김하나는 비류연이 될 수 없었고, 당산은 권강한이 될 수 없었다.
까놓고 말해, 구로수번의 탈혼경인이 지녔던 인기는 '빌린' 인기였다. 수많은 검증된 명작들이 지녔던 인기를 빌렸기에 그토록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이뤄낸 구로수번 작가의 필력 자체는 괜찮은 것이다.
하지만 탈혼경인이 패러디의 가지들을 걷어내고 천년검로가 되었을 때 드러난 앙상한 줄기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천년검로에 등장하는 조연들은 말 그대로 조연 A,B,C에 불과했다.
여화였던가? 유천영의 초반 라이벌 격으로 등장하는 일장로의 제자. 매력이 없다. 어느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란 말인가? 항상 얼굴이 얼음같다는 부분? 주인공이 강한 무력을 지녔다는 것에 호승심과 호기심을 느끼는 부분? 영웅연에서 아깝게 지는 부분?
절룡신군? 7년살? 솔직히 7년뒤에 죽인다 어쩐다 했을 때 유천영과 동화되어 함께 긴장감을 느끼신 분 있는가? 정말 죽어도 노력해도 못이기겠다 싶은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인물도 아니고, 뭔가 슬프고 아득한 스토리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동생 버렸다고 친구 가족까지 모조리 몰살시키려 하고, 또 어린 주인공이 도발하니 7년뒤에 죽이러 오겠다고(줄꺼면 10년은 줘라!) 슥 물러가고... 어정쩡하다는 감상만 받았다.
탈혼경인을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유천영이 어떤 검의 경지에 도달한 뒤, 비뢰도의 장홍 앞에서 하늘을 가르고 구름을 찢는 부분이었다. 사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상당한 쾌감을 준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유천영이 비뢰도의 장홍이 아니라 천년검로의 조연A의 앞에서 하늘을 가를때도 그런 쾌감이 느껴질 것인가?
유천영이 천년검로를 완성시켜 비류연의 뢰신 앞에서 탈혼경인을 쏘아 내는 장면과 마찬가지로 천년검로를 완성시켜 김하나에게 탈혼경인을 쏘아 내는 장면, 어디가 더 쾌감과 전율을 줄 것인가?
사실 어찌보면 구로수번 작가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다. 패러디를 출간할 순 없는 노릇이고, 자신만의 오리지널 스토리를 출간했을 뿐인데 나란 까칠한 독자가 예전 패러디물을 들먹이며 이거 재미없다 운운하면 화가 날 법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탈혼경인을 정말 즐겁게 읽었고, 천년검로도 그만큼 기대를 갖고 읽다가 실망했는걸.
내가 보기에 천년검로가 탈혼경인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천년검로의 조, 주연들 하나하나가 탈혼경인의 조, 주연(이라 쓰고 주인공이라 읽는다)들을 능가하는 매력을 가지는 수 밖에.
1,2,3권에서 이미 충분히 실망했다. 남은 권수에서 탈혼경인 자체를 잊어버릴 정도로 재미있는 스토리와 등장인물들의 매력이 흘러넘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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