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니름]
'은결'은 서울에 가까운 가상의 도시의 고교생으로 전교0.3%의 연년생 미녀 동생 '미래'를 가진 전교 30% 왕따 샌님이다. 그는 비록 고등학교 2학년이지만 급우들처럼 시험성적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대학생들도 쉽게 읽기 어려운 철학과 사상서를 쉴새없이 읽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 일반인과 다른 차원의 세계를 살면서 밤마다 인간의 절망과 좌절, 슬픔과 고통이 낳은 사념체와 온갖 악마적인 존재를 처단하며 인간 세계의 평화를 지켜내는 고등술자(高等術者)이기 때문이다.
또한 술자 세계에서 최초로 '현자의 돌'에 근접한 기호체계를 고안한 전설적인 지혜와 동시대 최강의 술력으로 유명한 아버지 '수행'을 경애하는 후계자로, 부친이 고안한 천재적인 기호체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남다른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고도의 지성이 요구되는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어느날 만개산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수행을 하던 은결은, 결계 너머의 술자들을 볼 수 있고 최면을 걸기도 어려울뿐더러, 접신하기에 가장 좋은 무녀 체질을 타고난 운명의 여인 '세연'을 만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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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서 이드레브>, <클라우스 학원이야기>의 저자 카이첼님의 신작 <희망을 위한 찬가>는 시대적으로는 현대, 장소로는 서울권 도천시라는 가상의 도시 상천고등학교라는 가상의 학교를 주배경으로 하는 판타지소설이다.
그런데, <희망을 위한 찬가>라니, 장르소설 답지 않게 평범하다 못해 진부(?)하기까지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타이틀의 엉뚱함을 넘어 내용의 심상치 않음으로 <낯설게하기>에 더욱 성공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작가의 전작을 제대로 읽지 않은 나로서는 소설가로서 작가의 발전을 짐작할 수 없지만, 이 책은 일반적인 대학을 졸업하고 시시한 잡서를 읽으면서 쌓은 보통의 지성으로는 내용의 흐름조차 따라기기 쉽지 않은 읽기와 사유가 깃든 만만치 않은 작품이었다.
일단 작가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인용하면서 이 글의 첫머리를 시작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서 최근작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을 인용하는 등 작품 곳곳에서 범상치 않은 인문학적 지식과 교양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작가가 어떤 책을 읽는다는 것과 그 책의 내용을 자기 지성으로 이해해서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의 독립적인 서사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작가라는 것은 자기가 씹어서 이해한 것만큼 그대로 배출해서 문학작품이라는 우아한 거미줄을 직조해내고, 그 작품을 통해 독자들을 사로잡는 거미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희망을 위한 찬가>에 인용된 저명한 철학가들과 그들의 사상은 단순히 이 작품을 장식해 주는 귀걸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작가를 통해 이 작품의 주제와 구성을 가로지르는 날줄과 씨줄이 되어 이 소설을 단숨에 한국사회에서 무시되는 하위문화가 늘어놓은 황당한 상상의 밥상이 아니라, 찬탄할만한 지성의 향연으로 바꾸어 놓았다면 과도한 상찬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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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2]
주인공 은결은 우연히 알게된 세연이 봉인에서 탈출한 일본계 잡신 '아오이키바(푸른 이빨)'에 빙의되는 것을 막기 위해 힘쓰다가, 목숨을 도외시하지 않는 최후의 한 수로 뜻하지 않게 푸른 이빨의 신력을 받아들이게 되고, 푸른 이빨이 세연에게 강림하는 것을 일단 막게 된다.
거듭난 만남과 조력을 받은 세연은 자연스럽게 은결에게 호감을 표하지만, 은결은 어렸을때 부터 아버지 수행으로부터 받은 훈련과 수많은 독서를 통해 '타자(他者)'를 요구하는 자아를 배제하는 것이 체화되어 있다.
그리고, 은결은 술자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고 피차 소통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한 세연의 애정이 부담스러워 거리를 두어야 하는, 타자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슬픈 청춘이기에 그들의 관계는 도무지 가까워질 수 없는 평행선을 그을 수 밖에 없다.
방대한 독서와 경험을 통해 천착하게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관적일 수 밖에 없는 은결의 앞날에 과연 <희망을 위한 찬가>는 불리어 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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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우리는 킬링타임용으로 무협이나 판타지를 읽곤 하지만, 그 봄의 행위를 통해서 때로 생의 의미를 탐색하는 이들도 있다. <희망을 위한 찬가>는 그런 사람들이 한 번쯤 읽어볼만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 장르소설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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