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까지의 양식과 같이 편의상 평어로 감상이 이뤄져 있음에 먼저 양해를 부탁드리며, 감상이 좀 길지만, 아마 공을 제법 들인만큼 읽을만 하시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보며, 이만 서두는 줄이겠습니다.
원문 - http://kayphorun.egloos.com/1630284
---------------------------------------
잃어버린 이름
박인주(카이첼) 저
2010년 발간 예정(개인지)
2010.01.27 p.m 10:28 에 완성
-약자에게 주어진 권리는 오직 고통 받을 권리일 뿐이지.
0. 잃어버린 이름-
0-0 '잃어버린 이름'에 대해 단 한마디로, 직관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 이 소설은 무척이나 괴이한 소설이다. 작가가 제 나름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 글을 써보겠다고, 속으론 어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러리 마음먹은 척하고서 흔히 말하는 시장의 '코드'라는 코드를 온갖 집대성한 결과물에 가깝달까.
0-1 주인공의 '이계진입'에서 '보이 밋 걸'로, 거기서 '거대 로봇 소환'이라는 구도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서장부터, 일본풍의 RPG게임을 연상시키는, 흡사 순차적으로 퀘스트를 깨 나가는듯한 스토리 진행, 뭔가 연결이 될 것만 같은 습득 아이템들하며, 하나하나 늘어나는 동료들까지. 거기다가 파티 구성을 살펴보면 더 가관이다. 일행에 둘 있는 여성은 제각기 천하에 비길데 없는 강자이며, 거기다가 초절정의 미소녀에, 어느 정도 전형성을 갖춘 훈훈한 옆집 아저씨형 케릭터는 알고 보니 왕국제일검이라는 설정이니 얼핏 보면 작가가 흔히 말하는 '양판소* 이고깽**' 한번 제대로 써보려나 싶다.
0-2 ...위에서 적은 것들, 다 뻥이다.
조금만 읽어보면 알 수 있듯 양판소에 이고깽은 그저 글의 표면에 불과하다. 이미 본문에서 수많은 인문 사회서적들을 직접 인용, 언급하던 전작 '희망을 위한 찬가'와 비교하긴 조금 어렵지만, 그 특유의 학문적으로 치장된 문장이며, 꽉 짜여진 플롯이며, 제기하는 주제의식까지 다른데 갈 리가 없다. 이럴꺼면 왜 저런 껍데기를 택했나 싶을 정도로 겉 다르고 속 다른 물건이다.
그 래서 전작들과 같이 일반적인 장르 소설들에 비해선 진입장벽이 비교적 높은 편이지만, 이 진입장벽만 넘어설 수 있다면 여러가지 의미로 그 괴이함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여태 그래왔듯 글 자체의 빼어남과 더불어, 이전과는 달리 대중적인 코드들 역시 분명히 쓰이고 있기 때문에 취향만 부합하면 훨씬 부드럽게, 또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 글에 대한 가벼운 소개는 이쯤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양판소 - 양산형 판타지 소설의 준말.
**이고깽 - 이계진입 고등학생 깽판물의 줄임말, 유의어로 양판소 판무, 공장소설 등이 있다.
1. 약자에게 주어진 권리는...
<“상황에 대한 아무런 장악력도 없는 약자가 정의와 논리를 말하는 것처럼 바보 같아 보이는 꼴은 찾기 힘드니까. 약자에게 주어진 권리는 오직 고통 받을 권리일 뿐이지.”>
-'블랙둠' 에위나와 '이름이 없는' 위버의 대화 中
1-1 흡사 '네가 전교 1등이 아니면 그냥 성적이 행복의 전부 인 냥 알고 있어.'라고 들리는 대사이자 히로인이 주인공과 대면하는 첫 순간부터 언급한 주옥같은 대사. 글은 시작과 동시에 글의 주제를 관통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강한 것이란 무엇인가. 강자란 무엇인가. 약자란 무엇인가.
<“이걸 막을 수 있을까?”
[너 따위가... 내가 벽을 넘어서기 위해 지나치게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패자의 변명은 언제나 지루하지.”>
-'블랙둠' 에위나와 '영원을 걷는 자' 베부의 대화 中
1-2 그리고 이러한 문제 제기는 등장 인물 간의 모든 역학 구도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나며, 그 강함에 대한 대답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표상된다. 두 히로인이 상징하는 바, 즉 에위나적 강함과 그레이스적 강함이 그것들이다. 이는 소설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갈등부를 차지하는 애정 라인에서 직접적으로 마찰을 빚게 되는데, 전작 희망을 위한 찬가와는 달리 주인공의 제 3자적인 위치 - 조금 부정적으로 바라면, 전작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기에 가능해진 설정이며, 이 두 히로인이 위버를 두고 벌이는 갈등 양상은 스스로의 강함에 대한 증명이 되기에 단순한 애정라인이 크로스 오버된다는 독자에 대한 감정 이입적 희열을 넘어, 글의 주제에도 뿌리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될 바, 그 과정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하나의 '대결'이기도 하다.
1-3 결국, 글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간단하게 어떠한 것인가 요약해보자면 - 두 히로인이 갖추고, 휘두르는 강함을 보고, 고민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가는 주인공, 위버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정도로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여태껏 언급했듯, 당연하게도 함께 여행하는 두 히로인의 강함에 대해 한번쯤 살펴보아야 위버가 최후에 내릴 대답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이기에, 지금부터 두 히로인이 각각 지닌 강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 -나는 에위나이며 블랙둠이지.
2-1 그렇다면 히로인, 에위나가 지니는 강함의 방식은 어떠한가. 그야말로 '최강(最强)'의 강함이랄까.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또 바로 쓰인 비유일지 모르겠다만, 에위나의 강함은 플라톤의 계보를 따르는 강함이다.
<"나는...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에위나는 우뚝 동작을 멈춘다. 위버를 본다. 그녀의 창백하던 얼굴에 착각 같은 화색이 돌았다고 위버는 느낀다. 에위나는 망설이는 것 처럼 동작 사이에 결락을 보인 다음, 핏기가 부족한 입술을 열었다.
"-나는 에위나이며 블랙둠이지.">
-'블랙둠' 에위나와 '이름이 없는' 위버의 대화 中
2-2 그녀의 강함은 '나'의 절대적(idea)인 것을 향한 도전이며, 투쟁의 연속이다. 그녀에게 절대적인 강함이란 '실버'라는 타자로 드러나는데, 기실 이는 위버에 의해 반론되고 -물론 아마도 실버는 그것에 버금간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할지라도-, 그녀가 추구하고 있는 것과, 추구해야 하는 것에 대한 혼동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하지만 이는 그녀의 집착이 낳은, 논리가 아닌 감성에 따른 오류이므로 중요치 않고, 결국 이치 상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므로, 그러니까 본문 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것을 향한 검'에 대한 추구가 되므로, 그녀는 그녀 앞에 존재하는 수많은 대자(對者)들에게 스스로를 증명하는 강함을 보인다.
<'모든 도전과 모욕에 대해 물러섬 없이 응대한다.'>
-'이름이 없는' 위버의 '블랙둠' 에위나에 대한 감평 中
2-3 위의 대사와 평가는 단문이지만 그녀의 강함과 존재의 방식에 대한 매우 명쾌하고도 직관적인 설명을 가능케 해준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고, 굴종치 않으며 스스로를 증명하는, 고로 진리를 찾아가는 플라톤부터 칸트에서 -칸트에서 종말이라 볼 수도 있지만- 완성되는 계보의 후계자라고 말해도, 지나친 비약이진 않으리라.
2-4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도 이와 명쾌히 부합한다. 일본식 표현으로 흔히 '츤데레'라 불리고 우리말로 표현하면 '새침데기'에 가까운 그녀의 성격은 그녀의 추구점, 유일성에 대한 이상과 딱 맞아 떨어진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의미로 자신과 동등한, 게 중에서도 특히 멘탈리티를 이루는 기반이 '강자'의 위치에 설 수 있는 자가 아니면 그를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강자란 또다른 일원성의 반증이 되기에 그것 이외에의 배격성은 속칭 츤데레의 그것과 꼭 맞다는 반증이 된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가르친' 위버가 자신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지혜를 지녔다는 점을 쉬이 수긍하기 힘들게 하고 그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1부의 마지막 즈음에 가서야 그녀는 위버를 한명의 '강자'로 인정하고 그를 대자적인 존재로서 사랑함을 인정한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거짓 없는 솔직함과 상대에 대해 대자로서의 인정하는 과정을 거쳤기에, 곧 자신과 상대에 대한 온전한 검증을 거친 뒤의 사랑이기에 - 어떤 사랑보다도 곧고, 또 명증된 사랑이 아닐까 라고 생각케 한다.
3. 저는 그레이스라고 하지요. 세계의 수호자랍니다.
3-1 이에 반해 그레이스가 보이는 강함은 조금 다르다. 에위나의 강함이 '최강'이라면 그레이스의 강함은 '무적(無敵)'이다. 그것은 타자를 전혀 상정하지 않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만 충만한 강함이다. 칸트가 신에 대한 침묵에 대해 논리적인 마침표를 찍은 후, 침묵을 넘어 신을 죽여 버린 - 니체의 계보를 따르는 강함이다.
<“크. 아깝군. 네가 악마였다면 대공의 좌를 노려볼 만 했을 텐데.”
“후훗, 관심 없어요. 나는 이미 이 세계의 주권자인걸요.”>
-'라이트닝 클로' 그레이스와 '코돈 파루스'의 대화 中
3-2 위의 선언에서 초점을 맞춰야할 부분은 당연히 '관심 없어요.' 이다. 그녀에게 있어 타자의 시선은 이미 무용하다. 실천이 바탕 되는 정신승리랄까. 이는 형과 식을 바탕삼고 구조-즉 일종의 진리(idea)적 표상-를 중시했던 모더니즘을 넘어, 창의성과 다원성을 바탕으로 하고 진정한 일원적 이상을 거부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흐름과도 그 궤를 함께 한다 볼 수 있는데, 이미 수많은 강함을 부정하지 않되, 그 수많은 강함들 중에서도 자신의 강함을 스스로 자신할 수 있기에 그녀는 온전히 그녀 스스로 이미 강하다.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승이 말한 특징에 합치되는군! 너는 삼좌의 하나인 전격의 손톱, 뇌조(雷爪)의 마수일 가능성이 높다!
“헤에? 뇌조의 마수인가요.”
…하지만 약간은 유감이기도 하다.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라 기껏해야 셋 중의 하나라니. 가능하다면-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것을 ‘일좌’로 줄여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라이트닝 클로' 그레이스와 '코돈 파루스'의 대화 中
3-3 이런 그녀의 강함은 고스란히 그녀의 성격에도 반영된다. 비밀주의, 신비주의를 무기 삼는 일종의 흑막형 케릭터에, 안하무인의 절대강자. 그래서 심심할 때 마다 하는 말이 세계가 제 장난감이니, 그래서 온전한 강자이며 주권자인 자신이 자신의 권리에 월권하려는 것들로부터 세계를 수호해야 한다느니 하는, 일종의 도덕적 감성이 거세된 - 사이코패스적인 멘탈리티가 그것들이다. 이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법에서도 또한 가감 없이 드러난다.
<“어째서 위버 그 녀석에게 그냥 대 놓고 이야기 하지 않는 건가?”
…
“왜냐하면 숙녀의 의무는 사랑받는 것이지, 사랑하는 게 아니니까요.”>
-'라이트닝 클로' 그레이스와 '왕국제일검' 투리에의 대화 中
3-4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감성의 교류가 아닌, '소유'라는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대자의 감성에 대한 온전한 구속이야말로 그녀가 말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아야 한다 생각한다. 어린아이의 소유욕과 비슷 하달까. 또한 이를 표하는 방식 역시 무척이나 그녀답다. 그렇기에 갖은 기만과 술수로 무장된 그녀의 공략법은 직선적인 에위나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파급력을 미치며, 그것은 필자의 시선으로 볼 때, 그것은 사랑이라고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비뚫어진 - 몽뚱이만 커져버린 어린아이의 철없는 소유욕에 가깝다.
해서, 여담인데 - 별로 마음에 안든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4-1 위의 두 인물들을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 에위나의 그것은 일원적인 강함의 추구라 볼 수 있을 테고, 그레이스의 그것은 그런 일원적 틀마저 배격하고 온전히 자존하는 주체적 강함의 추구라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강함을 보고, 듣고, 배우며 성장하는 위버의 선택은 - 여지껏 써 왔는데 약간은 허탈하게도 1부 완결에선 나오지 않았다. 아마 2부, 3부에서 계속 성장하여 기어코 완성된 위버를 보아야 그 답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4-2 하지만, 여지껏 카이첼 특유의 작풍을 통해 앞으로 위버가 나아갈 방향을 유추해 볼 수 있진 않을까. 그가 보여줬던 모든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이 여러가지 성장을 통해서 지향하는 바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고, 이번 작품의 위버 역시 그러한 해답을 찾아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4-3 갑자기 화두를 벗어나는 듯 하지만, 조금의 여담으로 이야기를 이어갈까 싶다.
비교적 초기작인 클라우스 학원을 제외하고 희망을 위한 찬가, 서브라임, 잃어버린 이름으로 이어지는 카이첼의 세계관은 여타의 소설들과 무척이나 확연한 특이점을 몇가지 지니고 있는데, 게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점을 꼽자면 - 필자는 '지'와 '각'이 고스란히 물리적인 방식으로 구현된다는 점을 첫 손으로 꼽고 싶다. 사실 우리가 발을 딛고 숨을 쉬며 살아가는 현실에선 여태 말했던 방식의 - '강자'의 강함이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구현된 세계가 카이첼의 세계관이기에 그것이 지니는 선, 악의 방향은 차치해 두고, 그들이 말하는 방식의 '강함'은 충분히 일종의 수치화를 거쳐 재단될 수 있다.
4-4 하지만 이러한 재단화를 통해 '강함'은 역설적으로 그것의 범주에 한계 지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이전에 언급한 두 강함이 각기의 방식이라는 틀 안에서 재단됨으로 지니게 되는 궁극적인 한계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위버의 결정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하면 - 방금 말한 지와 각이 물리로 구현되는 세계의 한계도 본질적으론 그 물리력이 결국 수치화라는 방식을 통해 선을 담지하지 못하므로 인간 심연의, 기저의 도덕을 이루는 영역의 지지대는 부실하기 짝이 없음을 뜻하는 것과 다름없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의 전작들의 구조에서도 무척이나 쉽게 찾을 수 있기에, 전작의 주인공들이 지니는 해답들을 통해 위버의 해답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학원에서의 '데일'이, 희망을 위한 찬가에서의 '은결'이 내렸던 결론은 -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닿을 수 없는 것이지만 결국 그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 이는 칸트로의 귀결이다. 정언명법으로의 귀결이다. 우리의 발밑에 어떠한 지지대라 없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귀결이다.
4-5 아직은 객관적인 지표상 확실히 알 순 없지만, 본인은 위버가 내릴 최후의 대답도 대승적인 범주에서 살폈을 때 이와 다르지 않으리 강력히 추측한다. 그레이스와 에위나, 둘이 표상하는 강함의 방식들을 제각기의 방식으로 옳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지니는 방식은 절대적인 강함(동시에 선善)을 담지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것들은 해답인 동시에 오답이며, 그들의 대결이 지니는 결과가 어떠한 방향을 띄든간에 아마도 위버가 내릴 답은 -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강해야 한다는 -그냥 선해야 한다는- 지극히 칸트적인 결론일 것이 되리라, 나는 생각한다.
5. 텍스트의 한계와 역설
5-1 글의 주요 뼈대를 이루는 이야기는 위의 글들로 어느 정도 정리 되었으리 생각한다. 그럼, 마무리 이전에 약간은 다른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싶다. 장르 문학의 특징 한 가지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해 볼까 하는데, 장르소설을 일반 소설이나 순문학과 구분지을 수 있는 특징은 수없이 많고, 그 중에서도 지금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은, 일상 - 일탈(일반적으론 발단 - 전개 - 절정 - 결말이라 한다.)이라는 갈등에 우선하여 글들의 특징이 기본적으로 주연과 조연의 특이성에 바탕한다 라는 점이다. 장르 문학에 있어 언제나, 언제나 주인공과 그의 동료들은 특별하다. 이유는 - 주인공이니까.
5-2 그럼 다시 카이첼의 잃어버린 이름으로 돌아오자. 카이첼의 글은 무척이나 뚜렷한 주제 의식을 지니고, 주인공과 그의 동료들이 무수한 여러가지 방식의 갈등을 헤쳐나가며 스스로 지닌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기어코 작가가 말하고자한, 주제를 뚜렷하게 각인시킨다는 점에 있어서 일반 문학적인 성향이 제법 짙다 할 수 있으나, 카이첼의 글은 방금 내가 언급한 장르 문학의 특이성이라는 점은 벗어나지 않는다.
5-3 해서 이 글은 좀 더 포괄적으로 살펴 일반 소설이라는 범주에서 바라볼 때엔 커다란 한계를 지닌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사회 보편, 조금 더 깊게 들어가 인간 개개인에 있어 필요한 멘탈리티를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소설을 이어나가는 주, 조연들을 보면 약간은 고개를 젓게 된다. 주, 조연인 위버, 에위나, 그레이스 셋 모두 기본적으로 엄청난 태생의 특이성, 그것도 비할 데 없는 특별함의 영역에서 유일성으로 확장해 나아간 케이스들이기에, 사실상 그들이 이룬 업적의 탁월함 -혹은 물리력으로 구현되는 대단함- 은 사실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원래 잘난 놈들이 잘난 척 해대는거야 당연하게도 당연한 것이니까.
5-4 그렇기에 그들이 고민을 헤쳐 나가는 방식은 어찌 보면 우리와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수많은 이들이 절을 다니고, 또 수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니며 각 교파의 교의를 일생동안 배우지만 부처, 예수 정도의 성인은 거진 그들로서 유일하니까. 그래서 살펴보고 싶은 인물은 -마스터 투리에와 마스터 세피스, 이들이다. 물론 이들 역시 태생적으로 잘 타고난 종자일 수 있지 않느냐 할 수 있겠으나, 그 범주가 위의 셋들과는 다르게 일반성이라는 범주 내의 특이성이라 생각되니까. 그래서 난 그들이 좋다. 위의 셋들처럼 0이냐, 1이냐를 추구할 만큼 '대단'하진 않지만, 0과 1 사이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그들이 좋다.
5-5 ...하지만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를 살펴본다면, 사실 초점을 위버를 위시한 셋에 맞춘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필요하기까지한 초점 집중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장르 문학을 읽는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니까. 주인공에 대한 감정 이입을 통해 답답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하고, 또 통쾌하게 그것을 타파하기도 하는 것이 그것이니까. 또한 초점을 장르 문학에 맞추지 않고 살펴보더라도 저 이야기는 한층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이렇게 암담한 현실은 저러한 특이성을 지닌, 일련의 '초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타파할 수 없다는, 약간은 좌절적인 역설이라는 해석 또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5 챕터의 비평은 개인적인 투정이라 보아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고, 또 내 포인트도 투리에와 세피스, 그들의 성취를 한번 반추해 보는 것에도 적잖은 무게를 실었기 때문에 이정도로 기록함에,
만족한다.
6. 정리하며
6-1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랫만에 적는 감상문은 아닌데 왜 매번 쓸 때마다 오랜만이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는지 모르겠다. 내 스타일대로, 아니 가장 내 스타일스레 적었던 -마도 감상- '하지은'의 '모래선혈' 감상을 적었던게 채 2달도 지나지 않았고, 가깝게 그냥 마음가는데로 적었던 '로저 젤라즈니'의 '그림자 잭' 감상 같은 경우는 쓴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지. 아마 이런 기록에 기억들이 단절될 정도로 '쓸데없이' 바쁘게 살고 있는건가 싶기도 하다.
6-2 카이첼의 글은 항상 1권 중반까지 뭔가 항상 어떤 특이점이 있어도 있다. 클라우스 같은 경우는 작가가 군대 가기 전과 후로 나눠졌던 기점이니만큼 1권 중반 이전까진 설익은 문장들이라는 것에 아마 동조하지 않는 이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고, 희망찬 같은 경우엔 1권 중반을 기점으로 문장이 미묘하게 매끈해진다. 사실 희망찬 1권 중반까지 읽으며 글에 몰입이 되지 않아 문장은 아직 미숙한 작가인가, 라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그리고 이번 잃어버린 이름은 1권 중반까지 실험적인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연재분으로 읽으니 잘 느껴지지 않긴 하던데, 역시나 뭔가 수작을 부려놓긴 했다. 아마 이것도 책으로 읽으면 확연히 드러나겠지. 하지만 이번엔 '이상하게' 다른 건 아니니까, 전후로 하여 모두 제 나름 매끈함을 자랑하는 문장들이니 이전들과는 약간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다.
6-3 더불어, 이번이 세번째 개인지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출판사를 통한 출판은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다고 하던데, 여태 클라우스와 희망찬 모두 책이 무척이나 예쁘게 제 나름의 퀄리티를 자랑해 만족하고 있다. 아, 그런데 제발 오탈자 크리 좀... 특히 클라우스 오탈자는 애교로 봐 줄 정도를 넘어섰음! 뭐, 두 번이나 실패했으니 이번은 좀 낫겠지!
6-4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신 분들 중 주머니 사정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아마도 책을 거진 구매하리라 생각하고, 더불어 이 책을 읽지 않은 분들이라 하더라도 이 책의 텍스트들은 객관적으로 충분히 재밌고, 괜찮은 글이라 할 수 있으니 장르 문학이라는 분야를 그 자체로 즐기려는 이, 또 장르 문학에서 일반 문학의 향기를 느끼고자 하는 이, 보이 밋 걸 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며, 객관이 아닌 주관적인 관점에서도 글이 마음에 든다면 한질 신청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며 슬슬 감상을 마무리할까 싶다.
----------------------------
원문 - http://kayphorun.egloos.com/1630284
혹여 재밌게 읽으셨다면, 작가의 다른 글, 그리고 조금 더 빼어난! 글이었던 '희망을 위한 찬가' 감상으로 이어보심은 어떨까 합니다.
희망을 위한 찬가 - http://kayphorun.egloos.com/799238
Comment '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