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뜻 생각할 수가 없었다. 칼이 노래를 한다니, 그러나 이 책에서 내가 놀란 점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임진왜란에 대한 막연하고 환상적인 기억의 붕괴 그리고 1인칭의 단 시점만이 토해낼 수 있는 문장의 예술성에 대해서 놀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사전 일러두기를 통해서 문장을 열람하며 독자들이 맞이하게 될 과거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초상화와 글 내에서 그려지고 있는 이순신 이라는 인물과의 이율배반적인 시선간의 충돌을 단명한 문장으로 경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글의 전개는 특정한 소재(여진, 장군도)와 깊게 맞물려 돌아가며 이순신의 내면적인 갈등과 그가 왜 전장에 나아가고 또 전장에서 적의 적으로 죽어갔는가? 에 대한 당위성을 깊고 격조 높은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글 내부에서 그려진 일부 이야기는 작가가 그 당위성을 위해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바탕으로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바로, 칼의 노래는 어떠한 역사적 유물을 탐구하고 재해석하려는 역사서가 아니라 작가제위의 소설이라는 점이다. 이 점을 혼동하고 단순히 김훈 이라는 작가 속에서 그려져 지면에 옮겨진 이순신이 절대적으로 그의 모든 역사적인 생애를 뒷받침 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중략)..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는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후략)..
김훈은 책머리에서 칼의 노래 1, 2편에 관한 짧은 소개를 위와 같은 문장으로 매듭짓고 있다. 여기에서 눈 여겨 볼 대목은 바로 소설 속 주인공 순신에 대한 칼의 개입이라는 점인데, 정말로 칼이 말을 할 줄 아는 대상이라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전장에 서서 “칼” 이 없이는 지휘도, 위엄도, 전투도 수행할 수 없었던 무장의 생명과도 같은 부르짖음에 대한 사물의 이입을 칼로 표시한 것이라고 보고 싶다. 칼에 대한 속담 중에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칼의 노래가 원작이 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노량해전을 앞두고 철군의 길이 막힌 나머지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은 집무실에서 묵주를 쥐고 있다가 벽에 던져버리며 중얼거린다.
“정녕..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는 것입니까?” (그가 믿는 카톨릭의 예수에게)
‘왜’ 가 ‘명’국을 접수하기 위함이니 ‘한‘은 길을 비켜달라는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포고는 너무나 유명하다. 결국 전장을 조선지역으로 축소하려는 의도의 명국과 조선지역을 보급창으로 삼아 명국을 지배하려는 도요토미가 일본 내에서부터 휘두른 칼의 의미는 말 그대로 자신의 야욕과 지배만을 위한 욕구 불만의 칼 이었다. 그 칼 앞에 스스러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 칼의 욕심 때문에 우리는 이순신의 진가를 평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순신 개인... 전투만을 위하고 군민을 위한 애심으로 전장만을 전진한 외로운 한 군인 이순신에 대해서 우리는 극적인 평가를 망설여 왔다. 그리고 그 역시 칼을 빼들었으나 순신이 휘두른 칼은 히데요시와는 질적으로도 의미상으로도 다른 칼이었다. 개인의 차지하겠다는 욕심에 맞선 개인의 지키겠다는 욕심. 이렇게 얼굴도 마주하지 않은 둘은 자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글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적” 으료 표현되고 있지만, 보이지 않기에 “가장 두려운 적” 으로 묘사되고 있다. 순신은 이 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이를 서술하고 있지만 순신이 적에 대하여 가지는 적의와는 상충되는 부분으로서 이 부분을 좁혀 나가는 것이야 말로 칼의 노래의 근본적인 전개 목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은 어미에게 있어서는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불효의 자식에, 아들 ‘면’ 에게 있어서는 돌보지도 아니 못한 썩을 애비였고, 승리를 담보로 칠전량에서 수많은 수군들을 물에 쳐 박아버린 몹쓸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필경 칠전량의 패배가 정부의 강압, 도원수 권율의 강제적인 명령, 원균의 무서운 적의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결국 칠전량까지 참전하게 된 많은 수군들을 긁어모은 것은 순신이었으며, 백의종군의 일신(一身) 이었다고는 하나 결국 자신만 살고 부하들은 사지에서 먼저 사라져 버린 꼴이 되었다.
칼의 노래는 그 이후를 세밀하고 무서울 정도로 인물에게 이입된 극한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글을 읽는 내내 임진년 그 전장의 현장에서 작가가 이순신을 밀착 취재하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취재만 으로는 이순신의 생각과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 본래 전사라는 것이 단편적인 사실들을 규합하고 세부적인 전황보다는 전황에서 나타난 결과, 아니면 전후 기록된 사실들에 근거하고 있게 된다면, 그 근거들은 역사학자나 전술전문가 등에 의해 정리되고, 전사(戰史)집 내지는 별도의 전황을 소개한 책으로 대중들에게 보이기에 마련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역사속에 있었던 전투의 세밀한 과정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래서 사료를 근거로 한 작가의 의중이 개입되고 그들에 의해 전투의 처음과 끝의 중간 부분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전략적, 전술적으로 대 부대가 소 부대를 포위하여 공격 섬멸하였다 는 있어도, - 병사 김모식이가 아시가루 이츠키를 칼로 두 번 찍어 죽였는데 칼이 근육에 씹혀, 빠지지 않아서 김모식이 역시 두 명의 아시가루가 휘두른 칼에 맞아 몸이 쪼개져 내장이 튀어나와 즉사했다. - 는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이순신이 김모식과 같은 존재였다면 그는 일개 용사일 뿐, 소설로써의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서 수많은 설이 오고가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건 칼의 노래는 명랑에서 부활하고, 정유재란의 마지막 날 노량 먼 바다에서 영원히 멈추게 된다. 그러나 그가 부르짖은 칼의 외침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감동시키며 전국을 진동케하였다.
이 소설이 현대에 던져주는 가치를 발견하려고 수많은 사람들은 서초동 리더십센터에서 그에 관한 리더십을 탐구하였으며, 수많은 작가들 역시 현대에 들어서 재발견된 이순신에 대한 그 무한한 열정을 본받아 그에 대한 많은 작품집을 발간하고 있다. 기업체에서도 리더십에 대한 지표를 다시 쓰느라 분주했으며, 정기적인 리더십 특강, 심지어는 리더십에 관한 연수를 준비하는 곳도 이전에 비해 그 수가 많아졌다. 이에 대한 불씨를 당긴 것은 2001년의 본작 “칼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이전까지 유행하던 사무라이에 대한 해석(미야모토 무사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행을 일순간 종식시키고 말았다. 급기야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으로 채택되면서 한국은 무려 4년이 넘도록 이순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칼로 망하지 아니하였다, 물론 죽음과 생애의 이면을 담고 있는 칼에 대한 기억이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피를 원하는 칼은 지금까지 현충사에 살아서 여전히 그 날의 검광을 번뜩이고 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진즉 분해되어 식물의 양분으로 사라졌을지언정 이순신을 이끌었던 칼은 사라지지 않으며 오백년의 세월을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칼의 측면에는 다음과 같은 검명이 새겨져 있어, 우리들의 자만된 마음을 숙연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一揮掃蕩 血染山河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이영남 ‘물들일 염 자가 너무 깊습니다...’
이순신 ‘그만큼 적도 많다...’
('불멸의 이순신‘ 녹취중 발췌)
- 2001 동인 문학상 수상작 김 훈 [칼의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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