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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이순신 장군 승전기랍니다.

작성자
Lv.1 두달수
작성
05.05.09 23:57
조회
179

무지하게 길군요 ...

그만큼 겨레에 큰 일을 하신 분이죠.

더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텐데 T.T

옥포해전 [玉浦海戰] 1592년 5월7일 옥포

1592년(선조 25) 5월 7일 경남 거제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초기, 왜군의 기세에 전함을 버리고 수군(水軍) 1만을 해산시킨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충청 지방에 이르는 해로(海路)의 목줄인 옥포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에 응하여 이순신은 휘하의 판옥선(板屋船) 25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이끌고 당포 앞바다에서 합세하였다. 이때 원균은 그가 거느리고 있던 70여 척의 전선을 모두 잃고 겨우 3척으로 합세하였다.

5월 7일 낮 12시경 조선 함대는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50여 척을 발견하고 이를 동서로 포위해서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선들에게 맹렬히 포격을 가해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의 결과 아군은 별 피해 없이 적선 26척을 격침하는 큰 전과를 올려 최초의 해전을 승리로 장식하였으며, 이어 이날 오후 4시경에는 합포(合浦:경남 마산) 앞바다에서 왜군의 대선 5척을 발견, 이를 모두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합포해전 [合浦海戰] 1592년 5월7일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함대가 경상남도 거제시 합포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한 전투.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한 해 동안 이순신(李舜臣) 함대가 일본 수군을 무찌른 총 10차례의 해전 가운데 두 번째 해전이다. 같은 해 5월 7일 오전, 이순신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조선 연합군은 경상남도 거제도 옥포(玉浦)에서 일본 수군 전함 26척을 격침시켰다. 이 해전이 옥포해전으로, 육전과 해전을 통틀어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옥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 조선 연합군은 거제도 영등포(永登浦) 앞바다로 나아가 이곳에서 밤을 지새기로 하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4시 무렵, 아군 척후선으로부터 일본 수군 대선 4척, 소선 1척이 주변을 지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첩보를 입수한 조선 수군이 즉시 추격을 시작하자, 왜선은 필사적으로 도주해 합포(지금의 마산시)에 이르렀다. 아군이 합포 앞바다까지 진격하자, 더 도망갈 곳이 없게 된 왜군은 배를 버린 채 육지로 올라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조총을 쏘아 댔다. 그러나 전세는 이미 아군의 완벽한 승리로 굳어진 뒤였다.

방답 첨사(防踏僉使)이자 이순신 함대의 중위장(中衛將) 이순신(李純信), 모포(毛浦) 만호(萬戶) 김완(金完), 언양(彦陽) 현감이자 이순신 함대의 수로향도(水路嚮導) 어영담(魚泳潭) 등이 적선 5척을 모두 불살라 격침시켰다. 이 해전이 합포해전으로,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군만이 참전하였다.

옥포해전과 합포해전을 통해 일본 수군의 함선과 무기·장비를 어느 정도 파악한 조선 해군은 남포(藍浦:지금의 마산시 구산면 남포리)로 이동해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이튿날인 8일에는 적진포(赤珍浦:지금의 통영시 광도면 적덕리)에서 왜군의 대형선 9척, 중형선 2척을 삽시간에 격침시켰는데, 이 해전이 적진포해전이다. 옥포·합포·적진포의 세 해전은 이순신 함대가 처음으로 출전해 승리를 거둔 해전으로, 3회에 걸쳐 총 42척의 적선을 격침시키는 데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해전이 일어난 합포는 지금의 마산이 아니라 진해(鎭海)라는 설도 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적진포해전 [赤珍浦海戰]  1592년 5월 8일

1592년(선조 25) 5월 8일 적진포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격파한 싸움.

1592년(선조 25) 5월 8일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무찌른 해전이다. 5월 4일 본영인 여수를 출발한 이순신은 당포(唐浦:지금의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여 옥포·합포 등지에서 31척의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7일에는 남포(藍浦:지금의 마산시 구산면 남포리)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쳤다. 8일 진해(鎭海) 고리량(古里梁)에 왜선이 머물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으며, 이순신은 섬을 수색하던 중 적진포(지금의 통영시 광도면 적덕리) 앞바다에서 정박시켜 놓은 왜군 대선 13척을 발견하였다.

왜군들은 병선을 포구에 매어두고 상륙하여 민가를 습격하고 재물을 탈취하였다. 이에 낙안군수 신호(申浩),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등의 장령(將領)과 군사들은 도망가는 적을 무찌르고, 대선 9척·중선 2척을 분파하였다. 이 전투는 옥포·합포 해전에 이은 3번째 승리로 조선 수군이 해전에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이순신은 5월 23일 문산계(文散階) 종2품 하계의 가선대부로 승서되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사천포해전 [泗川浦海戰] 1592년 5월 29일~ 6월 1일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조선 수군이 경상남도 사천 앞바다에서 왜군 함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왜군 2,600여 명을 사살한 해전.

이순신(李舜臣) 함대가 두 번째로 출전해 치른 첫 해전이다. 전투로는 1592년(선조 25) 5월 7일부터 8일까지 치른 세 번의 해전에 이어 네 번째이다. 같은 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치러졌다. 함대 규모는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의 정예함선 23척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우수영의 함대 3척 등 총 26척이다. 이순신 함대에는 새로 창안된 전함 거북선도 포함되었는데, 거북선이 실전에 투입된 것은 사천포해전이 처음이다.

일본 수군은 이전에 치러진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서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는 이러한 일본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5월 29일 노량(露梁)으로 나아가 사천 앞바다에서 경상우수영 수군과 합류하였다. 이어 해안선을 따라 사천 선창으로 도망치는 왜군 척후선 1척을 격침시킨 뒤, 계속 나아가 사천 포구에 이르렀다.

선창에는 왜군 대선 12척이 매어 있고, 선창 뒷산에는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접근하자 왜군은 완강히 저항하며 맞섰다. 마침 썰물 때라 전선을 포구에 댈 수 없어 아군 함대는 작전상 후퇴하며 적군 일부를 먼 바다로 유인하였다. 왜선이 아군의 대형 전함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해역까지 따라오자, 이순신 함대는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다시 왜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최전방 돌격선의 임무는 거북선이 맡았다. 이순신은 아군 주력선인 판옥선보다 먼저 거북선을 적진에 들여보내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사자총통(四字銃筒)과 각종 함재 화포를 집중적으로 발사하였다. 이에 놀란 왜군 함대는 지리멸렬해 사천 포구 쪽으로 도주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만조가 되었다.

거북선에 이어 밀물을 따라 포구에 도착한 판옥선에서도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자, 왜군은 배를 버리고 산 위로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 와중에 수많은 왜군이 죽고, 포구에 있던 왜선 가운데 10척이 아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나머지 2척은 패잔병들이 타고 도망갈 때 소탕하기 위해 일부러 태우지 않고 남겨 둔 채 함대를 사천만 입구의 모자랑포(毛自郞浦)로 옮겨 그 곳에서 밤을 지냈다.

나머지 2척을 타고 도주하려던 왜군 패잔병은 원균에 의해 6월 1일 새벽 배와 함께 불에 타 죽거나 목이 베어졌다. 이 해전에서 왜군 2,600명이 도살되었고, 13척의 왜선도 모두 격침되었다. 아군 측은 거북선 건조의 책임자이자 군관인 나대용(羅大用)이 적의 총탄에 맞았고, 이순신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사천해전은 이순신이 치른 다른 해전과 마찬가지로 지형과 조수를 이용한 전략 외에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해 그 성능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각종 함포로 무장한 최전방 돌격선으로서 적선 격침은 물론,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후 거북선은 한산도대첩을 비롯한 각종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상징하는 전선으로 위용을 떨치게 된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당포해전 [唐浦海戰]  1592년 6월 2일

1592년(선조 25) 6월 2일 이순신(李舜臣) 함대를 주축으로 한 연합함대가 경상남도 통영시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해전.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6월 1일 아침까지 전라좌수영의 이순신(李舜臣)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연합수군은 사천포해전을 통해 왜군 함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왜군 2,6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같은 날 정오 무렵 이순신 함대 전선 23척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우수영 전선 3척은 삼천포(三千浦) 앞바다를 거쳐 사량도(蛇梁島)에 이르러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오전 8시 척후선으로부터 당포 선창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 함대는 곧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 앞바다로 나아갔다. 당포 선창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소선 12척이 매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배에는 붉은 일산이 세워져 있고, 장막 안에는 왜장 카메이 코레노리[龜井玆矩]가 앉아 있었다.

아군 함대가 접근하자 왜군은 조총을 쏘며 맞섰다. 아군은 개의치 않고 거북선을 앞세워 현자총통을 비롯한 천자·지자총통을 쏘아 대는 한편, 뱃머리로는 왜장선을 들이받으며 격파하였다. 이어 화포와 화살을 왜장선에 집중적으로 발사하였다. 이 와중에 왜장은 중위장 권준(權俊)이 쏜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진 뒤, 첨사(僉使) 김완(金完)과 군관 진무성(陳武晟)에 의해 목이 베어졌다. 왜장 카메이 코레노리가 죽자, 왜군은 혼비백산하여 전선을 남겨 둔 채 달아나기에 바빴다.

왜선 21척은 모두 격침되었고, 사살된 왜군만도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순신 함대가 제2차 출전에서 사천포해전에 이어 치른 두 번째 해전이다. 옥포·합포·적진포해전 등 제1차 출전까지 합하면 다섯 번째 해전이 된다. 적정과 지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거북선을 앞세워 적의 대장선에 화력을 집중하는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이 돋보인 해전이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당항포해전 [唐項浦海戰]  1592년(선조 25) 6월 5~6일과 1594년 3월 4일 두 차례

1592년(선조 25) 6월 5~6일과 1594년 3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제1차 당항포해전과 제2차 당항포해전으로 나뉜다. 1차 해전은 1592년(선조 25)년 6월 5일부터 6일까지 이틀 동안, 2차 해전은 1594년 3월 4일 하루 동안 이루어졌다. 당항포는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에 해당하는데, 진해시로 보는 설도 있다.

제1차 당항포해전은 이순신(李舜臣)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가 제2차 출전에서 사천·당포해전에 이어 세 번째로 치른 해전이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전선 23척, 이억기(李億祺)의 전라우수영 전선 25척, 원균(元均)의 경상우수영 전선 3척 등 총 51척이 참가하였다. 총지휘는 이순신이 맡았다.

당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함대는 당포 앞바다에 정박해 전략 회의를 계속하면서 나흘을 머문 뒤,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당항포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연합함대는 6월 5일 아침 안개가 걷히자마자 당항포로 진격하였다. 포구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모여 있었다.

연합함대는 당항만 어귀에 전선 4척을 숨겨두고, 거북선을 앞세워 일제히 공격을 가하였다. 조선 수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일본 수군도 조총을 쏘아 대며 대응 태세를 취하였다. 이에 아군은 왜군의 육지 탈출 봉쇄와 주민 보호를 위해 왜군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한 뒤, 왜선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였다.

왜선 대부분은 여기서 격침되었고, 도주하는 나머지 왜선들도 모두 추적해 불살랐다. 다만 도망친 패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한 척은 남겨 두었는데, 이 역시 이순신의 명을 받은 방답 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에 의해 6월 6일 새벽에 섬멸되었다.

제2차 당항포해전은 수륙 병진책이 무산된 일본 수군이 거제도 내륙을 오가며 살인·납치·약탈을 일삼던 1594년 3월 4일에 행해졌다. 아군 연합 전선 124척이 참가한 대규모 해전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치밀하고 신속하며 정확한 전략으로 압승을 거둔 해전이다. 연합함대의 제6차 출전이자, 전투로는 12번째 해전이다.

3월 4일 새벽 이순신은 함선 20척을 거제도 견내량(見乃梁)으로 보내 수비하도록 하고, 동시에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각각 10척, 전라우수영에서 11척을 선발해 공격 함대를 편성하였다. 공격 함대의 사령관은 어영담(魚泳潭)을 임명하였다. 이순신은 나머지 3군 함대를 이끌고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며 함대 시위를 하는 한편, 다른 왜군의 지원과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한 준비까지 철저하게 마친 뒤 공격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조선 수군의 완벽한 전략 앞에서 손 쓸 틈도 없이 일거에 무너졌다. 먼저 어영담 함대에 의해 10척이 격파되고 불태워졌다. 이어 나머지 21척도 당항만으로 진격해 들어간 아군에 의해 모두 불태워지고, 패잔병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육지로 도주하였다.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예비대 편성, 신속한 기동력, 적 주력부대의 퇴로 차단 등 이순신의 용의주도한 전략이 돋보인 해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율포해전 [栗浦海戰]  1592년 6월 7일

1592년(선조 25) 6월 7일 조선 수군이 경상남도 거제시 동부면(東部面) 율포리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을 무찌른 전투.

1592년 6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함대는 거제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대선 5척, 소선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진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 율포만으로 쳐들어가 대선 2척, 소선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았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1592년 7월 7일

1592년(선조 25) 7월 7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巨濟島)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런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熊川) 방면에서 출동하였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90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을 유인하였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왜군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승자총통(勝字銃筒)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하고 불사른 것만도 66척이나 되었다.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大捷)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안골포해전 [安骨浦海戰]  1592년 7월 10일

1592년(선조 25) 7월 10일 조선 수군이 경남 진해에 있는 안골포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해전.

1592년 7월 8일 이순신·원균·이억기(李億祺)는 한산섬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섬멸한 다음, 안골포에 왜군이 머무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10일 새벽 일본 수군을 공격했다. 이순신은 학익진(鶴翼陣)을 펴 먼저 공격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그 뒤를 따랐으며,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포구 바깥에 진치고 있다가 본대를 응원하였다.

왜선들은 모두 42척으로서 수군장 구키[九鬼嘉陸]와 가토[加藤嘉明]가 이끄는 제2의 수군부대였다. 조선 수군은 여러 번 왜선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하였으나 쉽게 응하지 않았다. 조선 수군은 작전계획을 변경하여 번갈아 포구에 침입하여 왜선을 공격하였다. 이에 왜군이 맞서 싸우자 이억기의 함대도 참가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하루 동안 계속된 싸움에서 왜군 250명이 사살되고 나머지 왜병들은 뭍으로 도망쳤다. 이 해전은 한산도대첩의 승리와 함께 일본 수군의 주력부대를 쳐서 멸했다는 의의가 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장림포 해전  1592년 8월 24일

8월 24일 오후 4시경 여수를 출발한 전라좌우수영함대 l66척은 당포에서 경상우수군과 합류한 다음, 8월 29일 낙동강 하류에 도착하였다 낙동강 어구를 수색하던 중 양산강쪽 장림포에서 왜선 6척을 만나 이를 가볍게 불태워버리고 계속 근방을 수색했으나 더 이상 적을 발견할 수 없어 가덕도 북쪽으로 회향하여 밤을 지냈다

화준구미해전, 다대포해전, 서평포해전, 절영도해전 1592년10월5일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는 1592년 10월 5일(양력) 첫닭이 울 때 가덕도를 출발하여 심한 샛바람이 부는 몰운대(다대포 해수욕장 끝)를 겨우 지나 아침 8시경에 화준구미(부산시 사하구 화손대 서쪽의 내만으로 추정됨)에서 적선 5척, 다대포에서 8척, 서평포(사하구 구평동 내만)에서 9척, 그리고 절영도(영도)에서 2척 등 모두 24척을 남김없이 격파하고 계속 절영도 안팎을 샅샅히 수색하였으나 적의 종적이 없으므로 곧장 부산포 앞바다로 향하였다.

이순신이 싸운 바다/이봉수 저/새로운 사람들 펴냄/ 중에서

출처: http://cafe.naver.com/yisoonsin.cafe

초량목해전

1592년 10월 5일(양력) 아침 화준구미에서 절영도 까지를 샅샅이 수색하여 적선 24척을 불태워 버린 이순신 장군이, 먼저 척후선을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하였더니 대략 470여 척의 적선이 부산포 선창과 해안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으며 적 선봉 대선 4척이 초량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를 해왔다.

지금의 부산시 동구 초량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부산세관이 있는 장소 근처가 초량목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적의 대형 군선인 아다케부네 4척을 가볍게 격파해버렸으니 이것이 초량목해전이다. 초량목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독전기를 높이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긴 뱀의 형상인 장사진으로 일열로 부산포(부산시 동구 좌천동 일대)로 진군하였다.

출처: http://cafe.naver.com/yisoonsin.cafe

부산포해전 [釜山浦海戰]  1592년 9월 1일

1592년(선조 25) 9월 1일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의 전선을 격파한 싸움.

이순신은 부산 부근의 서평포(西平浦)·다대포(多大浦)·절영도(絶影島) 등에서 왜군 전선 24척을 격파한 뒤,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과 일본 본국과의 연락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은 먼저 부산포 내의 왜군의 상황을 정찰하였고, 왜군 전선 470여 척이 숨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선두로 하고 전함대를 동원하여 왜군을 쳤으며, 그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에 상륙하여 대항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전선 100여 척을 격파한 뒤, 왜군과의 전투를 중지하고 여수(麗水)로 돌아갔다. 조선군이 육지에 올라간 왜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육전이 해전에 비해 불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등 전사자 6명과 부상자 25명을 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웅포해전 1593년 3월~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해인 1593년 초에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명나라 이여송이 대군을 거느리고 반격하면 왜군이 도망갈 것이니 바다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적의 심장부였던 부산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웅포(현 진해시 웅천동, 남문동)의 적을 우선적으로 공략하기로 했다. 1593년 3월 8일 새벽에 나팔을 불어 돛을 올리고 이순신 장군은 여수를 출발하였으니 이것이 제5차 출전이다.

그 날 샛바람이 세게 불어 저녁나절에 겨우 사량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3월 9일에 견내량에 도착하여 기다리던 원균과 합세하여 견내량에서 1박 했다. 다음날 원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시간에 맞춰 오지 않은데 대해 몹시 역정을 내며 기다리지 말고 먼저 떠나자고 했다. 이순신 장군은 원균을 설득하여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하니 정오 경에 과연 이억기가 약 40척의 함선을 이끌고 나타나니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저녁에 온천도 (칠천도)까지 진출하여 1박한 후 3월 11에는 하루 종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포구에 발이 묶여 있다가 3월 12일 온천도를 출발하여 바로 웅포로 향하였다. 이 순신 장군은 항시 부산을 강타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으나 웅포의 적들이 험한 지형에 배를 감추고 소굴을 만들어 있으므로 부득이 이 곳의 적을 먼저 제거해야만 했다. 그러나 적은 이순신 함대와의 해상 결전을 피하고 그들이 구축한 진지에서 바다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산 속의 진지를 이용하여 그들의 함선을 엄호하면서 사격을 가하므로 장군이 원하는 해상 전투는 사실상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날 장군의 일기에는 "두 번이나 적을 유인하려고 하였으나 우리 수군을 겁내어 나올 듯 하면서도 도로 들어가 버리니 끝내 잡아 없애지 못한 것이 원통하다"라고 안타까운 심경을 기술하였으며 부득이 밤 10시 경에 소진포(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로 회항하여 밤을 지내고 하루 동안 휴식을 취했다.

3월 14일 새벽 다시 삼도수군을 지휘하여 웅포로 진격했다가 또다시 퇴각하는 등 유인전술을 감행하였으나 역시 전일과 같이 왜군은 꼼짝하지 않고 총만을 쏠 따름이었다. 3월 20일 아침에 전 함대를 지휘하여 다시 웅포에 이르렀으나 왜군들은 여전히 응전하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사도첨사 김완을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송도(진해시 웅천2동의 솔섬)에 숨어있게 한 후 여러 전선을 포구로 돌진시켜 유인하니 적이 뒤따라 나왔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장군은 복병선으로 하여금 10여척의 왜선을 포위하고 이설 및 이언양으로 하여금 왜선 3척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 배에 타고 있던 100여명을 사살하도록 했으나 배는 깊이 들어간 뒤였기에 사로잡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왜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으므로 장군은 전 함대를 사화랑(진해시 웅천2동, 명동)으로 회항하였다. 3월 22일 새벽에 사화랑을 떠나 심한 샛바람을 받으면서 또다시 진격하였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될 즈음 폭풍이 불어 전선들이 서로 충돌하여 파손될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다. 장군은 무리한 공격은 도리어 손해를 입게 된다고 판단하여 즉시 호각을 불고 깃발로 신호를 하여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전 함대를 소진포로 이동시켜 다음날까지 그곳에 머무르면서 새로운 작전을 논의하였다.

소진포에서 밤을 새운 장군은 악천후임에도 불구하고 3월 24일에는 삼혜와 의능 두 승병장과 의병장 성응지를 웅포왜성 서측인 제포로 보내어 상륙하는 척하게 하고, 포작선 등 변변치 않은 배들을 동쪽으로 보내 역시 상륙하는 척 한 후 주력은 정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날 우리 배 2척이 포구로 돌입하다가 얕은 곳에 좌초되어 2척이 전복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 날 밤 다시 소진포로 돌아왔다.

그 후 3월 30일과 4월 7일에는 다시 웅포를 공격하여 그 때 까지 육전에서만 사용되었던 비격진천뢰를 함상에 장치하여 활용하기도 했다. 4월 7일 전투에서는 왜군에게 억류되어 있던 사천 출신의 조선 여인 포로 한 명 구출했다. 3월 8일 출전한 이래 근 2개월 동안 해상을 항해하면서 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던 까닭에 군사들은 피로에 지치고, 또 시급을 요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더 이상 해상에 머무르며 작전 임무를 수행할 수 없어 장군은 1593년 5월 3일을 기하여 일단 삼도 연합함대를 해체하고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하였다.

이순신이 싸운 바다/새로운  사람들 펴냄/이봉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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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포해전 [長門浦海戰]  1594년 9월 29일~ 10월 4일

1594년(선조 27)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육군과 합동으로 일본군을 공격한 수륙 합동작전.

임진왜란 기간에 이순신(李舜臣)이 9차례 출전해 총 17회에 걸쳐 벌인 크고 작은 해전 가운데서 가장 성과가 작았던 해전이다. 1594년(선조 27)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행한 수륙 합동작전으로, 3회의 전투가 벌어졌다. 제1차 장문포해전, 영등포(永登浦)해전, 제2차 장문포해전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아군 함선 50여 척, 일본 수군 함선 117척이 서로 대치하였다. 10월 1일 조선 수군은 새벽에 거제도 장문포 앞바다에 머물다 영등포로 들어가 왜군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왜군은 바닷가에 배를 대놓은 채 항전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와 뭍에 배를 매려 할 즈음, 적의 포격을 맞아 배에 불이 붙었으나, 번지기 전에 진화하였다.

이후 10월 3일까지 왜군이 항전하지 않는 바람에 소강 상태가 지속되었다. 10월 4일에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과 함께 수륙 합동작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먼저 군사 수백 명을 뭍으로 올려 보내 싸움을 걸었다. 이어 저녁 무렵 수륙 합동작전을 벌여 적을 혼란에 빠뜨린 뒤, 돌아와 칠천량(漆川梁)에 진을 쳤다.

총 6일 동안 치른 수륙 합동작전에서 아군은 왜선 2척을 격침시켰다. 아군 피해는 없었으나, 왜군이 항전하지 않아 전과는 미미하였다. 그러나 이 해전의 영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이 해전으로 인해 일대 위기를 맞는다.

장문포해전은 원래 이순신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도체찰사 겸 좌의정 윤두수(尹斗壽)에게 건의해 윤두수 자의로 행한 수륙 합동작전이다. 뒤에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등에 의해 선조(宣祖)의 재가를 받아 작전 중지 명령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명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작전이 전개된 상태였다. 결국 수륙 합동작전은 성공하지 못하고, 2척의 적선만을 격침시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를 빌미로 조정에서는 북인과 서인 사이에 당쟁이 일어나고, 이순신은 '불붙은 함선에 타고 있던 모든 병사가 전사하였는데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모함을 받아 한양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뒤에 이순신이 권율(權慄)의 막하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면서 전멸하다시피한 조선 수군을 재건하게 된 것도 바로 장문포해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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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칠천량해전 [漆川梁海戰]  1597년 8월 27일

임진왜란 중 일본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조선을 재차 침략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삼도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은 주색(酒色)에 빠져 군율(軍律)이 극도로 문란해졌다.

1597년 7월 일본은 앞서 조선 수군에게 패배하였던 한산도를 다시 공격하기 위하여 먼저 정탐으로 가나메 도키쓰라[要時羅]를 밀파하여 조선군을 유혹하니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은 원균을 불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원균은 전병력을 동원하여 7월 7일 다대포(多大浦)에서 일본군의 빈 군함 8척을 불사르고 서생포(西生浦)에 이르러 적의 주력함대를 만나 패전하고 일부 군사는 풍랑으로 표류하는 지경이 되었다.

간신히 가덕도(加德島)에 당도한 원균은 다시 일본군의 복병을 만나 막대한 손해를 입고 거제도 앞 칠천에 정박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원균은 도원수 권율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하여 태형(笞刑)까지 받게 되었는데, 이에 원균은 불만과 실의에 빠져 군사를 돌보지 않고 전략상 해전에 불리한 칠천에서 이진(移陣)도 않고 그대로 있다가 다시 일본군 함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전함 수백 척을 이끌고 부산에서 출진(出陣)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즈 다다유타[島津忠豊] 등의 육군도 칠천으로 향하였으며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수군까지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결국 원균은 일본군의 수륙양면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도 육지로 탈출하다가 전사하였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은 한때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조선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의 용사가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裵楔)만이 생존하여 12척의 전함을 이끌고 한산도로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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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에 왜군이 6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부산포로 들이닥치니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왜군의 1차 침략이었던 임진왜란 때 철수하지 않고 조선에 잔류하고 있던 2만여 병력 외에 8개대 14만여 명을 8월 초순까지 영남 남해안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조선수군의 명장 이순신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수륙양면작전을 수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해상교통로가 제한을 받게 되므로 이순신 장군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진행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중간첩을 동원한 왜군의 간교한 정보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군은 이순신 장군을 제거하고 조선수군을 일거에 궤멸시키기 위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인 요시라(要時羅)를 간첩으로 조선에 파견하여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접근하여 "고니시가 화의를 하고 종전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은 가토 기요마사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그를 미워한다. 가토가 오래지 않아 바다를 건너올 것인데 내가 그 시간과 가토가 탄 배를 가르쳐 줄 테니 조선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을 시켜 이를 공격하게 하시오"라고 허위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 왜군 첩자 요시라는 조선말을 유창하게 하는 2중 간첩으로 보잘 것 없는 정보를 제공하고 조선의 조정으로부터 도사(都事)라는 벼슬까지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왜군의 간첩이었음에도 김응서는 그의 허위정보를 사실로 믿고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고 권율은 다시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믿고 이순신에게 출동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을 하달하기 위하여 한산도를 방문한 권율에게 이순신은 "일개 첩자의 말을 듣고 적정을 파악하지 않은 채 병력을 출동시키는 것은 적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라고 하며 출병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왜적의 유인작전에 걸려들지 않자 다시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와서 “가토가 어제 이미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조선은 왜 그를 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자 조정의 김응남을 비롯한 서인 세력들이 이순신을 헐뜯기 시작했고 드디어 선조는 "조정을 속이고 적을 놓아 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이순신을 파직․체포하고 대신 원균을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옥고를 치르다 권율장군 휘하에 백의종군하게 된다.

한편 이순신 대신 통제사가 된 원균은 권율로부터 부산방면으로 진출하여 왜군의 상륙을 저지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1597년 7월 31일(이하 양력)부터 8월 20일까지 함대를 나누어 부산 앞바다까지 왕래하면서 소소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조선수군도 7척의 배가 서생포(현 울산)까지 표류하여 적에게 도륙을 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1597년 8월 26일 주력을 총동원하여 180 여 척의 전선과 소형 협선을 포함한 200여 척의 함대와 함께 경상우수사 배설,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장수들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부산방면으로 향하였다.

원균의 함대가 거제도를 지나 부산포로 향하다 왜군함선을 발견한 후 쫓고 쫓기면서 풍랑과 싸우다 노를 젓는 군사가 피로에 지쳐 함선이 분산되고 더 이상 전진하기 어렵게 되었다. 녹초가 된 병사들이 가덕도에 올라 물을 먹고 있을 무렵 왜군이 기습을 가하여 400여명이 전사하자, 원균은 겨우 퇴각하여 거제도방면으로 이동 8월 27일 오후에 가까스로 칠천량(漆川梁)에 정박하였다. 이때 조선 수군은 마실 물도 부족한데다 생쌀을 씹으며 풍랑과 싸우며 노를 저어온 관계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이 때 경상우수사 배설이 아군의 방어능력이 부족함을 들어 신중한 작전계획을 건의했으나 원균은 받아들이지 않고 준비 없는 결전을 서둘렀다. 배설이 다시 칠천량은 수심이 얕고 좁아서 함대의 기동에 지장이 많음을 들어 타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힌편 토도 다카도라(등당고호), 와키자카 야스하루(협판안치),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등은 수군을 안골포(경남 진해시 안골동)에 집결시키는 한편 가덕성의 시마쓰 요시히로(도진의홍)군 3,000명을 거제도에 상륙시켜 칠천량 연안에 포진시키는 등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준비했다. 드디어 8월 27일 아군의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 야음을 이용하여 웅천과 안골포의 대소 함선 600여 척을 동원 기습을 감행하고 거제도의 왜 육군도 대포를 쏘며 기습에 가세했다. 타고난 무인 기질에 성미가 불같은 원균 장군은 이날 전 함대에 명령하여 절대 후퇴는 없다면서 결사항전을 했다. 좁은 해협에서 서로 얽혀 접전을 벌였으니 당연히 혼전양상이 되고 왜군의 장기인 배에 기어올라 칼로써 승부를 거는 등선육박전술에 휘말려 조선 수군은 치욕의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대패한 원균은 남은 함선을 수습하여 칠천량 서남방의 형도까지 후퇴하였으나 미리 매복하고 있던 왜군 함선에 또다시 대패하고 위기를 모면하고자 고성부근의 춘원포(통영시 광도면 황리)에 상륙하였으나 추격해 온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분을 못이긴 채 끝까지 싸우던 이억기 장군과 배흥립 등 부장과 수많은 장병들이 200여 척의 함선과 함께 거의 전멸하였다. 이때 후미에서 눈치만 살피다가 겨우 도망쳐 살아남은 배설(裵楔)이 12척의 전선을 수습하여 한산도로 가서 주민을 피난시키고 병영과, 무기, 식량을 소각한 다음 전라도 방향으로 후퇴하니 조선수군은 몰락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싸운 바다/새로운 사람들/이봉수(섬원주민) 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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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 [鳴梁大捷]  1597년 9월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쳐부순 싸움.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에서 물러난 뒤 원균(元均)은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다대포(多大浦)·칠천곡(漆川谷)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같은 해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 때 이순신은 패전 후 남은 13척의 전선과 수군을 정비하여 닥쳐올 전투에 대비하였다. 8월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고, 진(陣)을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9월 7일에는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어란포에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다시 적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2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지위하는 왜선 31척을 무찔렀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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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도해전(折爾島海戰)  1598년 9월 19일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선조 31, 1598)에 절이도에서 왜군들과 전투를 벌여 왜적의 머리 71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는데 이 전투를 '절이도 해전' 이라고 한다.

명나라 수군이 도착한지 2일째 되는 1598년 7월 18일, 드디어 적함대 100여척이 금당도(고금도와 거금도 중간의 섬)로 침범해 온다는 급보에 접하고서 이순신은 전함대에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한 다음 그날 밤에 길목인 금당도로 전진 결진하여 그 곳에서 경야했다.

그러나 이때 명나라 수군은 합세하지 않고 안전해역에서 후행하면서 관전하는 자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9월 19일 새벽에 일본함대는 거금도(절이도)와 녹도(소록도 근처) 사이로 뚫고서 금당도로 나오는지라 이순신 함대와 거금도 북방해역에서 해상 요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난중일기의 이 당시 부분이 망실되었고 이충무공 전서에도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천병을 모욕하는 일은 황제를 모욕한다는 취지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킴), 선조 수정실록(선조 31년 8월)에 보면 이순신 함대가 이를 요격하여 적선 50여척을 분멸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나와 있다. 따라서 나머지 50여척도 대파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순신자령수군(舜臣自領水軍 :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돌입적중 발화포(突入賊中 發火砲 : 일본함대 속으로 돌진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소오십여척 적축환(燒五十餘隻 賊逐還 : 50여척을 불태움에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때 진린은 구경만 하고 있다가 전과가 욕심이 나서 이순신에게 와서 협박을 함에 할 수 없이 적의 목벤 것 40개를 진린에게 넘겨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국의 원군(援軍)이 참전하지도 않고 소국의 전과를 탈취해도 천군(天軍)으로 대접받는 판이었다.이 해전을 절이도(거금도)해전이라 하는데, 망국적인 사대·왕조사가들이 왜곡 집필한 「이충무공전서」에 이 사실이 누락되어 있어 간과하기 쉽지만, 당시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을 배후 지원세력으로 업고서 명량대첩의 전훈을 되살리면서, 원균의 하극상에 의해 실패한 장문포·영등포해전의 쓰라림을 생각할 때, 결코 허술하게 대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군 피해없이 적함 50척을 수장시킨 대전과가 정확하고 정직하게 공식문서에 기록·반영되지 않았음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아무튼 이 해전의 성과로 이순신 함대는 고금도에서 거금도까지 지배해역을 확대함으로써 고흥반도 이서의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이때 분멸한 적전선 50척과 대파 내지 반파된 적전선 50척에 탑승한 적군을 산정하면 16,000여명이 된다. 물론 아군은 함선 손실은 없었지만, 전사상자가 30여명이 발생한 것으로 나와있다.

이 해전이 격전이었으며 엄청난 적군의 인명손실이 있었기에 사실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1795년에 윤행님(尹行恁)이 편찬한 「이충무공 전서」에는 녹도만호 이여송이 진린에게 적전선 6척과 수급 69개를 상납한 사실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봐 거금도앞 바다가 적의 시체로 가득찼던 것이 틀림없다. 1598년 7월 19일 치러진 거금도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명군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서진중이던 100척 규모의 적함대를 거의 괴멸시키는 대전과를 수립함으로써 적의 요새지인 예교(광양만)까지는 못미치지만 고흥반도까지는 완전 장악하고, 이제 계속 동진하여 여수반도를 끼고 있는 순천만과 남해도의 서측방 광양만을 장악하면 전라도 수역을 확보할 수 있게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나라 수군을 동원하여 연합작전을 펴 일본의 요새진지인 예교(관음포) 앞 포구에 주박하고 있는 100여척의 함선을 분멸시키면, 고니찌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될 것이고 왕년의 한산도 전진기지를 재탈환 확보함으로써 경상도 해역까지 망라하는 광활한 남해의 제해권을 쥘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이순신은 골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예교 공격을 위한 결정적 시기만 탐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사실을 간파한 진린이 사전에 방해공작으로 가로막는지라, 이에 이순신은 여러번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통분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엉뚱한 처방을 내린 선조의 작태가 더욱 한심하다. 내용인즉 명군 경략(총사령관격)에게 건의하여 진린을 육장으로 전임시키고 수군 유격장 계금으로 하여금 명나라 수군과 조선수군을 통합 지휘토록 함으로써 수륙합공으로 예교를 점령하자는 고육지책을 구상한 것이다.

이 소식이 진린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대노하여 이순신에게 호통을 쳤다. 결국 진린에게 약점만 잡힌 선조는 이 조처를 시행치 못하고 없었던 것으로 하였다.

출처 : 이순신의 리더쉽(저자 李 善 浩) 본문중에서

장도해전  1598년 10월19일~11월 6일

고금도에 진을 두고 군세를 확장해 오다 절이도해전에서 왜군을 대파한 이순신 함대는 명나라 원군과 연합하여 1598년 10월 19일(양력) 부터 11월 6일 까지 순천 예교성 앞에 있는 장도(獐島) 부근의 바다로 진출하여 육상의 적을 공격하여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니 이것이 장도해전이다. 이 때 예교성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약 15,000명의 왜군이 농성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동남 해안지방으로 밀린 왜군을 섬멸하기 위해 조명연합군이 사로병진책을 쓰던 시기로, 명의 마귀가 지휘하는 동로군은 울산성을 공격하고, 동일원이 지휘하는 중로군은 사천성을 공격하고 유정이 지휘하는 서로군은 순천 예교성을, 그리고 진린이 지휘하는 수로군은 해상에서 순천 예교를 협공하기로 되어있었다.

조명연합 수로군은 1598년 10월 14일에 고금도 덕동 기지를 출발하여 10월 19일에 순천 예교성 바로 앞에까지 진출하여 장도를 공격하였다. 당시 장도에는 왜군의 군량미 창고가 있었는데, 이순신은 군사를 상륙시켜 군량미를 빼앗아 오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 10월 21일 까지 3일 동안 공격을 계속해도 왜군은 바다로 나오지 않고 육상에서 방어만 했다.

그 후 10월 31일 부터 11월 2일까지 연 3일간 공격을 계속했으나 이 일대가 수심이 얕아 대형 군선이 기동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10월 31일 연합수군은 성 가까이로 진격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이날의 공방전은 치열했으며 왜군의 시체가 해안에 즐비했다고 한다. 이날 전투에서 사도첨사 황세득(黃世得)과 군관 이청일(李淸一), 그리고 수군병사 29명이 이 전사하고 명나라 수군 5명도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육상에서 지지부진하게 싸운던 명나라 광동군은 수군이 썰물을 타고 철수하자 성벽을 타고 내려온 왜군에게 20여명이 살상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11월 1일에는 다시 야간 공세를 펼쳐 다음날 까지 조선수군은 분전했으나 육지에서는 유정이 지휘하는 명나라 육군이 합동작전을 제대로 펼치지 않았고 바다에서도 진린이 지휘를 잘못하여 명나라 수군의 대소 함선 128척이 좌초하거나 불타는 큰 피해를 보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결국 명나라 군사들의 수륙합동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11월 4일 유정은 순천으로 후퇴하고 조명연합함대는 11월 6일에 고금도 덕동 기지로 귀환하였다.

이러한 장도해전은 일본으로 퇴각하려는 왜군의 발을 묶어놓고 최후의 노량해전에 대비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

출처: http://cafe.naver.com/yisoonsin.cafe

노량해전 [露梁海戰]  1598년 11월 19일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벌인 마지막 해전.

정유재란으로 조선에 주둔해 있던 왜군은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병사(病死)들이었다. 그들이 주둔해 있던 곳에서 철군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적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그런데 철수부대를 실은 왜선의 해로를 열어줄 것을 조건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서 뇌물을 받은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말자고 권고하였다. 이순신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여 진린을 설득한 후 함께 왜군을 치기로 하였다.

고니시는 경남 사천(泗川)에 주둔 중인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의 소(小) 시라노부[宗調信]에게 구원을 청하여 전선 500여 척을 얻어 노량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그러자 이순신은 휘하 장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려 노량 앞바다로 쳐들어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의 적병을 죽였다.

이때 왜군은 이순신을 잡을 목적으로 그를 포위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진린의 협공을 받아 관음포(觀音浦)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순신은 적선의 퇴로를 막고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는 동시에 적에게 포위된 진린도 구출하였다.

이 회전(會戰)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은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였다. 이 추격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추격을 계속하여 적을 격파하라고 유언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파한 후에 이순신의 전사소식을 들었다. 이 추격전에서 왜군은 다시 50여 척의 전선이 격파당하고 겨우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는 이순신 외에도 명나라의 등자룡(鄧子龍), 조선 수군의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7년간이나 끌던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은 끝났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이순신의 리더쉽(저자 李 善 浩)

이순신이 싸운 바다/이봉수 저/새로운 사람들 펴냄

http://cafe.naver.com/yisoonsin.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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