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0월쯤 ..
내 나이 스물다섯살. 아무리 우울한 일이 있어도 아침에 자리 털고 일어나
면 세상이 밝아 보였다.
어느날 옆 사무실에서 고양이 붕알 밟히는 소리같기도 하고 팩시밀리 소리
같기도 한 삐이이익 ~ 소리가 들렸다. 오~ 이런 기묘한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가..당장 뛰어가보니 그게 모뎀이랜다. 중앙컴퓨터에 접속해서 사
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글도 보고정보도 얻는다고 했다.수소문해서 가입
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그렇게 케텔(하이텔)을 처음 만났다. 사귀던
여자에게 채였다.
1989년
하이텔이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매일 접속했니면서 이유없이 욕설을 써대는
홍 씨 성 을 가진 사람을 보았다.게시판도배족이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을
케텔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금의 천리안 전신인 피씨서브도 가입했다.
1990년
케텔에 매일 접속했다.글도올렸다. 아무 생각없이 시시껄렁한 컴퓨터를
사는 아버지와 아들의 해프닝 이야기를 올렸다. 이곳 humor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재미있어 했다. " 오~~ 이것이 진정 통신이란것이구나.."
신나서 글을 자주 올렸다. 사람들을 많이 알게되었다.
1991년
하던일이 잘되어 돈을 좀 쥐게 되었다.신이나니 매일 하이텔에 접속하는게
즐거웠다.
1992년.
학원을 차렸다. 망했다. 하는일도 안되고 답답하니 매일 하이텔에 접속했
다.매일 접속하니까 기특한지무슨 우수 네티즌 하면서 행사할때 상도 줬다.
1993년
잘되다가 또 하던일이 꼬였다. 슬픈마음을 달래려고 하이텔(케텔에서 바뀜
)을 매일 접속했다.
1994년
하던일이 다시 잘되기 시작했다.기쁜마음에 매일 케텔에 접속했다.동호회
에서 당선에 힘써주고 밀어주었으나 무능한 시삽때문에 게시판관리로 일
이 꼬였다.사과하고근신하면서 일주일 케텔 접속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심심하고 답답해서 토사광란할 지경이었다.
1995년.
일이 잘되었다. 이젠 정보통신 유통업자가 되었다. 모뎀을 3억원어치나 팔
았다. 정보통신 발전에 일조한다는 기쁜 마음에 매일 케텔에 접속했다.
1996년.
매일 같은시간에 출근하고 같은시간에 퇴근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답답할
때는 케텔에 접속해서 사람들 사는 이야기나 새소식듣는것이 최고였기에
당연히 매일 접속했다.
1997년
IMF가 왔다. 힘들때는 통신에서 네티즌끼리 위로를나누는것이 도리라서 하
이텔에 매일 접속했다.
1998년
여전히 IMF였다. 어려울땐 차분해지는게 최고이기에 조용히 하이텔에 매일
접속해서 세상 흘러가는것을 보았다.
1999년
인터넷붐이 더욱 폭팔적이고 벤처투자붐이 일었다. 하이텔의 동호회출신들
, IP와 CP들이 엄청나게 흥하고 번영하는 것을 보기위해서라도 하이텔에
매일 접속할수 밖에 없었다.
2000년
이젠 VT모드의 통신서비스는 한물갔다고 여기저기서 떠든다. 도대체 왜그
렇게 말하는지 궁금해서 매일 하이텔에 접속해서 글들과 사람들을 보았다.
2001년.
하던일이 망했다.이런 저런 슬픔을 이기는데는 하이텔만한게 없었기에 매
일 접속하였다. 여름..갑자기 집 뒤에 있어야할 산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전문용어로 산사태라고 불렀다. 자그마치 보름동안 하이텔에 접속하지 못
하는데 아무렇지도않았다.토사광란은 커녕 세상은 하이텔에 접속하지 않아
도 돌아가는게 보였다.
2002년
어느날 하늘을 보니 가을이었다. 하이텔에 접속하였다. 내가 아는 누구도
없었다.
수백만명이 될것 같았던 동호회와 사람들과 즐겁게 웃고 떠들던 친구들은
모두 없었다.
2002년 10월의 마지막날..
하는일이 다시 잘되기 시작했다. 마을에 새로운 회선이 들어왔다.바꾸었다
.하이텔을 1988년 10월에 시작하여 2002년 10월31일 6시에 하이텔을 해지
하였다.
이제 내 나이 마흔...
-아침에 일어나면 세상이 예전처럼 밝게 보이지 않는다.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고 변명하고 윽박지르고 웃고 눈치보고 걱정하고 한숨쉬고 미안해하
고 섭섭해 하다가 하루가 가고 계절이 간다.
- 15년동안 꾸준히 매일하던것은 밥먹는것과 숨쉬는것과 하이텔에 접속한
것 밖에 없었다.하지만 실제로 미친듯이 매달려서 하이텔을 한 기억은 없
다. 많은 사람들이그곳에 늘 있다는 24시간 편의점 유토피아 같은 생각이
었다.
-영원히 살이 찌지 않을것 같은 호리호리한 체격은 똥배장군이 되었고 20
대때에 밤새 채팅하고 아침에 동호회회원들 만나서 세미나하던 체력은 이
젠 꿈이 되었다.좀만 잠을 부실하게 자도 삭신이 쑤신다.
-15년의 인연을 스쳐지나갔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긴것 같다.하지만 이제
하이텔에 남은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15년전 내 나이였을 20대 중반의
젊은 사람들이 대형포털 프리챌을 쓰고 DAUM을 쓰다가 이렇게 떠날것이다
. 다른사람들이 그렇게 거쳐간것처럼 나도 똑같이 거쳐가는데 웬지 좀 미
련이 남는다. 축복받으라. 모뎀소리를 문화로 만들었던 PC통신 1세대여.
-이상 15년 하이텔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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