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쯤 토론마당에서 장르비평의 이론화에 대해 몇몇 분과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제목 검색에 ‘비평논의’라 치면 지금도 보이지요.)
장르비평의 객관적 틀을 세워보자는 의도로 시작했고 새로운 시각을 많이 얻었습니다. 계속 토론을 했으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다른 일이 터지며 논의가 중단되고 말았지요.
7, 8개월이 지나 끊겼던 논의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좀 우스운 일입니다만 그 당시 장르비평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바를 연이어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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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 꼭 객관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관적인 비평이고 객관적인 비평이고를 떠나 비평도 글이기 때문에 글 자체의 매력이 따로 있습니다.
평자의 시각이 주관에 치우쳤더라도 장르를 보는 시각이 일정하게 정리되어 있고 해당 텍스트를 분석, 비판하는 솜씨가 탁월하다면 멋진 비평글이 되겠지요.
비평란에 올라온 글들을 보시면 알겠지만 대개 장르 비평글들은 ‘개연성’에 대한 지적이 대다수입니다.
이 부분은 이러저러해서 말이 안 된다. 이런 비평이 대부분이지요.
사실 개연성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의 기본이요,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이건 아닌데……? 이상한데……?’하는 느낌이 비판을 하는 동기를 제공하니까요.
앞뒤 장면의 인과,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판단에 대한 일관성, 무협이면 무협, 판타지면 판타지에 맞는 최소한의 설정 상 보편성 등도 모두 개연성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해당 장르에 익숙한 독자일수록 눈에 밟히는 오류는 많아질 수밖에 없고 이런 것들을 집어내기 시작하면 굉장히 적나라한 비판이 가능해지지요.
하지만, 이런 개연성 비판은 글의 ‘완결성’에 대한 가치판단을 결론으로 내게 됩니다. 어느 정도 완성도가 있는가라는 척도에 맞추어지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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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성’을 최소한의 기본으로 생각하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완결성’만 따지게 되면 장르 소설은 제대로 비평하기 힘들지 않나 생각하는 편입니다.
대부분의 독자가 장르 소설을 보는 이유는 ‘완성도’ 높은, ‘문학성’이 뛰어난 글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무협소설을 즐겨 보는 분들은 무협소설만이 줄 수 있는 ‘재미’를 느끼기 위해 무협소설을 보시는 것이고 판타지 소설 또한 그것만이 줄 수 있는 ‘재미’가 따로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로맨스 소설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른바 각 장르는 해당 장르만이 풍기는 독특한 ‘맛’이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글은 글일 뿐입니다.
장르적 특성 운운해도 최소한의 기본이라든가, 기본소양 같은 말이 나오면 누구도 할 말이 없지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본이 꽉 채워진 정말 완성도 높고 완결성 짙은 ‘재미없는’ 글과 기본은 모자라고 문장도 엉성하며 곳곳에 개연성의 구멍이 숭숭 뚫려 있지만 ‘재미있는’ 글이 있다고 한다면, 저는 장르 소설로서 후자를 더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장르 소설은 대중에게 짙은 몰입도와 읽는 재미를 선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문학적 고평가를 받기 위한 예술 분야가 아니라 생각하는 편이니까요.
3
그렇다면, 장르 전반에 걸친 ‘재미’는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장르 비평의 전제 또는 결론, 가치판단의 기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것을 ‘이야기’라고 봅니다.
완성도가 높고 문장 깔끔하고 특별한 표현을 통해 새로운 즐거움을 주는 글이라도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장르로서는 실격이라고 보고 있지요.
장르비평은 그래서 ‘이야기’의 완성도, ‘이야기’의 재미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형식의 ‘이야기’들이 있고 ‘이야기’의 재미를 주는 요소는 무엇 무엇이며 각 장르의 대다수 독자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와 싫어하는 ‘이야기’, 시기별 상업적 척도가 될 수 있는 소위 ‘트랜드’라 할 수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분류 가능하지 않나 생각하지요.
일종의 장르 비평을 위한 거친 이론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런 이런 이야기가 잘 팔린다, 재미있다는 건 ‘원칙’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틀에 박힌 이야기, 정형화된 이야기는 누구나 쉽게 물리게 되고 마니까요.
하지만 이야기의 재미를 주는 요소는 이런 것이다라는 ‘원형’이 구축되어 있다면 그것을 기준으로 여러 비평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 글은 이런 이야기의 형식을 띄고 있는데 이런 이런 점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여 이야기의 재미를 크게 해쳤다.’ 같은 비평이랄까요?
이런 비평도 가능하겠지요.
‘이 글은 이런 이런 컨셉 하에 이야기를 이끌어냈는데 이런 이런 점에서 굉장한 의외성을 선사함으로써 이야기의 재미를 증폭시켰다.’
짧게 정리하자면 이야기의 완성도, 신선함, 독창성을 기준으로 비평을 하게 되면 장르소설 본래의 독법에 근접한 비평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음... 글이 길어질 듯하니, 보다 세세한 지점은 다음 글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최소 1달이라는, 아니 이제 27일 인가요? 적어도 그 정도 시간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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