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절대자, 돌아오다
작가 : 더페이서
출판사 : 마루&마야
‘절대자, 돌아오다’의 일부분이 학사검전의 일부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정확하게는 7권의 일부가 학사검전의 한 에피소드를 많이 닮았습니다. 아래에서 확인해보시죠.
#학사검전
모용세가의 제자들, 얼마 전 제오대 제자로 이름을 올린 신입 제자들은 웅성거리면서도 일단은 수련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기도 하고, 고진철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했지만 적어도 드러내놓고 거부를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이런 시연 아닌 시연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그럿은 동료들의 눈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고진철 역시 매한가지였다.
‘젠장, 나라고 해서…….’
하지만 눈앞에 버티고 있는 저 사람, 겉보기에는 비리비리한 문사처럼 보이는 저 운현이라는 사람을 거부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적어도 어제 그의 검무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가 대제자 모용진에게 어떤 손님인지 이제는 다들 감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랴. 그저 꾹 참고 그의 말대로 따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으흠.”
고진철은 헛기침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동료들의 눈총을 모른 척 애써 외면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지금부터 모용검식을 시작한다.”
제오대 제자로 이름을 올리고 난 후에야 배울 수 있었던 모용검식. 그 첫 식을 위한 준비자세를 취하며 고진철은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동료들의 불만은 여전해 보였지만 어쨌든 그들은 고진철의 말에 따라 엉거주춤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발검!”
창. 검이 뽑혔다. 그리고 고진철의 뒤를 따라 다른 동료들이 검을 빼어드는 소리가 이어졌다. 차차창.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연무장에 정적이 깔렸다. 일단 검을 빼어든 이상 어정쩡하던 자세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들 중에는 없었다. 각기 검을 든 그들의 눈이 진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모용검식 제일검, 정검 제일식 정검앙천!”
고진철의 목소리 역시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리고 땅을 향해 호를 그리던 모용세가의 검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그 고개를 들었다. 쿵.
“하아!”
발 구름 소리와 함께 연무장을 뒤흔들 듯한 기합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검이 연무장에 푸른 무지개를 뿌려내기 시작했다.
“후우우.”
고진철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와 동료들이 내뿜은 열기로 연무장의 공기는 후끈 달아올라 있었고, 옆과 뒤에선 동료들이 자신처럼 호흡을 고르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비록 그들이 펼친 것이 모용 십이검 중 제일검에 불과하다지만, 스물네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정검은 그들에게 결코 녹록치 않은 검식이었다. 착. 고진철은 검을 갈무리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들로 하여금 이 검식을 펼치도록 한 장본인이자 당연히 감탄의 눈길을 하고 있을 운현의 얼굴을 찾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치 못한 운현의 표정이었다.
“흠.”
작은 신음 소리 같은 목소리는 다름 아닌 운현의 입에서 새어나온 것이다. 감탄이나, 혹은 적어도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던 운현의 표정은 고진철의 기대와 달리 오히려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듯 이마에 잔뜩 주름까지 잡고 있었다.
“흐음.”
고진철이 말없이 쳐다보고 있는 동안 운현은 이제 고개까지 꺄웃거린다. 누가 봐도 ‘이게 아닌데’하는 표정이라, 뒤에 선 다른 제자들도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저, 무슨 잘못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기다리던 고진철이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러나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운현이 말했다.
“다시 한 번 해 보시겠습니까?”
“네?”
고진철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지만 돌아온 것은 진지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운현의 표정뿐이다. 고진철은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동료들의 반응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들이다. 하지만 섣불리 나서는 이도 없다. 워낙 예상 밖의 반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앞에 선 운현이 뜻밖에 강한 어조로 나온 탓도 있으리라.
‘후.’
고진철은 속으로 한숨을 내어쉬었다.
‘그래. 고수라 이거지.’
상대는 고수다 그것도 대제자 모용진의 귀빈으로 올 만한, 자신들이 상상도 못할 고수. 게다가 애초에 잘못한 건 상대가 아닌 자신들인지라, 고진철은 속에서 올라오려는 뜨거운 것을 다시 한 번 꾸욱 눌러 참았다.
‘젠장.’
속으로 나지막한 투덜거림을 내뱉고 나서, 고진철은 자세를 잡았다.
“모용검식을 시작한다!”
감정이 실린 고진천의 목소리는 크고 신경질적이었다. 그 목소리에 동료들이 투덜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는다.
“발검!”
차차창. 쥔 이들의 마음이라도 실린 듯, 검을 빼어드는 소리마저 아까보다 한결 힘이 빠진 듯한다. 고진철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숨을 골랐다. 지금 같아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짜증이 울컥 올라올 것만 같았다.
“정검 제일식!”
뒤에서 조그맣게 ‘젠장’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무시하고 고진철은 크게 외쳤다.
“정검앙천!”
쉬익. 수십의 검이 일제히 땅을 향해 호를 그린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향해 그 푸른 검빛을 번쩍였다. 쿠웅. 모두가 함께 내딛는 소리가 연무장을 울리고 뒤이어 우렁찬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때였다.
@절대자, 돌아오다
“무료한 참인데, 마침 잘됐네요.”
“예?”
“방금 전 그 동작들 다시 한 번 보여주시겠습니까?”
이신우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 힘에 억압된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래를 끄덕였다.
“보여 주시죠.”
“아, 네...”
화용현은 껄끄러운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그의 옆에 있던 사제와 함께였다. 아직도 사제의 표정은 멍했지만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윽고 자리를 잡은 화용현이 외쳤다.
“제1식!”
“제1식!”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서 외치며 동작을 펼쳤다.
약 10분에 걸쳐 움직인 그들이 긴 호흡을 뿜으며 동작을 멈췄다.
“다시 한번 보여 주시겠습니까?”
“예? 아, 예...”
화용현을 비롯한 18검수 모두가 인상을 썼다. 하나, 이신우의 기세를 떠올리면서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게다가 무언가 시비를 거는 느낌도 아니었기에 따지기도 애매했다.
“다시, 제1식!”
“제1식!”
18검수의 목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같은 동작을 다시 반복하는 것에 신경질이 난 탓이다.
게다가 누군가가 지켜보는데 그 표정은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학사검전
“잠깐.”
“하…….”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연무장에 있던 모두는 움직임을 멈췄다. 중간에 잘려버린 기합 소리가 이상한 음색으로 터져 나오고,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검식을 중단시킨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향했다. 그 주인공, 운현은 지금 그들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고진철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제 아무리 고수요, 손님이라 하지만 이것은 경우가 아니다. 고진철이 한 마디 하려고 막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지금 이 검식이, 아니 이 자세가 아까와 같은 자세라고 생각합니까?”
운현의 질문을 받은 사람은 고진철 옆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 당돌하기까지 한 질문에 그는 대답을 못하고 운현과 고진철의 얼굴만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그건…….”
“이분은.”
운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옆의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검의 위치가 다른 분들과 상당히 다르군요. 지금 검끝이 어디를 보고 있는 겁니까?”
운현의 지적은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이분은 발이 틀렸군요.”
그는 제자들 사이를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며 그들의 자세를 하나하나 지적해 나갔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한 바퀴 돌고나서 고진철 앞으로 돌아온 운현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것과 아까의 그것, 어느 쪽이 정검앙천입니까?”
고진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고 있는데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상대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 지금 운현을 쳐다보는 이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그리 좋은 표정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운현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그 눈빛들을 마주하면서도 그는 전혀 기가 죽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돌려 연무장 한 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운현이 다가간 곳은 어제 목검을 들었던 그 병기 거치대였다. 운현은 그곳에서 그들이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평범한 검 하나를 들어올렸다.
“잠시 빌리겠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운현은 개의치 않았다. 거치대에서 검을 집어든 운현은 바로 옆에 있는 돌담 앞으로 걸어 나갔다. 턱. 검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를 앞에 두고, 운현은 담 앞에 버티고 섰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고른 다음 천천히 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 검은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평범하지만 손질이 잘 된 검이 운현의 손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쉭. 일렁이는 낯선 기운도 없었고 눈에 보이지도 않은 정도의 엄청난 빠르기도 없었다. 운현의 손에 들린 검은 돌담을 향해 정확히 수평을 그었고 쇠가 돌에 부딪치는 소리가 연무장에 작게 울려 퍼졌다. 치잉. 운현은 검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방금 전과 똑같이 수평으로 검을 휘둘렀다. 쉬익. 치잉. 검이 돌담을 긁는 소리가 또다시 울려나왔다. 운현의 손이 또 다시 수평을 그렸다. 치잉. 치잉. 치잉. 운현이 팔을 움직일 때마다 신경을 거슬리는 듯한 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그렇게 이어져가던 소리는 아홉 번을 넘기고서야 멈추었다. 타악. 운현은 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제가 몇 번 검을 휘둘렀습니까?”
“여, 열두 번…….”
무심결에 소리를 세고 있던 누군가가 대답했다. 운현은 다시 물었다.
“이곳에 몇 개의 흔적이 있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그들 눈앞에 희게 그어진 담벽의 선은 하나였다. 검이 돌에 만들어낸 가늘고 긴 단 하나뿐인 흔적. 마치 딱 한 번 그은 듯한 모습이지만 연무장에 울려 퍼진 열두 번의 소리는 이곳에 있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꿀꺽. 고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대답이 없는 그들을 향해 운현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이곳에 흔적이 하나뿐인 것은 제가 열두 번의 동작이 같은 초식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검에 궤적이 남는다면…….”
운현은 자신을 향한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것이 같은 정검앙천의 초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향한 운현의 말은 가차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말에 마음이 찔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절대자, 돌아오다
“하아!”
“하앗!”
기합이 터지고 다시 동작이 멈췄다.
화용현을 비롯한 18검수들이 이신우를 바라봤다.
이신우는 미간을 찌푸린 그대로 화용현에게 다가갔다.
“목검이라도 있습니까?”
“아, 예.”
연무장 바로 뒤에 놓인 목검 한 자루를 가지고 화용형이 돌아왔다. 그것을 잡은 이신우가 잠시 눈을 감고는 방금 전 이들이 펼친 제1식의 동작을 보여 줬다.
제1식의 시작을 허공을 가르는 간단한 동작이었다.
후웅!
“화 대협.”
“예?”
“보셨습니까?”
“아, 네.”
“그럼 다시 보십시오.”
이신우는 다시금 같은 동작을 펼쳤다.
이번에도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처음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 동작이었다.
“무엇이 다른지 아시겠습니까?”
화용현이 미간을 좁혔다.
“글쎄요. 같은 동작으로 보입니다만.”
“아닙니다. 첫 번째에선 정확히 배꼽 부의를 기준으로 허공을 갈랐고, 두번째는 그보다 조금 위를 기준으로 휘두른 겁니다.”
“아...”
“그럼 묻겠습니다. 첫 번째가 제1식의 동작입니까, 아니면 두 번째가 제1식의 동작입니까?”
“그, 그건...”
“이것은 비단 화 대협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처음과 두 번째의 동작이 달랐습니다.”
모두들 조금은 당황스런 표정이었다.
같은 심정인 화용현이 말했다.
“하지만 그게 상관이 있을지...”
이신우가 다시 자세를 잡자, 그의 목검에는 검기가 덮어진다.
그 검을 휘둘렀다.
스윽.
저 멀리 있던 담벼락이 그어졌다.
이신우의 검이 다시 휘둘러졌다. 또다시 스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스윽, 스슥, 스윽.
그렇게 열 번을 반복했다.
“제가 몇 번을 휘둘렀죠?”
“그야 열 번...”
“선은 몇 개입니까?”
모두의 시선이 담벼락으로 옮겨진다.
그곳에는 오로지 단 하나의 선만이 그어진 상태였다.
#학사검전
“하, 하지만 대인…….”
동료들을 대표해서 고진철이 용기를 내었다.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지…….”
고진철은 말끝을 흐렸다. 운현의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이때껏 누구도 그들에게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더 빠르고 더 강하게, 그리고 더 능숙하게. 그들이 추구한 것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정확하게라는 것도 있기는 했으나 이 정도의 정확성을 요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흐음.”
운현은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마치 어떻게 설명해야 알아들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운현은 마음을 정한 듯 곧장 고진철에게 걸어갔다. 탁. 운현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고진철과 조금 떨어진 거리였다. 그곳에 서서 운현은 고진철에게 말했다.
“저를 향해 검을 휘둘러보십시오.”
고진철은 잠시 머뭇거렸다. 고수, 그것도 대제자의 손님을 향해 검을 휘둘러도 될까 하는 마음에 주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운현이 말을 거둘 것으로 보이지도 않아서 고진철은 검을 들어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고진철은 운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약간 아래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휘익. 쨍.
“웃.”
고진철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검은 끝가지 움직이지 못하고 중간에 막혀 있었다. 그 움직임을 막은 것은 다름 아닌 운현의 검 끝이었다. 두 개의 검 끝이 공중에서 마치 붙어버린 듯 멈춰 있었다. 휙. 운현이 검을 거두자 고진철의 검이 힘을 잃고 휘청거렸다.
“다시.”
검을 내린 운현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고진철도 속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익.’
고진철은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는 잠시 틈을 살피다가 온 힘을 다해 최대한의 빠르기로 검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보란 듯 운현의 눈높이를 노린 공격이었다. 쉬익. 그의 검이 공중을 갈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검은 그 궤적을 끝까지 그리지 못했다. 쨍. 날카로운 쇳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고진철의 검은 운현의 검과 그 끝을 정확히 맞대고 있었다. 중간을 가로 막은 것이 아니라 검의 극과 극이 공중에서 정확히 만난 것이다.
“지금과 똑같은 높이로 다시 한 번 해 보십시오.”
운현의 목소리가 고진철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진철은 이를 악물었다.
‘이익!’
자세를 잡고 틈을 살피지도 않았다. 고진철은 검을 거두자마자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과 오기를 실어서. 쨍. 하지만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은 또 도중에 멈춰 버렸다. 게다가 그의 검을 공중에서 멈추게 하고 있는 상대는 그다지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자신은 이를 악물고 있는데 상대는 말을 시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이 검이 방금 전보다 높았습니까, 낮았습니까?”
고진철은 대답을 못했다. 그런 것은 생각도 못해 보았다. 언뜻 보면 비슷한 것도 같은데, 상대가 저리 묻는 것을 보니 같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높은지 낮은지 도무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바로 이만큼…….”
운현의 검 끝은 고진철의 검을 떠나 아래로 내려갔다.
“높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멈춘 곳은…….”
다시 운현의 검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갔다.
“이곳이었습니다.”
운현의 검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고진철은 퍼뜩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검 끝이 멈춘 곳과 운현이 두 번 검을 멈춘 지점은 정확히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휘릭. 운현이 검을 거두었다.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차이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이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 말씀에도 이르기를 성형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음은 자신의 학문이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에게 의미 없어 보인다 하여 무시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는 것이 학문하는, 크흠, 아니 배우는 자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자신의 말실수가 쑥스러운 듯 운현은 잠시 헛기침을 했다. 하나,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고진철과 마찬가지로 지금 눈앞에서 보여준 운현의 검에 입을 딱 벌리고 있을 뿐이다. 날아드는 검 끝을 자신의 검 끝으로 막아 세울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해본 일이다. 운현은 잠시 고진철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검은 술입니까? 아니면 도입니까?”
난데없는 운현의 물음에 고진철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운현의 말은 고진철만이 아닌 이곳에 있는 모두를 향해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검이 자신의 도구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필연 자시의 욕심을 위한 기술이 될 터이고, 이는 시장의 무뢰한이나 개 잡는 백정이 도검을 들고 있는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허나 검이 자신의 도라면…….”
운현은 고진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도가 어떠한 길을 가는지 어찌 상관치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그 침묵이 긍정을 뜻하는지는 확실할 수 없었지만, 운현은 나름대로 좋은 쪽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
운현이 뒤로 조금 물러섰다.
“다시 한 번 해볼까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모용세가 오대 제자들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날 고진철을 비롯한 모용세가 오대 제자들은 해가 지도록 모용검식 제일검을 펼쳐야 했다.
“헉헉헉.”
연무장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가득했다. 벌써 해가 졌지만 불끈 달아오른 열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제, 젠장.”
털퍽. 누군가 바닥에 주저앉자 그 뒤를 이어 몇 명이 더 바닥에 엉덩이를 깔았다. 고진철은 흘러내리는 땀을 닦기는 이미 포기했지만 그래도 아직 무릎을 짚고 서 있었다.
“이걸……매일 하라고?”
고진철은 운현이 떠나가며 해준 말을 중얼거렸다. 첫인상과는 꽤 다르게 그 운현이라는 사람은 한 번 불이 붙는 듯 보이더니 당최 그만 둘 줄을 몰랐다. 그나마 어두워지지 않았다면 언제까지라도 계속 할 듯한 기세였다.
“미쳤냐!”
뒤에서 신경질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누가 이딴 짓을 한다고 그래. 이건 그냥 우릴 골탕 먹이려는 거야!”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하는 수련은 생각보다 더 어려워서 몇 배의 힘이 들었다. 그러니 누가 자청해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랴.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이 그 말에 공감할 것이다.
“아니, 그건 꼭 그렇게 생각할 것만도 아냐.”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에 고진철은 고개를 돌렸다. 같이 오대제자에 이름을 올린 장일남이었다. 술과 잡기를 좋아하지만 의외로 사리분별이 정확한 사람이라 평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생각해 봐. 아까 그 사람이 간단하게 검을 막아낸 것 말야. 그건 우리 검이 그 정도 실력을 가지 사람 앞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잖아.”
“그런데?”
퉁명스러운 반응이 돌아왔다. 하지만 장일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예를 들면 말이지. 그래, 주루든 도박장이든 어디서 시비가 붙었다고 생각해 보자고. 우리도 검을 정식으로 배운 제자니까 일단 검을 빼어 들지 않겠어? 그런데 자신 있게 날린 일검이 아까처럼 턱 막혀 버리면 어떻겠어?”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가진 것은 한 자로 검이 전부인 그들에게 그건 생각하기도 싫은 상황이었다.
“그, 그냥 도망가면…….”
“안 돼.”
누군가의 자신 없는 목소리에 고진철이 판정을 대신 내려 주었다.
“이 정도의 실력 차이면 등 돌리는 즉시 사망이다. 도망가는 것도 서로 비슷할 때나 얘기지.”
“어쨌든 이건 생각해 볼 문제야. 결국 지금 우리에겐 밑천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니까. 예를 들면…….”
장일남은 어깨를 으쓱했다.
“주루에서 실컷 놀았는데 정작 계산할 때가 되니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는 경우랄까…….”
고진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다지 어울리는 예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가슴에 와 닿는 예화인 듯, 다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럼 어쩌란 말야? 실력이 이것뿐인 걸.”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튀어나왔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유쾌할 리가 없는 까닭이다.
“길은 두 가지야.”
장일남이 말했다. 그 뒤를 고진철이 이었다.
“우리 실력에 맞게 찌그러져 있든가, 아니면 내일도 이걸 하든가.”
고진철의 말에 장일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철이 말이 맞아.”
“이걸 또 하자고?”
“그럼, 달리 방법이 있어?”
고진철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거대 세가의 후계자쯤 된다면 갖은 무공 비급이니 천하 영약을 동원하면 될 테지만, 그럴 수가 있었다면 자신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겠는가.
“하지만 이게 무슨 소용이 될지…….”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장일남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적어도 그 정도 되는 사람이 가르쳐 준 거잖아.”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내일도 이 짓을 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다.
“젠장!”
‘나도 젠장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에 동의를 표하며 고진철은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쩔래? 할래?”
장일남이 고진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고진철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해야지. 할 수 있는 게 이거뿐인데.”
“너는?”
옆에 있는 다른 동료에게 장일남이 묻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
“나도.”
장일남의 시선이 움직여가는 대로 그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겠다고 대답했다. 밝은 표정은 하나도 없었지만 거부하는 사람 또한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동료들을 죽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장일남은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다 하는 거군. 이거 나도 주루는 당분간 포기해야겠는 걸.”
장일남의 말을 들으며, 고진철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보고 고생을 사서 한다는 거겠지?”
땅이 꺼질 듯 한숨 쉬는 고진철을 돌아보며, 장일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신나 보인다고, 고진철은 문득 생각했다.
@절대자, 돌아오다
화용현은 방금 그 동작이 대단함을 인정했다.
검기도 완숙했으며 가볍게 휘둘렀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곳을 열 번이나 그었다.
하나, 그것이 적을 제압함에 있어서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속내를 그대로 말하자 이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검을 휘둘러 보시죠.”
“아, 예.”
화용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의 말을 따르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은 잡념을 지우고 그의 말대로 검을 휘둘렀다.
스윽.
이신우의 목검도 휘둘러졌다.
방금 전과 같은 궤도였다.
탁.
목검의 끝에 화용현의 검끝이 걸렸다.
화용현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모두의 눈이 커졌다.
“다시.”
화용현은 너무나 쉽게 막힌 자신의 공격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이번에는 보다 더 강하게 휘둘렀다.
스윽.
하나, 이번에도 이신우는 같은 궤도로 검을 휘둘러 화용현의 검을 막아 냈다. 그것도 목검의 끝으로 진검의 끝을 정확히 맞닿게 하는 것으로 말이다.
“내 눈에는 당신이 휘두르는 검의 궤도가 보입니다.”
“...”
“문제는 그 궤도를 맞추는 것입니다. 내가 같은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음에도 다른 궤도가 나온다면 화 대협의 그 궤도를 맞추는 것은 쉽지 않겠죠. 하나, 마음먹은 대로 검이 휘둘러진다면 내 눈에 비치는 화 대협의 모든 공격을 이렇게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화용현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손님이 너무 무례했군요.”
그의 모습에 뒤로 물러선 이신우가 이내 포권을 취하며 예를 표하자 화용현은 물론 18검수 모두가 그의 예를 받아 줬다.
“제 무례를 겸허히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것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신우는 웃으며 등을 돌렸다.
이윽고 그가 점처럼 사라졌을 즈음, 누군가가 탄식을 내뱉었다.
“하나...”
그 소리를 시작으로 주변에 신음이 번졌다.
“으음.”
18검수의 수좌인 화용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말없이 침묵이 이어졌다.
고요함은 무거웠고 적막감은 온몸을 짓눌렀다. 공기마저 어개를 내리누르는 기분이었다.
“대사형...”
“왜 그러느냐.”
“그럼 지금까지 저희가 한 수련은...”
“어허,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뒤에 남아 버린 말이 뇌리를 뒤흔든다.
‘지금까지 한 수련은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던가?’
자괴감이 가슴이 아려왔다.
@절대자, 돌아오다
다음 날, 마찬가지로 훈련이 시작되었다.
오전부터 시작된 훈련은 해가 떨어지고나서야 끝이 났다.
‘확실히 좋아졌어.’
오늘은 어제보다 자세의 지적이 덜 나왔다. 아니,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벌써 말입니까?”
“네. 해도 떨어졌으니.”
“아...”
그제야 해가 떨어졌음을 인지하는 화산 18검수들이었다.
‘집중력은 좋군.’
이신우는 수련이 끝났음에도 자리를 뜨지 않는 그들을 웃으며 바라보다 이내 등을 돌렸다.
“아.”
그러다 생각났는지 다시 몸을 돌려 그들을 돌아봤다.
“한 사람씩 이야기를 해 줄 게 있긴 한데...”
그 말에 화산 18검수들의 눈이 빛났다.
결국 그들을 한 사람씩 불러 장점과 단점, 그리고 보완해야 할 사항과 깨달음에 도움이 될 조언을 해 주었다. 그러자 어느새 8시가 넘어섰다.
“자, 그럼 정말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저기...”
“네?”
“보완할 점도 듣고 했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이신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그들의 동작을 한 번만 더 봐주기로 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준비!”
“하앗!”
“제1식!”
눈에 뜨거운 열정을 품은 채 그들은 동작을 하나씩 펼쳐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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