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생각은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많은 곳에서 공동집필이나 세계관 공유 등의 작업을 시도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일이 진행되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제대로 완성품이 나올 가능성도 낮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라면, 전 대충 이 정도로 요약하겠습니다.
1. 서로가 생각하는 틀의 차이.
세계관 창조부터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완벽하게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생각하는 것들 중 여러 부분이 '일치'하는 것일 뿐이죠. 문제는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서 생겨납니다. 이 때문에 같은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시각이 달라질 수도 있고, 설정상의 요소에 대해 다른 논점으로 접근해버려서 의도와는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지요. 흔히 말하자면, 의도치 않게 '설정파괴'가 심심찮게 벌어지는 등의 일 말입니다.
2. 의견교환의 어려움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들, 머리 속에 있는 걸 꺼내서 남들에게 표현하거나, 혹은 교류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독자적인 완성품에서도 '아, 그렇구나'에서 끝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공동작업의 경우에는 그런 충돌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게다가 글 하나를 쓰려고 투자하는 시간 외에 공동작업자와 수없이 많은 생각들을 오가야 하니, 이 때문에 작업시간이 부쩍 늘어나게 됩니다. 그 자체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나도 많이 소모됩니다.
3. 조율과 정리의 어려움
의견 교환을 하더라도 결국 합의점을 도출하게 되긴 합니다. 다만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작업 진척이 많이 어렵습니다. 게다가, 이것이 정말 좋은 것인지 좋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 판가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세계관을 만들 때 소위 말하는 '죽이 맞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만드는 건 쉽습니다만 결과물이 그 사람들만 좋아하는 것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많은 머리가 모인다고 남들이 좋아하는 것이 나오진 않는다는 것이죠.
다른 방식, 그러니까 무작정 세계관이나 설정을 쌓아놓고 그 중에 좋은 걸 추려내어 투입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허나 이런 건 자칫 세계관만 쌓아놓고 그걸 기반으로 완성품을 내놓는 과정에서 흐지브지해질 수도 있습니다. 세계관 쌓다보면 재미있고 즐겁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글'을 원하지 세계관을 원하는 건 아닌 법입니다. 결국 글을 쓸 세계관을 왕창 쌓아놓고, 정작 써야 할 걸 어떻게 해야 하나 가닥을 잡지 못해 무너지는 경우도 생깁니다.
4. 일관성
솔직히 전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머리가 하나 늘어나면 생각이 하나 더 생깁니다. 릴레이 소설 같은 경우에는 글쓴이마다의 개성까지 더해져서 연재분량을 쓴 사람마다의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데, 글의 흐름을 망칠 가능성이 큽니다. 글 쓰는 스타일이 비슷해도 이런 차이는 미묘하게 드러나고, 큰 차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 때문에, 공동집필이나 릴레이 소설은 생각보다 더욱 어려운 작업이 됩니다. 물론 작업 자체에서 배우는 점이 많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러 사람과의 작업'에서 얻는 노하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상 매력은 있으나, 그리 큰 실속은 얻는 건 아니지요. 흥미나 이벤트로서 가볍게 참여하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누군가와 작정하고 그런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선... 글쎄요, 차라리 저같으면 분업을 택할 것 같습니다. 세계관이나 설정을 짜는 이를 두고, 그걸 글로 표현하는 이를 두는 쪽으로 말이지요.
p.s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작업이나 릴레이를 쓸 기회가 생긴다면, 전 이런 룰을 두고 진행하겠습니다.
1. 참가자는 각자 세계관에서 '절대자'의 역할을 정한다.
2. 참가자는 각자 한 번씩 세계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규칙을 정한다. 단, 이 규칙은 다른 참가자 다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2. 참가자들은 각자 한 번씩 다른 참가자의 규칙을 수정하거나, 혹은 패널티를 부여할 수 있다.
3. 2,3번의 과정에서 각 참가자들은 서로의 규칙에 대해 협상할 권리를 지닌다. 이 협상은 제 3의 참가자들 다수의 동의를 얻어야만 효력이 생긴다.
4. 2,3,4번의 과정을 거친 설정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설정으로 확립된다. 4번으로 완성된 설정은 다시 2,3,4번의 과정을 거쳐 변동이 가능하나, 설정 자체를 없애거나 무력화시킬 수는 없으며, 이를 상쇄할만한 새로운 설정의 도입에 관해선 2,3,4번의 과정을 거쳐 논의한다.
이런 규칙을 집어넣으면, 각 참가자는 세계관 설정 때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구현해낼 수 있고, 다른 참가자가 구현한 규칙에 패널티나 방해요소를 설정할 수 있겠지요. 물론 마음에 안 드는 설정에 대해선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견제도 가능하기 때문에 작업자들 간의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역으로 그런 와중에 생기는 분쟁요소가 설정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지요.
이렇게 되면 적당한 균형을 가지면서도 혼자만의 생각을 강요하지 못하는 세계관이 완성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은, '절대자'들이 서로를 끊임없이 견제하고 훼방을 놓는 가운데, 그 사이에 끼인 주인공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불쌍하지만 보기엔 즐거운 글이 나올 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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