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전에 카이첼님의 은빛 어비스 감상을 보다가 댓글에 누가 철학드립이 너무 많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뭐 개인적으로 카이첼님 소설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것때문에 울컥해서 쓰는건 아니고요, 흔히들 판타지/무협 소설들을 보면 자신만의 '철학'적인 내용들이 있잖습니까?
그모든걸 다 '철학드립'이랍시고 싫어하기보다는, 그게 진정한 '철학'이냐, 아니면 흔히들 말하는 '있는 척'하는 것이냐, 이것을 판단해야된다고 봅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판타지소설에서 많이들 철학이랍시고 쓰는 내용들을 보면, 말을 비비꼬아서 신비한 척, 멋있는 척은 다내는데 나중에 다 읽고보면 실질적인 내용은 거의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다죠.
뭐 보통 이런 소설들은 한번 보고 바로 기억에서 지우는 시간때우기용 소설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런 식의 '철학드립'은 저도 굉장히(!) 싫어합니다. 별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도 없으면서 재미는 재미대로 깍아먹더라고, 다 읽고나서 정말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문제는 이런 양판소류의 싸구려 철학이 아닌 진짜 무언가가 들어있는 소설들입니다. 좋은 예로 이영도씨의 '드래곤 라자'가 있겠네요. '드래곤 라자'는 진짜 재미는 재미대로, 철학은 철학대로, 진짜 굉장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처음 '드래곤 라자'를 봤을 때는 철학이니 뭐니 하는 생각은 하나도 안했습니다. 말그대로 '재밌어서' 봤죠. 뭐 그때 아직 중학교시절이니 그랬지만서도요. 근데 나중에 몇년지나고 다시 한번 읽게되니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핸드레이크의 목표, 루트에리노가 핸드레이크를 배신한 원인, 후치가 블랙 드래곤을 떠나보넨 이유 등등, 처음봤을 때는 아무 의미없던 장면들이 정말 뜻깊은 장면이 되서 다가오더군요.
자, 그럼 이제 문제는 과연 이 '철학'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의미로 다가갈 것인가? 소설에 어떠한 철학이 담겨있다면 그건 분명 작가가 의도해서 쓴 것이겠죠. 그러나 그 '철학'이 독자들 모두에게 똑같이 받아들여질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본 '드래곤 라자'와 커서 본 '드래곤 라자'가 완전히 다른 소설이였듯이, 분명 똑같은 글을 보더라도 서로 같은 메시지를 받는 것은 아닌 것이죠. 그리고 또 반대로, 분명 한 작가가 쓴 글을 읽었는데, 그 작가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을 읽어낼 수도 있는 거죠.
흔한 예로 '에반게리온'이 있죠. (유명한 애니메이션이랍니다) 누구는 정말 엄청난 철학적 작품으로 받아들이고 누구는 단순한 시간풀이용 만화로 보죠. 저는 개인적으로 나름 그속에 의미를 담고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문제는, 과연 제작자가 그러한 철학들을 담아내고자 했겠습니까? 만약 아니라고 하면, 그저 재미를 위해 이런 저런 요소들을 덛붙혀놓고 보니 어떤 사람들이 철학적인 메시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사람들이 '에반게리온'을 봄으로써 얻은 메시지들은 과연 거짓된 것일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만화로 보여지더라도, 그 사람들에게는 분명 어떠한 '철학'을 담은 작품이 되는 겁니다.
소설이라는 어떠한 '매체'를 읽으면서 그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입니다. 아무리 작가가 철학적인 내용을 소설 속에 집어넣으려했다해도, 독자가 그것을 읽어내지 못하면 결국 단순한 '철학 드립'이 될 뿐입니다. 반대로,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독자가 어떠한 철학을 소설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다면, 그 독자에게 그 소설은 분명 어떠한 철학을 담고있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카이첼님의 소설들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학문으로써의 철학에 대한 어느 정도 기본지식이 필요하다 라는 거죠. 뭐 저도 고등학교때 살짝 배운 인식론에 이번학기에 듣는 교양용 철학수업이 다지만.... 아무튼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알고있는 만큼 보인다'랍니다. 소설 속에서 철학을 읽어내는 주체가 자신인 만큼, 그 자신이 받아들이는 내용에 대해 개방적인가, 알고있는 인문학적인 지식이 얼마나 되는가, 등등 여러가지 요소에 따라서 받아드릴 수 있는 내용의 양이 달라지겠죠. 제가 중학교에 있었을 때, 정말 철없고 중2병환자였을 때, 이때 저에게 있어서 아무리 좋은 문학 소설도 그저 단순한 시간풀이용 양판소와 다를 바가 없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름대로 책을 볼때마다 그 속에서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꼭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더라도,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얻어내는가, 그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 카이첼님의 '희망을 위한 찬가'를 보면서 저는 타인에게 둘러싸인 지독한 외로움, 그러나 포기할 수ㅤㅇㅏㅄ는 한줄기 가느다란 희망, '누구도 나자신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고 앞으로도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적은 확률이라도 가능할 지도 모르는한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제가 '희망찬'에서 얻은 '철학'이랍니다. 분명 다르게 느끼신 분들도 많을 것이고 작가님도 꼭 이걸 의도해 쓰신 것은 아니시겠지만, 제가 그렇게 느낀 이상 저에게있어 '희망찬'의 철학은 이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고요.
철학적인 내용이 나온다고 모두다 '철학 드립'이라 치부하기에는 좋은 소설이 너무 많죠. 만약 알아보기 힘든 철학적이다 싶은 내용이 나온다면 재미없다고 던져버릴 것이 아닌, 내가 무엇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아직 내 시야가 너무 좁아서 빤히 보이는 철학이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시는 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이영도씨의 '퓨쳐워커'라고 많이들 재미없다고 던져버린 작품이 하나 있죠. 저도 처음에는 다 읽고 그저 '재미없다'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그 재미없던 책이 너무나 재밌어지더군요.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저 재미로만 본다면 한번 다 읽고 '아 재밌었다'하고 그냥 잊혀지겠죠. 그러나 책을 읽으므로서 자신에게 중요한 무엇을 알게 되었다, 라고 하면 말그대로 정신적으로 한단계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무협에서 비급보고 깨달음을 얻는 순간 한단계 더 강해지는 것 처럼요.
그렇다고 소설을 들고 연구하라는 것까지는 아니고요, 어짜피 즐기자고 보는 소설이지 않습니까? 단지 다른 방식으로 책을 즐기는 법을 알아줬으면 해서요. 가끔 소설을 다 읽고 그안에서 읽어낸 철학이 주는 감동을 느껴보신 적 없으십니까? 그리고 그 철학들이 나 자신을 회의주의적인 태도에서 벗어나게하고, 도저히 알 수 없는 삶의 이유가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주는 듯한 느낌, 이런 것들이 저에게 소설을 떼어놓을 수 없게 하네요.
너무 좋은 소설들을 보고 철학드립이니 어쩌니 하면서 안보는 분들을 보니 너무 안타까워서 주저리주저리 적게ㅤㄷㅚㅆ습니다. 쓰고보니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지;; 아무튼 긴글 읽어줘서 감사합니다.
P.S.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문법이라던지 틀린게 있으면 양해바랍니다. 아버지께 메일보내면 꼭 문법 다 틀렸다고 혼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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