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시길.
상대의 작은 아픔도 알아챌 수 있는 섬세함을 주시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인내를 주시길.
2000년 8월 15일 처음 열었던 홈페이지 소개란에 위 글을 올린 지 9년이 되어간다. 그리고 지금 보면 난 그리 ‘섬세한’ 사람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섬세한’ 감각을 가지기 보단 ‘기하학’의 눈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 많이 비평하고 비관하고. 자크 프레베르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라는 당돌함이 좋고, 니체의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라는 문장을 더 좋아하니 말이다.
결국 그런거다. ‘섬세한’ 감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이정도 글밖에 쓸 수 없다.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정말 지독할 정도로 남과 다르기 위해 안달이 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남들의 눈 또한 무던히도 의식했던 것이다. 실로 스트레스의 범벅이었다.
정말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다무라 카프카군,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 일곱 살 소년 따위와는 전혀 0.1퍼센트의 닮은 점도 없었다. 살찐 외모와 내성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성격은 학교생활의 끔찍한 걸림돌이었다.
가끔은 정말 학교란 곳이 자고 일어나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었지만, 결국 등교에 1분도 늦어본 적이라곤 없는 소심한 학생일 뿐이었고, ‘스즈미야 하루히’처럼 외계인, 초능력자, 미래에서 온 사람과 함께 학교를 폭파시키는 일 따위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대신 혼자 공상하길 좋아하는 음울한 소년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한 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몰두하고, 적당히 TV를 보고, 몇 안 되는 친구들을 만나는 삶.
결국 그래도 세상이란 공평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난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무난한 대학에 들어가 무난한 생활을... 했다면 글을 쓴다랍시고 이렇게 좋은 봄 날씨에 방구석에 쳐박혀서 부귀영화를 바라며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턴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의 머리위엔 악마가 자리 잡고 있어서 결코 순탄한 길로는 인도를 해주지 않는 것 같았다. 비관적이고 비평적인 내 성격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판타지 소설을 쓰겠다’라고 마음먹었던 것이 몇 살 때였더라? 이젠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 전에 아마도 게임과 소설책 속의 공상을 글로 옮겨보기로 마음먹은 시기가 있었겠지.
그리고 처음 백지의 ‘한글’ 프로그램을 띄워놓고 고민하던 막막함.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쨌건 써보자.’
이것이 결국은 글쟁이로 이끌었다.
글쟁이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들을 하면서, 예를 들면 전차를 몰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일 따윈 글쟁이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 않은가? 아니면 부대에 들어오는 책들을 일일이 검사하면서 “이건 불건전한 사상이 있어서 반입이 안돼. 압수다!” 이런 대사 따위나 읊조리는 사람이!
적어도 그런 일 따위를 하기 때문에 판타지 정도밖에 못쓰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지만.
첫 글의 제목을 ‘프레아니아’라고 대충 얼렁뚱땅 지어놓고 인터넷에 연재를 시작했던 건 홈페이지를 만든 시기와 비슷한 시기였다.
대충 칼을 든 검맛(sword master라고도 한다) 여자가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이야기 따위를 썼었다. 그리고 그 주위엔 으레 같이 행패를 부리기 좋아하며 소란을 몰고 다니는 미소년 엘프라던가 의문의 소녀 따위가 있었다.
당시엔 이런 글 따위가 대세이자 로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그랬었지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림도 그렸었다.
내가 쓴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어설픈 그림으로 그려보고, 홈페이지에도 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의문인 점은 그 시절 그렇게 많았던 개인 홈페이지들, 그러니까 글이나 그림 따위를 소개하던 것들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가버렸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많던 소설 연재 사이트들 조차 이젠 찾아볼 수도 없다.
‘작가넷’, ‘포에티카’, ‘라니안’... 사라져간 무수한 소설연재 사이트들과 함께, 그렇게 인터넷 소설의 전성기도 지나가버렸고... 난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
2005년이던가? 어느 해인가, 그러니까 내가 군대라는 곳을 가기 직전의 어느 시기이니까... 메일이 날아왔다.
하이홈 무료 개인홈페이지가 종료됩니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홈페이지를 계속 살려두려면 돈을 내놓으라는 거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홈페이지를 운용할 만한 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현실은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오래간만에 들어간 인터넷에서 나는 내 홈페이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의 어린시절 글과 그림들도 같이... 그렇게 인터넷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사막 같다. 의미 없는 정보들이 넘쳐나는 인터넷 공간은 사막같이 삭막하다.
그리고... 난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 막심의 엑소더스를 들으며. 세상 사람들의 99퍼센트가 난독증이 되는 그날까지도 난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판타지가 되었건, 라이트 노벨이 되었건, 사람들이 문학이라 칭송하는 그 무엇이 되었건 간에...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