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부디 날 아르세네스님에게로 데려다 줘."]
DK.엘리야의 판타지 소설 '검은 성전'은 기발하거나 파격적인 설정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성전(聖典)의 문구로 시작되는 이 장편 소설은 어디까지나 정통적이고 진지하며, 익히 존재했던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천계의 신 세르테스, 하계의 신 아르세네스, 그리고 중간계의 신인 유라신. 이 세 신들에 의해 창조되고 운영되는 세계 속에서 인간과 천사, 악마들과 신들이 함께 배우로서 나섭니다. 여행을 떠난 인간이나 유람을 나선 강자가 아닌, 세상의 법칙과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 사이의 관계에 얽매인 존재들이 이 소설의 주역입니다.
아름답고 잔혹한 마신 아르세네스는 그녀가 창조한 기사인 베른 하이젤카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경애해야 할 고귀한 숙녀입니다. 아름답지 않고 악몽에 시달리는 공주 헤르미아는 소문의 용병대장 켈 브라이언트가 선인인지 악인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도 끌리는 감정을 숨기지 못합니다. 아르세네스는 인간을 멸하려 하고, 세르테스는 아르세네스와 적대합니다.
그러나 독자의 눈 앞에 주역과 조연은 존재할지언정, 이들 중 악역과 선역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현재 그는 동료들에게 정찰을 나간다고 둘러대고 성을 빠져나왔고, 예전과 같이 지금으로서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비가 만들어내는 끝을 모르는 소음 속에서 그는 철저히 자신을 비웃었다. 그런 자신을 자신은, 그리고 저 '혼돈의 성전(聖殿)'에 남아있는 동료들은 용서할 수 있을까.
사내의 시선이 성전의 반대편을 향했다. 그곳에는 어둠만이 있었다. 꼭 그러한 것만 같았다. 실핏줄처럼 갈라진 푸른색의 번개가 하늘을 타고 달리기 전까지는.
안개처럼 가라앉은 어둠의 뒤편에는 십만의 군대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십만 개의 눈동자와 그들의 병기가 어둠 속에 녹아 별빛처럼 번뜩인다. 이들이 바로 아르세네스가 사라진 하계를 완전히 접수하기 위해 마제(魔帝) 안다이로스Andairoth가 보낸 어비스 레젼Abyss Legion.]
소설은 장엄하며, 웅장합니다. 신과 신의 사자, 마신과 마신의 사자들의 대립은 전투를 넘어선 전쟁에 이릅니다. 수많은 존재들과 기묘한 전사들이 맞부딪치고, 검과 창을 휘두르며, 서로 부수고 베며 불태웁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묘사는 읽는 사람을 압도하며, 그 행동 하나하나에 전율하게 합니다. 내리는 빗방울의 차가움과 튀기는 피의 뜨거움, 짓뭉개진 진흙과 거칠게 내쉬는 숨이 섞여 나는 냄새, 함성과 괴성과 호흡 소리까지 잡힐 듯이 다가오는 전쟁의 모습은 급작스럽게 등장하며, 또 그만큼 홀연히 사라집니다.
[“파티에 가실 거죠, 스캇 대장.”
“뭣 하러. 여자 꼬시게? 사람들 북적이는 거는 기사직 수여식만으로도 충분해.”]
'검은 성전' 에는 농담 따먹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해 이 글 안에 존재하는 유머들은 작중 인물들이 구사하는 농담을 서술하는 데 지나지 않으며, 이 글의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 냉정하고 차갑습니다.
이 글을 지칭하는 데 가장 가까운 색은 '묵색'입니다. 소설 전체에 있어 어둠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밝은 빛이나 새하얀 옷, 떠들썩한 연회장마저 인물들의 이성적이고 가라앉은 심리를 대비하기 위해 사용된 것처럼 보일 만큼 이질적인 느낌을 풍깁니다. 선신과 마신은 둘 다 아름답고 광휘 속에 존재하며 정상적인 대화를 하는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엮인 갈등과 세계를 관통하는 배경은 황혼만큼이나 어둡고 비오는 하늘만큼이나 침잠해 있습니다. 칠흑 같은 밤이나 절망의 구렁텅이 같은 암흑이 아닌, 막 밤이 찾아온 시간의 어두움처럼 그 대비가 극명하게 느껴지는 소설 속의 분위기는 진지하고 무겁습니다.
[헤르미아는 그 때의 극적이고도 드라마틱했던 순간을 회상하고 있었다. 죽음이 그녀를 향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던 순간 그가 나타났고 그녀를 구해냈다. 그가 내뱉었던 추상같은 말들이 한 때는 상처로 느껴졌으나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말들은 아마도 그녀 자신을 지키기 위해였으리라. 그리고 만약 그녀가 그리 생각지 않는다면 그녀는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버텨낼 용기가 없기도 했다.
“내게 와줘요, 켈…….”
테이블 위로 엎드린 그녀는 눈물 위로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검은 성전'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잔혹하고도 냉혹하며, 치밀하게 현실적이어서 메마른 듯 하면서도 이 소설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을 사랑하는 피조물의 감정은 절제된 자제 속에서 독백만으로도 진하게 그 존재를 증명하고, 하계-인간계-천계를 잇는 인물들의 행동은 누가 인간이고 누가 신인지, 누가 마신의 가신이며 누가 천신의 천사인지 그 경계를 모호하게 하며 인물들의 감정을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으로 끌어당겨 놓아 줍니다.
이미 진 해의 어스름 속에 서서 깔리는 어둠을 느끼며,
등불이 빛나는 주점을 떠나 흐린 구름 아래 몇몇 별만이 갈 곳을 가리키는 길을 향해 거침 없이 발을 내딛는 소설.
진지하며, 우아하고, 냉정하며, 애절한 '검은 성전'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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