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저는 얼마나 강한 존재입니까?”
내가 묻자, 아버지는 짤막하게 답했다.
“적어도 인간들보단 강하다.”
자신감에 가득 찬 아버지의 말을 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전설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조금의 설렘도 가지고 있던 내게 아버지가 말했다.
“죄악의 붉은 달 아래 태어난 여자아이를 죽여줬으면 한다. 그 일은 중간대륙에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희생이지만 절대 좋은 일만은 아니다. 악역을 맡아줄 수 있겠느냐?”
죄악의 붉은 달! 인간이 행해왔던 모든 죄를 머금고 떠오른 달에 태어난 여자아이들은 핌불베트르의 씨앗이라 하여 필사(必死)가 원칙이다. 나는 아버지의 부탁에 따라 붉은 달에 태어난 여자아이를 죽이길 생업으로 삼았고,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전 이미 죽어있는걸요.”
순순히 죽음을 받아드리는 그녀는 소원 한 가지가 있다 말했다. 친부모를 한번만 만나고 싶다고 구슬피 울던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 비극으로 끝날 사랑의 시작이었다.
“너의 이름은?”
“에, 엠블라예요.”
“나의 이름은, 스콜이다.”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하루하루의 삶에 감사하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난 그녀를 지켜주었고, 그녀는 내게 감미로운 노래로 답했다. 그렇게 조금씩 이상한 감정들이 쌓여갔다.
‘엠블라. 너에게 남은 한 달을 주마. 후회 없이 행복해라.’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었다. 깊어져 버린 그녀에 대한 마음에, 악마들을 모두 죽일 것이라는 다짐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 ‘벽’을 만났다.
“호오! 저의 공격을 막아내는 인간이 있다니 상당히 놀랐습니다! 혹시 인간이 아닙니까?”
투명한 검을 쥔 그 녀석의 힘은 나조차도 당해내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무력한 나를 감싸며 그녀는 절규했다.
“콜록! 저, 절 죽이시면 되잖아요. 콜록‥‥‥, 절 죽이시러 오신 거잖아요. 제발, 스콜님은 살려주시고, 저, 저를 죽여주세요.”
“엠블라, 물러서! 난 죽지 않는다! 그리고 너 역시 죽게 내버려두지 않아!”
그녀를 지킬 수 없는 나에게 너무도 화가 났고, 삶을 포기하려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아직, 아직은 아니었다. 될 수만 있다면 좀더, 좀 더 지켜주고 싶다.
“미안하다. 내가 약해서 널 지켜주지 못했지만 다음생애에서는 꼭 너를 지켜줄게.”
그러나 같이 죽자는 말에 그녀는 죄송하다는 말만 남기고 검에 몸을 맡겨버렸다. 신조차 죽이는 마검에 꿰뚫린 그녀는 쓰러졌고, 내 마음도 허물어졌다. 육신은 대검에 대신 꿰뚫린 것처럼 갈기갈기 찢겨진 듯 했고, 정신은 하얗게 타 재가 되어 날아갔다.
“이제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습니다.”
난 오늘 정했다. 이 녀석을 반드시 죽이기로. 그것이 언제가 됐든 변치 않을 것이다.
“너의 이름은?”
“저의 이름은 여명을 쫒는 늑대 하티로 하겠습니다.”
기억해두마. 네 녀석은 꼭 내 손으로 죽여주겠다.
55년 전의 일들이 생생하게 재생됐다. 당장이라도 잡힐 듯한 뚜렷한 기억. 지금에 와버려서는 내겐 그녀와의 과거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살아있어. 행복한 결말로 나는 그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을 거야.”
한설보다 차갑고 사막의 모래 바람보다 메마른 내게 ‘사랑’의 반 토막을 알려준 그녀의 빈자리를 회상하며 그녀를 만났던 무덤가로 갔다.
이제 알 것 같아. 너의 이름이 새겨진 쇠붙이를 불에 잘 달궈서 그걸로 내 심장을 지지는 거야. 그렇게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가슴에 지고 살아가는 것, 그게 사랑이지? 엠블라‥‥‥.
그리고,
오랜 수면 끝에 일어난 내게 주어진 사명. 그것은 어떤 악마의 유혹보다 달콤한 대가를 내세웠다.
“황혼을 볼 수 있을 거네.”
결국 라그나로크는 일어난다. 지상에 남아있는 재앙의 씨앗은 질긴 생명력을 내비쳤다. 붉은 달은 떠버렸고, 지옥의 문은 열렸다.
힘과 힘, 광기와 광기가 맞물린 지상 아래, 악마들이 난입하고‥‥‥ 중간대륙의 치열한 격전의 장은 그 서막을 올린다.
이번에는 지킨다. 날카롭고 거친 마음을 가다듬어 나 자신에게 맹세한다.
너를 수호(守護)한다!
그것이 내가 무덤에서 돌아온 유일한 이유다!
김백호 [아스크ASK]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