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참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바다에서 배를 타고 낚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읽었던 쥘 베른의 ‘해저2만리’ 덕분이었습니다. 외갓집이 남해의 외진 섬이라 자주 바다에 갈 기회가 있었던 저로서는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지요. 돌이켜보면 확실히 쥘 베른의 소설을 접한 이후부터 바다라는 대상이 조금 굴절되어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는 남해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역과 비린내만 있는 게 아니라 신나는 모험도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학생이 되어서는 바다를 무대로 모험을 펼칠 수 있는 게임에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대항해시대’는 몇몇 다른 게임과 함께 제 청소년기를 장식한 멋진 게임이었지요. ‘알 베자스’ 캐릭터를 골라 교역을 하고, 또 여러 위기를 극복하고 여동생을 찾아가는 그의 모험은 약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앞으로 생생하게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카탈리나의 테마곡은 아직도 제 플레이리스트에 들어 있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바다는 늘 저에게 있어 모험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이상하게도 바다를 무대로 삼은 소설을 찾기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간 뒤 우연히 접할 수 있었던 것이 ‘마스터 앤드 커맨더’라는 영화였고, 이 영화의 원작인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오브리-머투린 시리즈’를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입체적인 캐릭터와 속도감 있는 서사는 적어도 책을 쥔 순간만큼은 영국 해군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할 만큼의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겨울, 이곳 문피아에서 우연히 문백경님의 ‘인어는 가을에 죽다’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완결된 지 4년이 지난 작품. 그럼에도 가끔씩 연재한담에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라면 분명 어떤 대단한 매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프롤로그를 읽게 된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1000자도 채 되지 않는 분량에 소름이 돋았던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큰 기대를 품고 소년의 모험에 슬쩍 끼어들어 보았습니다.
‘인어는 가을에 죽다’의 주인공은 평범했던 소년입니다. 그런데 소년의 모험을 따라가다 보니, 그 느낌이 바다를 무대로 삼은 다른 소설들과는 조금, 때로는 아주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모험을 펼치며 보물을 찾아내고,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나가는 다른 작품들과 비슷한 노정을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이면에 소년이 처한 운명적인 상황들이 빈틈없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운명에 휘말려 체념하고 좌절하는, 하지만 끝내 두 발로 다시 일어서려는 소년의 모습에서 어떤 동질감, 혹은 친밀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걸까’하는 막연한 궁금증을 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인어를 본 적도, 카르멘 선장을 만난 적도, 인버카길 호에 오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나중에 이 소설을 비평할 기회가 있어서 내용을 정리하던 중 깨닫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섬사람에 불과했던 소년의 모습과 그가 운명을 대하는 과정은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놀랍도록 닮아있었다는 것. 뜻하지 않게 바다로 나가게 된 소년과, 마찬가지로 뜻하지 않게 세상에 나선 저의 모습이 겹쳐지고, 훌쩍 자란 호아킨이 그만큼 훌쩍 자란 운명을 마주해야 했던 것처럼 청년기에 접어든 저 또한 때론 포기하고 좌절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겁니다. 단 64편을 거쳐 오며 말입니다.
읽은 지 반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는 소설입니다. 개인적인 편견이겠지만, 읽고 그대로 소비되는 소설보다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소설이 좋습니다. 시야를 넓혀 뭔가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이면 더 좋습니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저는 인어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은 덕분에, 가을 어딘가에 인어가 살아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기대를 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 소설을 여러분들에게 추천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차례입니다. 여러분들의 바다는 어떻습니까?
http://blog.munpia.com/bm50th/novel/2490
Comment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