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 [무정십삼월1,2], 2004, 로크미디어
이 글은 감상문이다.
정말 오랜만에 글을 읽고나서 감상문을 쓰고 싶어졌다.
뭐 내가 대단히 높은 기준을 갖고 감상문을 쓰는 건 아니다.
다만 나도 글쟁이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 글에 뭐라 하는 게 별로 쉽지 않
다. (글쓰믄서 하는 집탐은 그래서 내겐 굉장히 부담이었다. 별로 안 믿어
주지만.)
이 기분으론 감상문을 쓰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할 것 같다.
이런 기분은 참 오랜만이다.
연참하고 내 글 걱정하느라 머리가 꽉 차 있지만 이런 기분이 되면 할
수 없다.
하고 싶으면 난 한다.
'가인(佳人)'이란 아리따운 닉을 고무림에서 발견한 것은 내가 고무림에
서 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될 때였다. 2002년 11월쯤일테니 내가 그의 존
재를 안 지 어느덧 2년째 되간다.
특이한 사내였다.
무협단편을 여럿 썼고 무림동이나 무림향에서도 활동한 골수강호인이라
는 걸 소문에 들었다. 처음 그와 글을 섞은 곳이 아마 논검비무란이었던
가?
무협에 대해, 그리고 소설에 대해 꽤나 완고한 자기고집을 갖고 있는,
그래서 호감이 물씬 가는-난 좀 고집이 센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배려가 없는 사람은 싫어한다. 둘다 충족시키는 사람이 좀처럼 없는데 재
미있게도 내가 고무림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개가 그런 이들이었다. 그러니
난 계속 고무림 죽돌이다.- 인물이었다.
호감이 가는 인물이 쓴 단편소설.
당근 읽는다.
그의 글들을 읽으며 난 냄새를 맡았다.
그는 슬픈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 불덩이를 간직한 사람이었다.
카인의 표지가 박힌 사람은 똑같은 표지를 단 사람을 금세 알아본다던
가? 난 그의 단편을 보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그의 글을 즐겼
다.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두고 사는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사람이 곁에
있다고 생각해 보라.
별로 반갑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멀리 하자니 영 거시기하다.
결국 만나게 된다.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답답해져도 결국은 계속 만나게 된다.
속으로 씨발이라고 욕을 해도 결국 그렇게 정이 든다.
내게 그의 글은 그런 것이었다.
그는 내 글에 대한 감상을 남겨준 적도 있었고 직접 평을 해 준 적도
있다. 처음 써 본 소설형식의 글에 자상히 평을 해 준 것도 그였고 어쩌다
출판이 되 버린 내 글을 집중탐구란에 찾아와 신나게 해부 해주기도 했다.
좀 아팠다. -_- 그래도 모니터로는 글을 보기 진짜 싫어하는 그가 와준
게 무지 기뻤다.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 그는 내게 최초의 소설 선생님이다.
고무림에서 "무정십삼월"이 한참 뜰 때 난 처음의 10회 정도만 보고 더
보지 않았다. 책으로 읽고 싶었다. 그리고 방금 전 다 읽었다.
내가 아는 그는 내가 감히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아득한 고수이다.
소설 습작을 시작한 지도 오래되었고 무협단편을 쓰며 무협의 감을 익
힌 지도 굉장히 오래되었다.
이번에 처음 출판한 신인이기는 하지만 통신이나 인터넷을 즐기는 고수
독자들은 누구나 아는 숨은 고수 가인. 그는 신인이라고 부르기엔 좀 애매
한 중고신인쯤 되는 사람이다.
내가 그를 잘 알고 그와 흉허물없는 사이기 때문에 인사조로 쓰는 감상
문은 절대 아니다.
내 성격에 그런 짓 안 하리란 건 그도 알 거다.
그는 글로 날 감동시켰다.
그 뿐이다.
세상이 막 격변하던 어떤 시기에 이십대의 언저리를 통과한 사람들이
있다. 그 때는 정말 1년 사이에 세상이 휙휙 잘도 변했다.
그들 중 남들이 한창 싸우고 난 다음에 어떤 싸움의 대열에 합류한 사
람들이 있다.
호시절은 이미 가고 남은 싸움은 점점 흙탕물같은 늪으로 되어가는 그
런 상황에서 싸움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
한참 때 싸우던 사람들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 겨우 싸움 시작하고는 끝
까지 이 악물고 싸움했던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굉장히 과격했다.
전 시대의 전통을 진리라 굳게 믿었기에 같은 나이의 젊은이들이 젊음
의 낭만을 향유할 때, 무슨 고시대의 무사들처럼 전사의 마인드로 살았던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시대에 배신당했다.
격랑처럼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그들은 자연스레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변화에 몸을 맡기고 재빨리 변신에 성공한 일부의 그들은 세상 속에 편
입되었다.
그런데 어디나 꼭 바보들이 있다.
바보가 달리 바보일까?
남들은 모두 아니라 할 때도 바보는 맞다고 한다.
그 바보들은 끝까지 싸움을 계속했다.
그러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지친 분노를 곱씹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의 가슴 속에는 이따시만한 불덩이 하나씩 간직하고 산다.
그들은 가끔 테러리스트를 꿈꾼다.
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들이 주류가 되 있는 세상을 그들은 용납하
지 못한다.
뉴스를 보다가 자주 화를 낸다.
변절자가 득세한 것을 보면 밥 먹은 게 얹힌다.
그것을 관조하며 살기엔 그들의 나이가 아직 젊다.
피는 뜨겁고 배도 고프다.
젠장이다.
"무정십삼월"은 그들이 보면 울컥 치밀어 오를 거다.
꼭 그 시대에 이십 대를 보낸 이들이 아니더라도 이 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성을 녹아내는 데 성공한 글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글은 그 무거운 주제에도 불과하고 가끔씩 사람을 무쟈게 웃
긴다. 슬쩍 애잔한 느낌도 주고 슬쩍 웃기게도 만들고 무엇보다 무협 특유
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통쾌함이 살아 있다.
하지만 글에 대한 비평을 하려고 이 글 쓰는 건 아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런 분석적 사고 때문이 아니다.
북명대.
나는 "무정십삼월"을 읽으며 그 시대를 살았던 바보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 일부는 정말 처절히 죽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들의 피냄새를 시시때때로 맡는다.
그럴 땐, 정말 돌아버린다.
다 죽이고 싶다.
그런데, "무정십삼월"에는 정말 다 죽이는 주인공이 나온다.
장화월이다.
그가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인다고 명분 없다 비판할 식자들도 있을 것
이다.
그런 방식의 복수에는 동의할 수 없다 비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머리로는 그런 비판에 동의할 지도 모른다.
물론 빡빡 우겨 그를 정당화할 논리를 동원하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니다.
하지만 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동지를 잃어 본 사람은 그 참담함을 잊지 못한다.
그 때의 살기를 잊지 못한다.
그건 논리 이전의 문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난 소설 속 장화월에게 갈채를 보낸다.
앞에 있으면 심진 몰래 틀림없이 술 한 병 사 줄 것이다.
그가 칼을 들고 나서면 쫄래쫄래 구경갈 것이다.
정말 한 칼에 박살내고 싶은 더러운 것들이 너무 많다.
배신자들이, 변절자들이, 청산되어야 할 것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걸 보
면 다 죽이고 싶을 때가 많다.
물론 현실에선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 사회는 나름대로 룰이 있고 그 좆만한 룰이란 것 땜에 그들은 배 두
드려 잘만 살아간다.
그걸 한 바탕 칼춤으로 모두 날려버리는 걸 보고 싶은가?
그럼, "무정십삼월"을 보라.
소주 한 병 병나발 불며 "씨팔! 잘 죽였어!" 할 거다.
물론, 모두가 나처럼 과격한 감성으로 이 글을 대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이 글은 내가 읽은 "무정십삼월"의 감상이다.
다른 사람이 어찌 읽었건 내 알 바 아니다.
장화월.
다 죽여라!!
그리고.
넌 꼭 행복하게 살아라!!
p.s : 나오는 노래는 "무정십삼월"의 주제가라고도 할 수 있는 안치환님의
5집 중 '한다'라는 노래이다. 무정십삼월을 이 노래와 함께 읽어보라.
미쳐버린다. 글 올릴 때는 못찾았는데, 이 글 보신 한 분이 쪽지보내
주셨다. 그도 "무정십삼월"의 팬인가 부다. 으하하하!
볼륨을 최대한 높이고 들어보시길. 그래야 이 노래의 저력을 알 수 있
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