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고서로 의술과 무술을 연마하셨다라!!
놀랍군요, 무협소설서 보던 설정을 현실에서 보다니 ......
고학에, 사시 1차 합격에
무술에 의술에, 게다가 자신의 능력을 개인 차원의 보신을 넘어
빈민운동에 몸을 바치셨다니 ... 이런 분이 계신줄은 첨 알았습니다.
아쉬운 것은 포털 사진이라 안 뜰텐데 ......
그래도 이 분의 일생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답니다. "형" 이란 제목으로.
무등산 타잔이라 불리운 사내가 있었다. 무등산 자락 밑에서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막노동과 철공소일 등을 하며 사법시험 준비를 하던 22살의 젊은 청년이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사내가 바로 박흥숙으로 광주 일대에서 무등산 타잔이라 불렸다.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했고 언론 역시 사건의 엽기성에만 초점을 맞춰 박흥숙을 한낱 살인마 취급했다. 하지만 당시 광주에서는 빈민의 영웅으로, 현대판 임꺽정으로 인식되었으며 각계각층의 구명운동이 전개됐다.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크리스마스 날을 기해 서둘러 형을 집행했다.
박흥숙은 전남 영광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국민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6학년 때 형을 잃는다. 결국 가난에 쫓겨 무등산으로 입산하게 된다. 박흥숙은 중학교를 수석으로 합격하고 사법고시 1차까지 독학으로 통과한 수재였다. 그가 무등산 타잔이라 불린 까닭은 뛰어난 무술실력 때문이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고서(古書)로 무술과 의술을 연마해 무등산 타잔 또는 무등산 이소룡이라 불렸다. 가난했던 박흥숙은 무등산의 빈민촌에 살면서 그곳에 야학을 차려 그곳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으며 늘 빈민들 편에서 섰다. 철거민들은 1975년부터 시의 철거명령을 받았고 1976년에는 시에서 그곳 주택 중 몇 개를 강제철거하기도 했다. 하나 달리 주거대책이 없었던 철거민들은 제자리에 다시 무허가 토담집을 짓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1977년 4월 20일 덕산골. 무허가건물을 철거하던 철거반원들이 또 다시 들이닥치고 이번에는 토담집을 헐고 재건축을 못하도록 불을 지르는 사태가 발생한다. 박흥숙은 환자들이 살고 있는 집까지 헐어내는 철거반원들을 포박, 체포하여 인질을 삼아 시당국과 협상하고자 하였으나, 철거반원들이 저항하는 과정에서 그만 그들을 살해하고 만다. 9월 24일 박흥숙은 광주지법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박흥숙은 항소를 포기하지만 주위사람들이 구명 운동을 벌여 9월 30일 항소한다. 그러나 1978년 2월 18일 광주고등법원은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고 1심과 같은 사형을 5월 8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사형이 확정됐다. 빈민을 위해 앞장섰던 박흥숙은 1980년 12월 25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현재 무등산 타잔 박흥숙은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민주화운동의 인물로 선정해 민주화운동 사전에 수록하였으며, 이 드라마틱한 숨겨진 사건은 백상시네마에서 영화로 제작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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