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중국의 도량형을 1척(尺)은 30.3cm, 1장(丈)은 3.03m라는 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시대와 지역 그리고 용동에 따라 서로 달랐다.
우리나라에서 지역마다 마지기의 평수가 서로 다르고 돼지고기와 상추의 한 근(斤)이 서로 다른 경우와 비슷한 것이다.
이러한 서로 다른 도량형을 통일시킨 사람은 진시황이었다.
전국 시대를 종식시킨 진시황은, 도법(度法), 형석(衡石), 장척(丈尺)을 하나로 하고 수레는 바퀴 사이의 거리를 같게 하며, 문서에 쓰여지는 문자를 통일하는 등의 정책을 추진하고 아울러 도량형을 통일하는 조칙(詔則)을 공포하고 표준기(標準器)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반포했다고 한다.
그때 그가 정한 1척(尺)은 현대의 미터법으로 보면 23cm이고 이 기준이 한나라 때
까지 내려왔다. <삼국지>에 나오는 팔 척 장신이니,구 척 거한이니 하는 사내들을 알고보면 2m 40cm나 2m 70cm의 거인들이 아니라 1m 80cm와 2m정도의 그냥
키가 큰사람들인 것이다,
이 아담한 척도가 이후 점점 커져서 명나라 말에 오면 1척이 32cm 이상이라는 정도까지 증가하는데, 그 이유는 재미있게도 세금 때문이었다.
중국의 조세제도는 실물지조(實物地租), 즉 베나 쌀 같은 실물을 받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같은 베 10자[尺]를 세금으포 걷어도 23cm가 기준이면 230cm밖에 안되지만 32cm가 기준이면 320cm를 걷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무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곡물, 포목 등 현물을 증심으로 하는 납세제도하에서 봉건지배층은 도량형의 규격을 확대시킴으로써 그 차액만큼의 이득을 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의 사실은 척도의 분화라는 기현상을 가져왔다.
경제활동에 사용되는 규격이야 권력자들의 이해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것이지만.천문관측에 사용되는 규격이나 토목사업에 관련된 규격은 쉽게 변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문척(天文尺)·영조척(營造尺)등 경제활동과 분화된 척도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일레로 명나라 때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천문기구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척도인 천문척(天文尺)은 진시황 이후로 크게 변함이 없어 24.5이지만 건축용 자인 영조척(營造尺)은 32cm, 재봉용(裁縫用) 자, 즉 포목을 잴 때 쓰는 자인 재의척(裁衣尺)은 34cm였다.
각 단위의 상호관계를 살펴보면
길이의 단위는 분(分)·촌(寸)·척(尺)·장(丈)·인(引)으로 커진다. 뒤에 나온 것이 앞 단위의 열 배이다,
용적의 단위는 약·합(合)·승(升)·두(斗)·곡(斛)으로 커진다. 역시 뒤가 앞의 열 배.
무게의 단위는 조금 달라서 24수(銖)가 1냥( ), 16냥이 1근(斤), 30근이 1균(鈞),4균이 1석(石)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일상 생활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무게의 단위가 획일적인 체계화에 대해 가장 큰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길이
1장(丈) : 3.03m
1척(尺) : 30.3cm--한 자[尺]라고 부를 때도 같다.
1촌(寸) : 3.03cm--한 치(寸)라고 부를 때도 같다.
1리(里) : 약 400m
무게
1근(斤) :16냥인 600g으로 계산하는 경우와 100돈인 375g으로 계산하는 경우가 있다.
시간
한 시진(時辰) : 2시간
일 각(刻) : 15분
한 식경(食頃) : 30분--밥 한끼 먹을 시간이라고도 한다.
일 다경(茶頃) : 15분--차 한잔 마실 시간.
중국의 화폐와 물가
은자 열 냥이라면 일반농민의 일 년치 수입 이상이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고대 중국 준추전국(春秋戰國)에서 한초(漢初)까지는 일반 거래엔 동전이, 상업적 거래엔 황금이 사용되었는데 이때 황금과 구리의 가치비율이 1:130 정도였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싼 값의 금이었다, 고대 중국에 황금이 어느 정도로 풍부했나를 알수 있다. 동전은 나라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제작되다가 진의 통일 이후 등근 모양에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반량전으로 그 형태가 통일된다. 이것은 오수전으로 불리며 후대에까지 유통된다.
그러나 그토록 픗부하던 황금도 서역과의 교역이 시작되며 급격히 유출되어 후한(後漢)으로 들어오면 거의 현물경제로 바뀐다.
우리가 흔히 보는 0.1냥짜리 동전은 당나라의 개통원보가 시작이며 송나라 때에 급격히 보급된다. 송나라 일대에 보급된 동전만 약 2억 관, 즉 2000억 개의 동전이 보급된다. *2 당시의 물가 상황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당현종의 개원 년간에 쌀 1석비단 1필이 동전 200개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번영을 나타내기 위해 들먹인 수치이고 또 송대에는 급격히 보급된 화폐로 인해 이보다는 횔씬 물가가 높았을 것이다. 사실 이 정도로 막대한 양의 화폐가 민간에 보급되고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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