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에 앞서:
자그마치 한국 현대문학사의 가장 저명한 시인 중 한 분인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의 시 ‘자화상’의 한 구절을 무단 도용하여 제목으로 삼는 만행을 저질러버렸습니다만, 이 글의 진정한 정체는 논점 불분명/논지 불확실/기타 등등 많은 것이 결핍된 잡문에 불과합니다. 따라서―뻔뻔스러운 부탁이긴 합니다만―이야기가 두서없이 진행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1.
누군가가 저에게 글쓰기의 첫 단계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공부’라고 답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부란, 가장 기본적인 습작―글쓰기를 익히는 데는 누가 뭐래도 ‘일단 많이 써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에서부터 이야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분석/정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 전부를 포괄하는 의미입니다.
장르문학 사이트, 혹은 인터넷 동호회에서 글쓰기를 시작하시는 분들 가운데 의외로 이 ‘공부’라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단언컨대 ‘공부’가 없이는 좋은 글이 나올 수 없습니다.
2.
지금까지 문피아를 비롯한 유명 장르문학 사이트들과, 웹상의 여러 소설 동호회를 돌아다니며 많은 분들의 글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여러 권의 작품을 저술하신 유명한 작가님들의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뛰어난 소설도 있었고, 아마추어임에도 가히 천부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 없는 멋진 소설을 쓰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독특한 아이디어가 신선함을 안겨주는 작품도, 작자 분의 노력이 행간에 배어 나오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굉장히 즐겁고 뜻 깊은 경험이었지요.
하지만 글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켜주는 멋진 작품들이 있었는가 하면, 질Quality적으로 미흡하여 안타까움마저 안겨주는 글도 있었습니다. 바로 ‘공부가 부족한 글’이었습니다. 글에서 ‘공부의 부족’이 드러나는 몇 가지 유형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3.
첫째는 단순히 정보가 부족한 경우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검(劍:판타지소설에서는 숏 소드, 롱 소드, 바스타드 소드 기타 등등)이라고 하면 일개 보병들이 사용하는 것까지 ‘모양단조(영어로 Pattern-Welded라 하던가요)’니 ‘담금질’이니 하는 엄청난 수공을 요하는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으로 묘사하시는 분들이 상당수 계십니다.
[뱀 발 하나: 담금질이 무슨 ‘엄청난 수공’ 씩이나 되느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법하여 몇 줄 적습니다. 저희 조부님은 한때 대장간 일을 하셨고, 덕분에 저는 조부님이 담금질 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담금질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의 ‘달군 쇳덩이를 물속에 집어넣어 빠르게 냉각시키는’ 단순한 공정이 아니라, 도구의 어느 부분을 얼마만큼 물에 닿게 해야 하는지를 손대중 눈대중으로 세심히 조절해야 하는, 나름 굉장히 품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대단한 물건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부엌칼이나 낫, 호미 정도의 생활용품을 만드는 시골 대장간의 일이 이럴진대 본격적인 무기를 생산하는 공방의 일은 어떨까요? 실제 자료를 찾아보면 담금질을 할 때 사용하는 물의 성질, 물과의 접촉 시간, 접촉한 부분의 넓이 따위에 의해 완성된 검의 품질이 꽤나 달라진다고 합니다.]
이 정도 오류는 조금 께름칙하기는 해도, 어찌어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배경이 분명 삼국시대 말~고려시대 중후반쯤으로 설정되어 있는 글에 난데없이 조총을 든 왜구들이 등장하는, 역사적 고증이라는 것 자체를 가볍게 ‘x무시’하는 경우가 되어 버리면, 울화통이 치밀어오를 지경입니다.
4.
둘째는 습작이 부족한 경우입니다. 소재가 좋고, 아이디어도 참신하고, 자료조사와 기타 고증에도 상당히 충실한데, 막상 글을 읽어보면 행간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고 뭔가 껄끄러운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있지요. 이런 경우 저자 분이 글쓰기에 충분한 열의를 가지고 계시는 경우―소재, 아이디어, 시대고증이 모두 합격점이라고 전제했습니다―가 많아, 글이 종반을 향해 나아갈수록 필력이 일취월장함을 독자들에게 몸소 체험케 해 주시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뱀 발 둘: 이런 글 올리는 주제에 굉장히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도 이따금 습작의 부족을 절감하고는 합니다(…).]
5.
셋째는 정말 최악의 경우인데, ‘모든 부분의 공부가 부족한 경우’입니다. 필력도 엉망, 자료조사도 엉망, 모든 것이 엉망입니다. 정말 글을 우습게 보는 건지, 독자의 입장에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글을 쓰지 마!’ 하고 외쳐주고 싶기까지 합니다.
6.
저는 공부의 부족으로 끔찍한 실패를 맛본 글쟁이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저 자신의 이야기니까요.
제가 처음 소설 형식의 글(…워낙 대단한 분들의 대단한 소설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제 글을 차마 ‘소설’이라고 부를 용기가 안 납니다, 아직까지도)을 끼적이기 시작한 건 대략 6~7년 전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데프콘 시리즈를 비롯한 일단의 전쟁소설들을 접하고서, 나도 이런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단 기존의 소설을 가지고 대충 얼개와 대사만 바꾸어 비슷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으로 습작을 시작했습니다만, 그런 식의 글은 ‘내가 하고 싶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까닭에 금세 지루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만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는 충동을 못 이겨 충분한 습작을 쌓기도 전에 모 사이트에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지금과는 다른 닉네임을 쓰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계기였던 만큼 저의 첫 번째 연재작은―당연하게도―전쟁소설이었는데, 지금으로서는 도대체 무슨 용기―아마 객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로 타인에게 공개할 생각을 했을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질 정도로 수준이 형편없었습니다. 문장 자체가 두서없이 난삽한 것은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내용 자체가 엉망진창이었던 걸요. 무기체계에 대한 충분한 지식 없이, 국제정치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이 다짜고짜 ‘전쟁소설’이라는 장르의 글쓰기에 덤벼들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저는 첫 번째 글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때부터 글쓰기를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7.
이렇게 공부를 우습게보다가 실패해버린 형편없는 글쟁이가 있는가 하면, 뛰어난 공부를 자랑하시며 훌륭한 작품을 저술하시는 멋진 작가님들도 계십니다.
당장 생각나는 대로 두 가지 작품만 언급해 보겠습니다.
*카이첼님의 ‘희망을 위한 찬가’: 경이와 경탄의 경지를 넘어, 실로 ‘충격과 공포’를 느꼈던 작품입니다. 세상에,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시간 이후로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철학자들의 익숙한―동시에 제발 피하고 싶은―이름을 문피아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진陳의 구성과 발현을 칸트의 인식론으로 설명하고, 비트겐슈타인의 목소리로 언어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어지간한 철학 책보다 훨씬 이해가 쉽더군요. 되먹지 못한 철학 입문서 나부랭이(‘일주일 만에 읽는…’ 어쩌고 하는 그런 책들)를 들고 씨름하던 시절에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서툰 몇 줄의 글로 찬사를 더하기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훌륭한 글입니다.
[뱀 발 셋: 본격적으로 철학적인 개념을 도입하여 소설을 쓴다는 건 어지간한 공부가 쌓이지 않는다면 감히 시도해보기도 힘들뿐더러, 어찌어찌 실행 단계에 이르러 결과물을 만들어내게 되더라도 글이 매우 어색해지거나―쓸데없는 부분에서까지 철학을 들먹이는 현학적인 글, 혹은 무슨 철학입문서를 베낀 듯한 글이 있지요―, 글쓴이 자신의 철학에 대한 얕은 이해를 드러내―철학적인 개념을 오용하는 경우가 대표 격 일겁니다―는 그야말로 ‘자폭용 글’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카이첼님은 그런 ‘뭔가 아는 척 하려고 애는 쓰는데 참 별 볼일 없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글과 질적으로 다른 소설을 쓰셨지요. 이 대목에서 기립박수.]
*김선민님의 ‘루갈레아 네트워크’: 타 사이트의 작품을 추천하는 것이 연재한담란의 규정에 어긋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추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만가지 정이 다 떨어진 조아라를 아직까지 떠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는 소설입니다. 장르는 게임소설입니다만, 실제로는 정통SF에 가깝습니다. 공리주의의 이상 ‘최대다수가 최대 행복을 누리는 세계’가 마침내 전 지구적 가상현실시스템에 의해 실현된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정신을 가상현실 세계에 봉인해버린 지구와, 이에 반기를 든 화성의 전쟁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뱀 발 넷: 조아라에서 김선민님의 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ROKA라는 소설이 나옵니다. 이것도 굉장히 훌륭한 소설입니다만, 스스로가 어지간히 대단한 심력心力을 가진 사람이라고 자신하실 수 없다면 읽지 않으시는 편을 추천합니다. 90편 정도가 연재된 뒤 연중(리메이크 예정이라고는 하지만, 이 분의 연재 주기가 워낙 극악한지라 ‘루갈레아 네트워크’가 과연 저 늙어 죽기 전에 완결될지조차 자신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되어버렸거든요. 더불어 ‘舊 루갈레아’라는 소설도 있습니다만, 이건 단순한 게임소설입니다(그래도 재미있습니다). 이것의 리메이크 작이 현재의 ‘루갈레아 네트워크’입니다.]
8.
이제부터는 제가 감히 별 볼일 없는 잡문의 제목으로 서정주 선생의 시구를 함부로 가져오는 불학무식한 짓거리를 저지른 이유에 대한 해명 비슷한 것을 해 보려 합니다.
지금에야 ‘글을 쓸 때는 공부를 해야 하니 어쩌느니’ 하며 제가 무슨 잘난 놈이라도 된 양 떠들고 있습니다만, 사실 저의 정체는 ‘놀고, 먹고, 마시는 것 좋아하는 별 볼일 없는 돌대가리’에 불과합니다(연재한담란에 지금까지 올린 잡설 다섯 편중에 ‘술’을 주제로 한 것이 자그마치 세 편입니다. 하하…). 그나마 제가 뭔가에 대해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글쓰기의 힘입니다.
읽을 수는 있되―일단 한글로 썼으니까요―도저히 뜻을 파악할 수 없었던 멍청한 글자의 나열이 그나마 ‘잡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글쓰기에 취미를 붙이면서부터 써 온 수 메가바이트 분량의 습작 덕분이었습니다.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떻게 하면 보다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 문학 등을 망라하는 인문과학이야말로 ‘인류 문화의 총화’라는 말이 어울리는 학문이지요.
[뱀 발 다섯: 혹시 판타지소설을 쓰시면서 정치, 행정, 사회제도, 법률 등의 설정을 어떻게 할까 고민되시는 분이 계시다면,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가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과거 한반도에서 실시되었던 거의 모든 제도가 그 개괄적인 사항과 장단점의 분석을 곁들여 서술되어 있으니까요.]
과학에 대한 관심은 군사과학 분야에서 시작되어 SF장르(…라고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정통 SF와는 거리가 멉니다)의 습작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꽃피었습니다. 최소한 글 속에서 버섯구름을 피워 올리려면 E=mc^2하나쯤 그럴싸하게 지껄일 수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어쨌거나 이런 경위로 ‘천하의 무식하던 놈’은 그나마 교양인의 탈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9.
이것으로 논점 불분명/논지 불확실/기타 등등의 많은 것이 결핍된 저의 잡설을 끝맺어 볼까 합니다. 금쪽같은 주말 저녁 시간을 쪼개어 잡문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즐거운 주말 저녁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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