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에 관한 논란은 문피아에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재점화되는 단골 소재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고증이라는 단어가 문피아에서는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아주 많은 것 같습니다.
고증考證
예전에 있던 사물들의 시대, 가치, 내용 따위를 옛 문헌이나 물건에 기초하여 증거를 세워이론적으로 밝힘.
사전을 그대로 긁어왔습니다.
다른 뜻은 없는 단어입니다.
실제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둔 소설(박경리의 ‘토지’ 등), 역사소설(‘초한지’ 등), 팩션(‘왕의 남자’ 등)에 들이댈 잣대이지 판타지나 SF에 쓸 말이 전혀 아닙니다.
중세풍 판타지의 세계관에 실제 중세시대를 고증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거죠.
고증 문제로 골치를 썩이시는 분들 중 상당수는 사실 자기 소설의 ‘논리적인 정합성’을 신경 쓰고 계시는 거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쉬운 말도 있을 텐데 굳이 ‘논리적인 정합성’이라고 말했느냐하면, 장르문학에서 고민해야 할 것은 ‘팩트’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논리적인’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물리법칙을 무시해도 괜찮습니다.
단, 일관적으로 무시해야 합니다.
이건 작가가 새로운 물리법칙을 창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러기 위해서 실험을 통한 검증같은 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특히 SF 소설에서 자주 불거지는데요, 하드 SF일수록 과학적인 지식과 이론이 더 엄밀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건 대단한 착각입니다.
하드 SF 걸작 중의 걸작인 그렉 이건의 ‘쿼런틴’도 양자역학을 엄밀하게 해석한 결과물은 아닙니다.
오히려 미시 세계의 법칙을 거시 세계로 무리하게 확장하면서 빈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소설입니다.
테드 창 소설 중에서도 과학적인 오류를 하나도 찾아낼 수 없는 소설이 오히려 한 편도 없을 정도입니다.
하드 SF라는 건, 과학을 소재로 하되 ‘그런데 만일 이 세상이 (알려진 사실과 달리) 이러이러하다면?’이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런 상상을 통해서 우리의 사고를 확장하고 우리의 현주소, 특히 우리의 사고 자체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드는 철학소설이나 다름없습니다.
소프트 SF니, 스페이스오페라니 하는 용어를 구분해가면서, 이미 정립된 과학 이론을 어디까지 엄밀하게 적용하고 설명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걸작 ‘은하영웅전설’의 주인공들은 우주공간에서도 중력의 혜택을 누립니다.
초광속 통신이라는 것도 사용하는데, 이건 어떤 것도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 위배됩니다.
같은 이유로 초광속 비행도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웜홀이라는 걸 도입하는 소설이 많은데, 웜홀은 초광속 비행만큼이나 치명적인 오류들을 뒤집어 써야만 소설에 도입이 가능합니다.
스타워즈의 광선검은 처음 등장했을 때 분명히 순수한 레이저 광선이라는 설정이었습니다.
빛이라는 얘기입니다.
빛이 무한히 뻗어나가지 않고 무언가에 잡혀 있습니다.
빛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건 블랙홀 뿐이죠.
제다이들은 허리에 블랙홀을 차고 다니는 겁니다.
다른 건 빨아들이지 않고 딱 레이저 광선을 그 정도 형태로만 잡아두는 블랙홀을요.
우주 공간에서는 원심력을 이용해서 중력을 만듭니다.
은하영웅전설에는 그런 설정이 없죠.
하지만, 원심력을 이용해서 중력을 만드는 건 현재 인류의 과학수준입니다.
양 웬리의 시대에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지 말라는 법도 없겠죠.
다른 기술이 발전한 속도와 중력 관련 기술이 발전한 속도가 균형이 좀 안 맞아 보이지만, 그게 ‘논리적인 정합성’을 해칠 정도는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얘기죠.
스타워즈의 광선검도 처음 등장한 이후로 그게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려는 시도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레이저가 아니라 어떤 에너지 덩어리다, 알고봤더니 레이저로도 가능하더라 등등.
지금은 어떤 결론이 났는지 모르겠습니디만, 어쨌거나 (문피아 용어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창조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로렌스 M. 크라우스의 “스타트렉의 물리학”을 보면 예전 스타트렉 TV 시리즈가 방영되던 당시 방송 다음 날에는 물리학자들이 모여서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가능하기는 한지 토론하는 게 일이었다고 합니다.
방송을 까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걸 실제로 구현하는 방법이 있는지 등을 이야기하는 지적 유희였죠.
실제로 그래서 발전한 기술이 대단히 많다고 합니다.
저자 크라우스는 수업 시간에도 스타트렉으로 강의했는데요, 어떤 학생은 ‘빛은 모든 방향으로 확산하므로 레이저 광선이 그런 식으로 눈에 보일 수가 없다’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그런 수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스타트렉은 물리학자들이, 물리학도들이 가장 사랑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용어에 대해서 한 말씀만 덧붙이겠습니다.
과학에서는 용어의 의미조차도 시대에 따라 변해갑니다.
라부아지에가 산소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연소’란 물체에서 플로지스톤이라는 성분이 빠져나가는 현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A라는 용어가 B라는 현상을 지칭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SF의 시대배경에서도 그 용어가 그 현상을 지칭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만일 수백 수천 년이 흘렀는데도 그런 세부적인 부분이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면 그건 인류의 지성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비극인 거죠.
결론은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주로 이야기하는 장르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팩트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느냐 뿐이라는 얘기입니다.
사소한 지식에 집착할수록 아는 게 적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쉬울 뿐입니다.
소설을 쓸 때나 읽을 때나 좀 더 큰 틀에서 넓은 마음을 가지자는 이야기였는데 지금 좀 바쁜 상황이라서 얘기가 잘 전달됐는지 모르겠네요.
소설은 뭐니뭐니해도 “등장인물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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