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명
아래 악인 선호에 대한 제 주장은 소설이 이러해야 한다란 것이 아니라, 잘 팔리는 소설들을 분석한 결과를 보고드리는 것뿐입니다. A->B라고 해서 B->A가 되는 건 아닙니다. 작가분들은 이점을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베스트 글/유명 출판작들 중에 위의 요소들이 적재적소에 분배되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더군요. 상품성 있는 글을 쓰길 원하는 작가분들에게 기초가 되는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상품 소설을 쓰는 분들이 우주를 뚫고 신을 죽이고 그 자리에 주인공을 올려놓고선 8살 짜리 아이들이 할 법한 유치한 대화를 해서 독자를 잃는 그런 슬픈 일만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밑의 긴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2. 현상
한담을 두달간 지켜본 결과 끊임없이 독자들의 불평글이 올라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분석해본 결과 대다수의 독자들이 안타까워 하는 점이 주로 제대로 된 ‘상품소설’이 없다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글들에서 가끔 순수문학을 바라는 것과 같은 개연성, 리얼리티, 삶에 대한 성찰 등을 바란다는 불평도 가끔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또 그런 글들 때문에 인기에 목매는 분들은 분명 상품성 있는 걸 쓰고 싶어할 텐데 그런 독자들의 불평글 때문에 잘못된 생각을 가지지 않을까 했습니다.
한국의 장르 독자들 대다수가 원하는 건 하늘을 뚫지 않는 선에서 짜릿하게 롤러코스터를 태워줄 소설이지 느긋한 청룡열차를 타고 차를 마시며 산과 들을 보면서 잃어버린 삶의 가치를 되찾는 성찰을 원하는 게 아니거든요. 한국 시장은 얼불노조차 드라마가 반영되기 전까지 끔찍한 판매량에 좌절했던 곳입니다. 초판 2000부 중에 1500부가 반품되었죠. 출판사에선 실패한 작품이라 판단하고 출간 정지를 결정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 드라마(=작가의 인지도)니까요.
그러니 작품 소설을 쓰는 분들이 독자분들의 안타까워하는 점을 보고 혹시나 '수요'를 착각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한담글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나는 이런 소설을 원한다!”의 대부분은 결코 문학성 있는 소설을 바란다는 뜻이 아니란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드라마가 방영되지 않는 얼불노를 원하는 독자들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물론 매니아들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있습니다. 대신 많지는 않죠.
서로 각자 원하는 걸 쓰되,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 지 명확히 알고 작가도 무엇을 쓰려는 지 명확히 알면 시비가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수요와 공급을 이어주는 게 문학의 중계 사이트인 문피아의 역할이라 생각하고요. 위와 같은 불평들이 질릴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건 브로커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문피아에 어떤 독자들이 찾아오는지는 제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중엔 작품성을 원하는 분들도 있을 테고 상품을 원하는 분도 있을 테고 그 중간의 회색지대를 원하는 분들도 있겠죠. 작가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2. 건의
1) 현재 문피아의 시스템
어린 동생들에게 드래곤라자와 룬의 아이들-심지어 문학계에서 상품에 불과하다고 엄청나게 까였던-이 재미있다고 추천해주었다가 “내가 왜 그딴 걸 봐야 해?”라는 말을 듣는 시대가 왔죠. 그리고 그런 동생들은 두툼한 용돈으로 백수에 불과한 저보다 훨씬 많은 골드를 씁니다.
그래서인지 현재 문피아의 중계 시스템은 오로지 인기와 성실성만에 의해 작품이 노출되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인기는 주로 몰입구조(감정이입+만족)에 의해 보상되며 성실도는 꾸준하고 빠른 연재로 보상받습니다. 즉, 현재 문피아의 시스템은 ‘대리만족에 뛰어난 빠른 연재의 글’이 가장 완벽히 보상받는 시스템이란 것이죠.
사이트 자체의 수익성을 위해선 소수의 인기있는 유료 작품에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긴 할 겁니다. 현재 아주 잘 나가고 있다고 듣기도 했고요.
반면, 다른 독자들도 엄연히 있긴 합니다. 소수일 테지만, 분명 기존의 일탈, 힐링, 대리만족에 벗어나려는 분들 말입니다.
저도 한 사람의 독자로서 책을 아주 좋아하고 제가 원하는 걸 읽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을 찾으려면 판타지 카테고리 내의 수천 개의 무료 소설들을, 오로지 알파벳 순이나 연재 순으로 나열된 목록에서 제목과 줄거리 소개만 보고 찍고 들어가야만 하죠. 이런 구조에선 초기 몇화를 보고 모든 걸 결정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담글에 고마운 분들이 좋은 작품들을 건져내주지만, 한담글을 언제나 모니터링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묻히는 것들도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2) 클릭과 10회까지 독서의 인내심 기회비용
얼마전 한담에서 곧 출간될 작품 <잉여남작공>의 재발님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는 멋진 글을 적어준 적이 있었죠. 하지만, 그건 한담글에서 독자에게 호소해봐야 별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 문피아의 구조 자체에서 나타날수밖에 없는 현상이니까요.
작품성을 바라는 독자에겐 양판적 요소가 지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상품성을 바라는 독자에게도 문학적 요소는 지뢰입니다. 매번 제목을 클릭하고 10화까지 읽고 ‘으으. 지뢰 밟았네.’ 하는 거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볍게 기분 전환하러 왔는데 읽을 게 없다는 게 독자분들의 주 불평 아니었습니까? 아니면 제대로 된 글을 찾기 힘들고 양판 뿐이라는 불평이던가요.”
저도 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써준 작가분을 위해 10회까진 꼭 보리라 생각했지만, 요즘은 저도 점차 1화만 보고 판단해버리는 경향이 생기더군요.
이런 상황에선 작가분들이 뭔가 해보려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겠죠. 선작/추천/조회수 뚝뚝 떨어져나가는 걸 보면 의욕이 상실될 수밖에 없고 결국 독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선 클리셰를 써서 이목을 집중시킨 후 욕망으로 롤로코스터를 태울 수밖에 없죠.
그러다 보니 ‘재미’가 최고다라는 말이 자주 보입니다. 네. 재미가 없다면 아예 안 보니까요. 그래서 첫 부분에 곁가지를 모조리 잘라내야만 하고, 그걸 쳐내다보니 결국 떡밥이 사라지며 무리한 전개로 개연성이 폭파되어 갈수록 지루해지는 ‘양산형 판타지’가 되는 거죠. 그리고 이러한 연재 사이트들의 선작/조회수 시스템 속에서 그런 상품들만이 선호되고 대량으로 재생산되여 오늘날 모습에 이른 거라 추측합니다.
3) 그래서 제가 건의하고 싶은 것은 다음 4가지 입니다.
가. 독자들의 선호도 시스템을 평가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재미나 작품성 개연성 등의 요소들로요. 10화까지 읽어보고 판단하는 노고를 미리 지뢰지대에 들어가 본 독자들의 판단을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이건 순수히 독자의 입장에서 건의하는 겁니다. 제가 쓰는 글이 그렇게 평가받는다 생각하면 좀 끔찍하기도 하네요. 작가분들의 의견이 중요할 거 같습니다.
나. 댓글 말고 전체 작품에 대한 서평을 쓸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상평이나 비평등을 작품 서재에서 쉽게 볼 수 있도록요. 현재는 작가분들이 일일이 링크해주시는데 그러지 않으시는 작가분이 훨씬 많더군요.
그리고 공개적인 게시판에 쓰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제 감상이 그 작품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작품 내에서 간단히 서평을 남기고자 하는 분들도 꽤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더라고요. 감상평에 글을 적자니 조금 부끄럽고 작가분들 서재라면 얼마든지 제 감상을 적고 싶어하는 독자 1인입니다.
그리고 그런 서평들이 첫 독자들이 작품에 진입 여부를 판단하는 데 어느 정도 참조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 카테고리 또한 다양화하여 이미 장르적으로 정착된 클리셰들을 반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게임과 대체 역사라는 장르도 그렇게 생겨난 분류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귀환물, 성장물, 영지물나 환생, 회귀, 슈퍼먼치킨 깽판물, 갑질물, 모험물, 로맨스 달달물, 스포츠물 등 분류를 조금 더 세분화하지 못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동생들은 어떤 날은 귀환물이 땡긴다 어떤 날은 영지물이 땡긴다 어떤 날은 겜판이다 이런 식으로 책을 보더군요. 내용의 신선도 여부는 별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자기 친구들도 그렇다더군요. 다양한 내용들을 담은 건 기존 그대로 두면 되겠죠. 반면 특화할 사람들은 특화의 이득을 누리게 해주면 될 것입니다.
라. 일반 연재의 분량 기준을 높였으면 합니다. 제대로 된 작품들이 습작들에 묻히니까요. 특히 장편의 경우에는요.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장편의 경우 30만 자 정도는 되어야 일반 연재로 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돈 되어야 작품의 질과 방향성에 대해 충분히 독자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아니면 연재란을 하나 더 만들던가요. 10만자 쓰다가 연중할 거면 뭐하러 일반연재 신청을 하는지... 연중이 좀 오래 걸리는 거도 자연으로 강등되게 했으면 좋겠고.
이건 연재 사이트 자체가 생소한 뭣도 모르는 뉴비의 눈먼 판단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7만자가 되었겠죠?
3. 마치며
지금의 문피아 시스템은 아마 오랜 고민 끝에 기획된 것일 겁니다. 그걸 뭣도 모르는 초짜가 함부로 입을 대는 걸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유료 소설에 집중하는 것이 단기적인 사이트의 이익을 창출하는 덴 크게 도움이 될 테지만, 결국 유료 소설이란 황금알은 무료 소설들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글을 쓰려는 사람은 넘쳐납니다. 돈을 쓰려는 사람은 얼마 없고요. 굳이 그런 노력 굳이 안 해도 상품성 있는 수많은 글들이 밑에서 치고 올라오겠죠. 돈을 쓰려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한국 사회에선 그 누구도 그걸 비난할 사람 없어요.
하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디 더 늦기 전에 닭의 배를 째버리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른 곳 같으면 이런 건의도 안 합니다. 끊임없이 소통하고 더 나아지려고 몸부림치는 문피아니까 믿고 적어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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