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차원용병
작가 : 탱알(금호)
(조금 스포 있습니다)
이차원 용병 11권을 방금 다 읽었다.
책을 덮으며 마침내 내내 차마 뱉지 못했던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훌륭하다.
삼년 전이었던가?
누군가 페이크 히어로라는 작품이 매우 재밌다는 감상글을 올렸다.
네이버였나, 감상란이었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글 수준이 이대로만 유지된다면 한국 판타지계에 새로운 탑클래스 될 거라는 격찬만은 기억난다.
신인에게 이 정도의 격찬이라?
정말 흔하게 볼 수 없는 대단한 작가가 출현했나보구나 하며 구해본 페이크 히어로는...
솔직히 말하자면 거북했다.
문체나 구성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인 특유의 어색함은 있었지만 당시 범람하던 양산형 판타지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모욕이라고 할 만했으니까.
다만 거북했다고 표현한 것은 전체적으로 작품 내 캐릭터들이 내가 공감하기 힘들 정도의 감정 과잉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왜 이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화내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혹은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행동을 해야만 했나?
이런 생각이 자꾸 드니 작품에 제대로 몰입할 수가 없어 2권까지 읽고 말았다.
물론 내 기대치가 너무나 높았던 것도 큰 마이너스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기대를 접고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던 와중에 이차원 용병이 나왔다.
처음 이차원 용병을 보며 느낀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고작 2년만에 감정선을 이렇게 세련되게 다룰 줄 알게 되다니...
어딘가 투박하고 서툴렀던 솜씨가 명장의 그것처럼 매끄럽고 세련되게 변했다.
감정이 폭풍처럼 치달아야 할 때와 잠깐 멈춰서 숨을 고를 때, 마지막 아슬아슬하게 한발자국 더 나가야 할 때를 탱알 작가가 너무나 잘 안다.
그로 인해 공감하기 어려웠던 캐릭터들이 이제 너무 공감되서 문제다.
독자가 작품 내 캐릭터에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라...
훌륭하다고 표현해도 되지 않겠는가?
이차원 용병은 서른살의 무기력한 백수 강철호가, 폭력적이고 노가다를 뛰지만 가족만 보고 죽자사자 일하는 아버지와 몇년째 병원에서 콤마상태인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밤거리로 내몰아 사채를 갚으려 하는 여동생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영팔이라는 정체불명의 회사에 팔아 넘기는 이야기다.
비참한가?
그렇다.
비참하다. 레벨을 올리기 위해, 가난의 굴레를 벗기 위해, 어머니를 회복시키기 위해 생판 남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것도 비참하게 죽은 인물들의 인생들만.
소년 용병이 되어 처음으로 적병을 죽이고 트라우마에 달달 떨어야 한다.
신념이 곧고 강건하지만 모시는 주군에게 배신당해 버려진 기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아버지 같았던 스승이 가족의 원수가 되어버린 기구한 암살자가 되어야 한다.
영주가 버리고 도망친 성의 비루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수천 오크 군대의 손아귀에서 구할 장교가 되어야 한다.
온갖 비겁하고 잔인하며 더러운 수를 써서 가문을 몰락시킨 원수에게 복수하려는 악덕상인이 되어야 한다.
몰락한 귀족집안의 여기사(기사도의 화신같은)의 마음을 얻으려는 못생기고 말더듬는 요리사가 되어야 한다.
아니다.
비참하지 않다.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 여동생을 위해,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해 강철호는 남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무너져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룸살롱에 나가려는 여동생에게 거친 세상의 풍파를 막아주는 오빠가 되어 주었다.
거액의 사채에 묶여 있는 현실속에 절망한 아버지에게 빚을 갚을 수 있는 든든한 능력있는 장남이 되어 주었다.
몇년을 콤마상태로 의식을 잃고 있는 어머니에게 자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전심을 다하는 아들이 되어 주었다.
자신으로 인해 강철호의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는 죄책감에 빠져있는 친구를 위해 분노를 이겨내고 마침내 술 한잔으로 용서하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가족과 친구만 그로 인해 좋은 결과를 얻었을까?
그가 역할(play)을 맡았던 비참하게 죽었던 이들에게도 강철호는 그들이 원했던 소원 이상의 것을 들어 주었다.
소년 용병은 돈을 얻었다.
배신당한 기사는 배신한 주군의 숨겨진 검이 되었다.
암살자는 스승에게 죽음보다 더한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장교는 마침내 오크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악덕상인은 복수를 이뤘으나 동시에 관용을 배웠다.
말더듬이 요리사는 여기사의 날개를 꺾지 않고도 그녀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명언도 있지마는
강철호의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나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그는 대단한 힘을 가진것도 아니고 엄청난 용기를 지닌 것도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의 평범한 30대에 불과하다. 강철호가 가진 특기도 애매하게 고통공감과 언변... 그렇다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그런 평범한 캐릭터를 가지고 이만큼의 스토리를 끌어내는 거 자체가 작가의 역량을 보여준다.
나는 이제 늦게나마 탱알작가가 한국판타지계의 탑클래스임을 인정하고 찬사를 보낸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강철호도 훌륭하지만 탱알은 더 훌륭하다.
ps. 11권이 나올때까지 아직도 강철호 렙 10밖에 안됬다. 강철호 레벨이 100 될때까지 이 책이 조기종결 하는 일 없이 쭉쭉쭉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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