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안의 폐허에 잠들어 있는 나그네의 이야기
- 만약 당신이 사막을 여행하다가 하늘처럼 맑고 바다처럼 깊은 눈빛을 가진 사내가 혼
자서 방황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오늘의 이 이야기를 기억하기 바란다.
취생몽사(醉生夢死).
'삶에 취하여 죽음을 꿈꾸는'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이야기 속을 서성이고 있다.
나의 두 눈은 지금, 지나가 버린 시절을 찾아 끝없이 이어진 사막의 모래밭을 묵묵히 걸
어가는 한 나그네의 텅 빈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나그네의 뒷모습은 점점 작아져가고 어느새 검어진 하늘위로 소리도 없이 떠오른 몇 개의
별과 야윈 달 하나가 그의 뒷모습을 사막의 모래속에 희석시킨다.
물기 없는 바람 한 줄기 바람이 목 쉰 울음소리를 흘리며 그가 남긴 발자국을 더듬는데,
그의 뒷모습은 하염없이 멀어지기만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머리카락 한 올마저도 사막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리고..더듬을 자취
잃은 바람은 크게 한 바퀴 허공을 맴돌다가 내 가슴속으로 가만히 스며든다.
그리고 내 안의 오래된 폐허, 그 녹슬고 닫힌 대문을 조심스레 두드린다.
- 저기 멀어져 가는 사람의 뒷모습과 닮은 누군가가 이 안 어딘가에도 있었을 텐데...
바람의 목소리가 나의 오래된 폐허를 휘감아돈다.
......
백야의 '취생몽사'는 나에게 이렇게 기억되는 소설이다.
무협의 이미지란 무엇일까?
나의 경우 그것은 두 개의 영상과 하나의 감정이다.
쾌도난마(快刀亂麻), 혹은 일도양단(一刀兩斷)의 강렬하고도 장쾌(壯快)한 기세, 그리고 지
친 나그네의 허리춤에서 말없이 흔들리는 한 자루의 녹슨 검이 두 개의 영상이라면, 하나의
감정은 그리움이다.
쾌도난마의 기세는 남루한 현실이 나를 성가시게 할 때 그것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어지
는 나의 욕망을 대리체험하게 하여주고, 지친 나그네의 녹슨 검은 어디로 가든 삶은 그리
쉽지 않다는 체념과 쓸쓸함의 확인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움이란..나의 어린 시절이 꾸었던
꿈의 자취를 맛보는 일이다.
이 셋 중의 하나라도 만나보기 위해 나는 무협을 읽고, 따라서 그것을 만나게 해 준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좋은 무협이 된다.
'취생몽사'는 이런 점에서 나에게 너무나도 좋은 무협소설이었다.
비록 전체가 아닌 일부로서의 이야기만이 좋았지만 말이다.
'취생몽사'에는 두 개의 독립적인 이야기가 존재한다.
현재의 짧은 이야기, 그리고 과거의 긴 이야기.
긴 이야기는 짧은 이야기의 일부분으로써 존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분량의 구할
이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분량이 과거의 긴 이야기에 할당되었다 해도, 주가 되는
건 현재의 짧은 이야기이다. 요컨데, '취생몽사'라는 소설 자체가 과거의 긴 이야기보다는 현
재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씌어졌다는 것이다. 긴 이야기의 구조적 역할이라면 기
껏해야 한 인물의 현재를 설명하기 위한 배경적 의미밖에는 없을 따름이다.
(물론 이것은 작가로부터 직접 설명들은 바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하겠다.
소설이란 독자에게 보여지기 전 까지만 작가에게 속할 뿐, 한 번이라도 독자에게 읽혀졌
다면 소설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그것은 이미 독자의 몫인 까닭이다. 따라서 '취생몽사'의
두 가지 이야기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과거의 긴 이야기는 읽을 필요는 있었지만, 굳이 이해
하거나 분석해야 할만한 가치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독자인 나의 판단이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내가 주로 말하고 싶은 것도 현재의 짧은 이야기에 관해서이다.
이제는 중년이 되어버린 나(조엽칠)와 나의 상단 일행이 사막을 가로질러 장삿길을 떠나
던 중 한 나그네를 만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지친 나그네였으며, 무예의 고수였고, 하룻밤에 천 명이 죽었
던 지옥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 자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나'와 나의 친구들이 오래전의 청
춘에 꾸었던 화려한 꿈의 현신(現身)이었다.
강호인, 강호고수의 꿈, 그러나 현실에 무릎꿇고 기억 저편의 무덤속에 고이 묻은 채 이른
바 생활을 위해 배 나온 장삿꾼이 되어 한낱 비적따위마저도 두려워하게 되어 버린 그들의
초라한 현재에서, 그 나그네는 그들이 바라 마지않던 꿈의 현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나그네에게서 과거의 꿈을 되돌려받거나, 그 꿈을 관조할 수 있는 여
유를 얻게된다. 다시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고 '나'는 꿈을 되돌려 받아 그 꿈속에서 살아가
게 된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그 꿈을 그저 생활의 일부로서 간직한 채 나그네를 만나기 이
전과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생각한다.
그 나그네는 그의 꿈을 보았을까..?
이야기 자체는 짧고 단순하다. 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그 후일담을 간단히 언급하는
게 전부인 것이다. 하지만, 짧고 단순한 만큼 이야기는 강렬하고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짧
은 이야기, 긴 여운. 이는 단편소설을 두고 곧잘 표현되어지는 말이다. 확실히 '취생몽사'는
장편이라기 보다는 단편에 가깝다. 비록 일반의 장편보다 훨씬 긴 3권의 분량으로 씌어졌다
하더라도 '취생몽사' 는 단편의 구성과 강렬함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애초에 '취생몽사' 는 단편으로 구상되었던 작품이 아닐까?
그리고 단편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과거의 긴 이야기는 장편만을 취급하는 장르적 전통을
따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덧붙인 게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분명히 단편의 중요한 등장인물인 나그네(진우천)은 설명될 필요가 있었겠지만, 거의 3권
전부를 할애할 만큼의 분량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몇 가지의 상징을
적절히 배치하는 것만으로 긴 이야기를 미루어 짐작하게 할 수 있었을텐데. 그랬다면 아마
'취생몽사'는 한 권이 채 되지 않는 분량의 조금 긴 단편소설, 또는 중편소설이 되었을 것이
다.
혹여 긴 이야기를 너무 박대하는 듯이 들릴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하다. 나
는 '취생몽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긴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처음으로 백야라는 작가에 마음을 두게 된 것은 그의 전작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고 난 이후부터다. 소설 자체에서라기 보다는 소설의 서문에 밝힌 그의 의도가 내 마음에
들었다고 하면 정확할 것이다. 현대의 문법(文法)으로 무협을 쓰고 싶었다, 라는 요지였고
이것이야말로 십수년이 넘도록 무협을 읽어오면서 느꼈던 나의 바램이었던 것이다.
소설의 문법이란 단순히 단어와 문장의 배열이나 구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
히려 단어와 문장과 구성 따위의 외면적 요소라기 보다는 소설 자체를 대하는 작가적 자세
를 말한다. 나는 이 소설을 어떤 자세, 어떤 마음가짐으로 쓸 것인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소설의 문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등장인물, 매번 같은 방식으로의 전개, 뻔한 결론,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대
단히 멍청하고도 위험한 세계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 정신의 부재...한 때의 전성기를 구
가했던 한국무협이 스스로를 붕괴시켜버리고 말게 되었던 이유들이다. 나는 '귀거래사'의 서
문에서, 이제는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무협소설이 필요하다,는 평소의 내 생각과 일맥상통하
는 바를 발견하고 기뻐했었다.
그러나, 정작의 '귀거래사'는 아쉽게도 새롭지 못했다. 굳이 새로운 것을 찾자면 새로움을
위한 시도의 흔적이 보인다는 정도일 뿐, 중반 이후로의 전개는 마치 연어가 바다로 돌아가
기라도 하는 것처럼 과거의 무협형태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 것이다.
얼마 뒤 '이번에는 어떨까?' 하는 의심에 반쯤 저어하며 읽게 된 소설이 '취생몽사'였다.
그 때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취생몽사'는 너무나도 좋은 무협소설인 동시에 무협소설답지가 않았다.
거기에는 내가 무협소설을 읽음으로써 만끽하고 싶었던 '무협적 이미지'가 한가득 담겨져
있었으며, 그런 동시에 감히 소설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느슨했던 구무협의 행태
를 벗어나 이것이야말로 '한 편의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소설적 덕목을 훌륭하게 성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분한 어조의 문장들, 그 문장들이 표현해내는, 마치 나 자신의 경험이었던 것처럼 절실
하게 다가오는 청춘의 낭만과 회한과 관조의 정서,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만큼의 강렬함으
로 선명하게 솟아나는 이미지들..이 모든 것들이 충분히 고려된 뒤에야 비로소 한 편의 소설
로 씌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일관되고 자연스러우며 부드러운 흐름.
어느새 나는 또 하나의 내가 되어 소설속으로 걸어들어가 혹은 쓸쓸한 나그네가 되고, 혹
은 한 칼을 들어올리매 사위를 물리치는 고수가 되고, 혹은 먼 길을 돌아 마침내 껴안은 청
춘의 꿈속에서 행복해하기도 하였다.
소설이란 작가의 상상력속으로 독자를 초대하기 위해 씌어진 초청장과도 같다, 라고 생각
하는 나에게 '취생몽사'는 더 이상의 무언가를 바란다는 게 무리일 정도로 고맙기 그지없었
던 소설이었다.
그 뒤로도 나는 이 작품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고, 그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참
잘 쓴 무협소설이다' 라고 감탄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나를 감탄하게 만드는 건 언제나 '짧은 이야기' 뿐이었다.
짧은 이야기가 무협의 향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도 멋지고 새로운 소설적 문법의 가
능성을 연 반면에, 긴 이야기는 어떻게 보아도 과거의 구.태.의.연.한 무협지를 닮아있기 때
문이다. 일일이 그 예를 열거하지는 않겠다. 또한 열거한다 해도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
을테니 말이다. 그래도 굳이 예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나는 용대운도 구무협 작가라고 생각
하고 있다는 정도로 대답하겠다. 과거에도 구무협작가였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나는 가끔 생각해본다.
백야가 학창시절 아르바이트 삼아 무협을 쓰지 않았더라면, 권천이라는 유령필명아래 무
협을 쓰지 않았더라면, 최초의 무협을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썼더라면 얼마
나 좋았을까..이런 생각을 해 본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창작에서도 마찬가지로, 첫경험이란 이후의 평생을 두고 지워지지
않는 각인(刻印)이게 마련이다. 백야는 안타깝게도 구무협적인 환경에서 구무협적인 가치관
에 따라 구무협을 쓰는 것으로 첫경험을 해 버린 것이다.
내 안타까움은 그런 상황에서 썼던 작품들조차도 여타의 구무협들과 달리 완성도가 높았
다는 점에서 더욱 커진다. 첫단추를 제대로만 꿰었다면 지금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독보
적인 무협작가로까지 우뚝 설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오늘 다시 한 번 그의 '취생몽사'를 읽으면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가 또 하나의 '취생몽사'를 쓰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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