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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조잘조잘

작성자
녹슨
작성
03.04.21 23:16
조회
260

낮이 되면, 햇살이 땅을 바작바작 말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나는 가지의 끝까지 엉금거리며 기어서 활개를 쫙 펴고 누워버리는 거죠. 나 역시 일광욕을 좋아하는 것은 오동군(梧桐君)과 다를 것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오늘의 햇살은 특히 달콤한 맛이 났습니다. 모처럼 기분좋은 낮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 꼬마가 왔을 때도 나는 행복한 기분이었습니다. 요즘은 매일같이 찾아오는 꼬마가 하나 있어요. 오동군의 잎을 모아 왕관을 만들어 쓰고 숲속의 왕자 노릇을 하기도 하는 (발칙한) 꼬마입니다. 오동군의 몸을 타고 올라가서는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열매도 뜯어가는 귀찮은 녀석이지요. 친구도 없는지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입니다. 가끔 오동군에게 말을 걸기도 하는데, 어쩌면 광증(狂症)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나무야, 오늘도 나랑 놀자!"

이번에도 나는 대답을 할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오동군에게는 입이 없기 때문에 꼬마의 말에 답을 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내가 괜시리 모습을 드러냈다가 귀녀라느니 지박령이라느니 하는 욕을 먹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욕은 30년 쯤 전에 벌써 많이 먹었답니다.

아차, 나이가 들통나는 순간이네요.

"그래? 오늘은 피곤하다구..? 그럼 나도 그늘에서 잠이나 한숨 자야겠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꼬마는 혼자서 결론을 짓고는 오동군의 둥치에 털썩 기대고 있었습니다. 꼬마에게 흥미가 없어진 나도 오동군의 가지 끝에 팔베개를 하고 누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햇살을 받으며 쿨쿨 낮잠을 잤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벌써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습니다. 꼬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구요.  며칠을 놀러오던 꼬마는 그 후로 찾아오지 않더군요. 나는 가끔 녀석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인간이었으니까요) 녀석은 곧 잊혀져 갔습니다.

오동군은 기껏해야 40년 정도 묵은 나와는 달리 수백년을 뿌리내린 이 숲의 터줏대감입니다. 성격은 조금 깐깐합니다.(옹이도 별로 없어요!) 무어.. 하지만 알고보면 다감한 구석도 있답니다. 오동군에게서 태어난 정령(바로 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다정다감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요즘 오동군은 그의 몸에 뭔가를 계속 날라오는 곤줄박이 녀석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받아들일테죠.

오동군은 여자한테 약하니까요!

몇 차례의 해돋이와 폭풍우가 지나갔습니다. 눈도 왔고, 비도 왔습니다. 수많은 나비와 새와 바람들이 오동군에 머물다 떠났습니다. 오동군도 몇차례 꽃을 피우고 떨어뜨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인간의 꼬마는 다시 찾아왔습니다.

아니, 이제는 꼬마라고 불리지 않을 인간이었습니다. 덩치도 좀 더 커지고, 목소리도 전보다 굵어진 모습이었습니다. 녀석은 몇 명의 인간을 데리고 다시 우리의 앞에 섰습니다.

녀석은 오동군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난 돈이 필요해."

나는 턱을 괴고 녀석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햇살을 조금이라도 더 머금고 싶어서 몸을 움찔움찔 뒤틀면서 양달로 향하고 있었지요. 아시다시피 턱을 괴고 엎드린 채로 몸을 옮긴다는 것은 나와 같은 예쁘고 현명한 정령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네 가지를 베어다가 팔면 된다구...? 알았어."

뭐, 뭐라는거야 저 녀석이?

아, 나는 이 때에 무언가 행동을 했어야 했습니다. 내가 바보같이 멍하니 있는 동안 그들은 거침없이 나무에 오르더니 톱으로 오동군의 가지들을 하나 둘씩 잘라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무능을 변명하자면.. 나는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이런 행패가 가능하다는 것을 지금껏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상상조차.

오동군은 고통에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의 고통은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나 역시 몸을 감싸쥐고 신음을 토해야 했습니다. 비명과 애원을 토했습니다. 만류와 저주를 토했습니다. 폭풍에도 굴하지 않았던 오동군의 가지가 하나 둘 잘려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녀석은 떠나고 없었습니다. 울창하던 오동군의 잎과 가지들은 이제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내 팔다리 역시... 마찬가지군요.

그렇게 우리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살아갈 일이.. 너무도 막막했습니다.

사지가 잘려나간 동물이 피를 흘리며 죽듯이, 사지가 잘려나간 나무가 고통을 흘리며 말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신력을 모두 잃어버렸으니까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버르적버르적 기어서 조금이라도 더 햇살을 많이 받기 위해 몸을 움직였습니다.

오동군과 나는 조금이라도 더 회복되어 서로와 생기를 나누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잘려나간 상처와 흉터 틈에서 잎을 피워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 지금껏 당연스레 지나쳐갔던 바람과 서리가 그렇게 힘겨울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몇번의 해돋이와 폭풍우를 그렇게 보냈습니다.

오동군의 표정에 다시 푸른 미소가 돌아오던 그 여름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힘겨이 힘겨이 삶으로의 기지개를 켜올리던 오동군이 어느덧 푸른 잎사귀를 한 가득 품어낸 그 여름. (물론 예전만큼 풍성할 수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나 역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그 여름을 기억해요.

다시 웃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아낸 것입니다!

그 이어 찾아온 것은 가을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었습니다.

예전 꼬마였던 그 인간은, 우리와 달리 매우 지치고 힘겨워 보였습니다. 오동군은 인간을 보고 한차례 몸을 떨었습니다. 나 역시 두려움에 잠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의 손에 들린 도끼를 발견한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동군의 공포가 내게도 전해왔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인간의 목소리는 비통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한걸음씩 우리에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지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약속한대로, 네 줄기를 잘라 부모님의 관을 만들겠어."

아아... 우리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없었습니다.

없었단 말입니다!

인간 따위에게 몸뚱이를 잘라주고 싶다는 말은 한번도 한 적이 없단 말입니다!!!

오동군은 그렇게.. 밑둥만 남았습니다.

나 역시 정신이 흐려져가고 있습니다.

내가 스러져야 할 때인가 봅니다.

아직 사라지고 싶지 않은데..

오동군과 조금 더 살고 싶었는데.

누군가 오동군의 밑둥을 깔고앉지나 않을런지..

내가 지키고 싶었는데...

아.. 난 바보였습니다..


Comment ' 4

  • 작성자
    녹슨
    작성일
    03.04.21 23:19
    No. 1

    아낌없이 주는 나무 - 의 독후감이라면 너무 삭막하군요 -_-;; 음..; 별로 독창적이지도 않고... 해서

    그냥 조잘조잘 이라는 제목을 달아 봤습니다 -_-;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소예
    작성일
    03.04.22 09:12
    No. 2

    아낌없이 당한 나무;;;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35 김역인
    작성일
    03.04.22 09:57
    No. 3

    소예님의 위트가 죽이는 군요...
    아낌없이 \'당한\' 나무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
    작성일
    03.04.22 10:21
    No. 4

    글도, 소예님의 코멘트도 멋집니다. ^^
    \'아낌없이 주는 나무\' - \'아낌없이 당한 나무\'.

    예전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들었을 때,
    꽤나 이기적인 발상을 잘도 포장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어떤 나무가 \'자 날 베어가\'라고 할 지, 원.
    실제 나무가 다른 무엇인가를 의인화한 것이든 어쨌든 말입니다.
    그 기억을 코믹하게 다시 맛보게 되니 즐겁군요. ^^

    찬성: 0 | 반대: 0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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