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양판소가 아닌, 나만의 독특한 판타지를 쓰겠어!”라고 생각하는 많은 초보 작가들이 하는 실수가, 그 독특함을 ‘디테일의 변조’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도는 1세대 때 부터 나왔는데, “차분하고 신비로운 엘프”를 뒤틀어 “고기를 먹는 다혈질의 엘프” 캐릭터를 낸다던가, 흔히 나오는 몬스터의 이름이나 일반명사를 작자가 만들어낸 단어로 교체한다거나, 아니면 마나를 쌓는 방법에 대한 설정을 직접 만든다거나...
하지만 이런 방식의 시도 중, 성공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디테일’일 뿐이고, 곧 반복 변주될 또 다른 무언가일 뿐이니까요. 마법을 분류하는 기준이 서클이건 클래스건, 인간의 한계가 6서클까지건 9서클까지건, 그건 그냥 소설에 스치듯 지나가는 디테일이고, 이야기에 영향을 주지는 못하지요.
세계관이라는 것은 ‘세계를 보는 시각’을 뜻합니다. 독특한 세계를 만들고 싶다면, 디테일의 변주가 아닌, 그 세계에 근원적으로 스며든 법칙이나 전제를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독특한 그 세계를 매력으로 내세우고 싶다면, 그 세계의 법칙 내에서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인기를 얻은 몇 가지 작품을 살펴 볼까요? 대부분 외국 것입니다만.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
이 작품의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힘은 역시 ‘연금술’입니다. 근세를 배경으로, 일반적인 판타지 작품에서 ‘마법’이 할 역할을 ‘연금술’이 대체하고 있지요.
그리고 역사 속 연금술사들이 추구했던 두가지 목표, ‘현자의 돌’과 ‘호문클루스’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단순히 4대 원소를 던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실제 원자에 대한 조작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연금술이 등장합니다.
산업시대의 배경 + 연금술이라는, 과학적 분위기의 마법 + 오토메일 등의 디테일은 매우 독특한 ‘강철의 연금술사’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오노 후유미 원작의 소설 ‘십이국기’.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왔습니다.
이 작품의 무대는 지구와 이어진 또 다른 세계입니다. 가끔 지구에서 사람이 흘러들어오죠. 어찌보면 평범한 이계진입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이 작품이 특이한 것은 그 세계의 법칙에 있습니다.
이 세계는 12개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나라의 왕은 하늘의 선택을 받아, ‘기린’이라는 신수가 뽑습니다. 그리고 왕과 주요 관리는 선적에 등록되어 목이 잘리지 않는 한 죽지 않고 영원히 나라를 다스리죠.
그러나 왕이 ‘실도’를 하게 되면 기린은 병에 걸려 죽게 되고, 왕 또한 죽거나 물러나게 됩니다. 왕이 없는 나라는 요괴가 나타나고 자연재해가 일어나 사람이 살기 힘든 땅이 됩니다. 새로 태어난 기린이 새로운 왕을 선발할 때 까지.
‘십이국기’의 이야기는 이 ‘기린과 왕’의 관계가 중심이 됩니다. 다른 세계에서 와서 갑자기 ‘왕’으로 추대 된 소녀의 이야기라거나, 실도한 왕의 이야기, 혹은 반란으로 살해당한 왕의 딸(공주)가 자신의 책임을 깨닫는 이야기 등등.
즉, 십이국기는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법칙과 그 법칙의 중심에 휘말리고 고민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전개해가죠.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런 세계를 구상한 것은 ‘은하영웅전설’을 읽고, “만약 라인하르트 같은 지도자가 영원이 살고, 또 실정을 저지르면 죽게 된다면...”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어서라고 합니다. 세계의 전제로부터 설정을 쌓아올리는 것이죠.
사카키 이치로의 소설 ‘스트레이트 재킷’.
애니메이션은 OVA로 나왔을 뿐이고 그다지 인기 없었지만...
이 세계는 산업 혁명 이후, 다시 한번 ‘마법 혁명’이 일어난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마법혁명의 편리함을 구가하던 중, 마법의 발동으로 생겨나는 오염물질 ‘주소’가 임계점을 돌파, 마법을 쓴 인간이 ‘마족’이라는 괴물로 변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마법 사용에 엄격한 재한이 걸린 동네죠.
주인공은 마족을 사냥하는 전술마법사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마법 사용 후 발생하는 ‘주소’를 관리하기 위해 갑옥과 같은 구속복을 입고 스태프라는 커다란 쇠몽둥이를 사용해야만 제대로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이 장치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바로 주소가 몸에 침투해서 마족이 됩니다.
장비만 갖춘다고 되는게 아닌게, 이 장비는 처리한계가 있습니다. ‘구속도수’라는 일종의 잔탄 개념이 있어, 이 이상 사용하면 마찬가지로 마족이 되어 버립니다.
마구잡이로 마법을 난사할 수 있는 마족에 대항해서, 장비 이상의 위험이나 한정된 마법 잔탄만을 가지고 거친 전투를 벌여야 하는 전술마법사는 마족 변환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지요.
“마법을 잘못 쓰면 마족이 된다”와 “마족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마법사 뿐”이라는, 어찌보면 심플한 법칙 속에 쌓아올린 디테일은 세계와 이야기를 풍요롭게 합니다.
언제 마족이 될 지 모르는 마법사들은 고수입을 올리면서도 경원시 당하는 존재고, 그러한 마법사나 마족을 제어하기 위해 여러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요. 또 위험한 마법사 대신 다른 무력 수단으로 마족을 사냥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트레이트 재킷의 이야기는 그러한 ‘최전선’에서 싸우는 한 남자가, 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이며, 끊임없이 그것에 부딪히게 되죠. 개인적으로는 매력적인 세계관에 비해 그것을 전부 이끌어내지 못한 아쉬움이 꽤 남는 시리즈입니다.
얼음과 불의 노래. 왕좌의 게임.
얼핏, 평범한 판타지입니다만, 이것을 독특하게 하는 것은 “현실성”이라는 매우 단순한 법칙 때문입니다. 누구든 죽을때는 죽습니다. 주인공 보정따위는 없죠.
실제 역사와 같은 디테일한 정치 암투 속에서, 세계관 내적으로는 “마법이 되살아난다”라는 또 다른 전제가 이 작품의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왕좌를 차지하는 것이 누굴지라는 정치+전쟁 드라마에 더불어, 북부의 장벽 너머에서 밀려오는 위협에 어떻게 대쳐할지, ‘용’을 타게 되는 것은 누굴지 하는 몇가지 판타지적 장치들이 인물 드라마를 더욱 풍성하게 함은 물론, 이야기를 서서히 ‘에픽 판타지’로 이끌고 있는 것이죠.
자,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짧게 결론을 정리하면
1. 독특한 세계관이란 것은 디테일의 변주가 아닌, 세계 자체의 전제에서 나온다.
2. 세계관의 디테일은 그 ‘독특한 전제’에서 쌓아올리는 것.
3. 세계관에서 매력을 끌어내려면, 그 세계관의 중심과 연관시켜 이야기를 이끌어야 한다.
이 정도가 되겠습니다.
한담에 올릴까 하다가 그냥 정담에 올립니다. 의견 환영.
ps. 이런 ‘독특한 전제’에 대한 고민은 단순히 비슷한 소설을 많이 읽는것이 아닌 장르 메타적인 접근이 꽤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판타지를 성립케 한 각종 소스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게 좋죠. 신화나 전설부터 시작해서 각종 고전 판타지나 흐름, 현대에 판타지를 정리한 역할을 한 TRPG 시스템 등등.... 강철의 연금술사만 해도, 작가는 판타지를 전혀 모르고 “판타지를 그려보세요!”라는 말을 듣자 서점에 가서 판타지 개론서를 하나 샀다고 하니까요.
ps2.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서양권 고전 판타지가 영 수입이 안된게 아쉽습니다. SF는 그래도 꾸준히 명작 단위들은 들어오는데, 판타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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