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의병장 중에 한봉수(1872~1970)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 출신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장 김규환과 손을 잡고 20~30명의 소규모 부대로 게릴라 전을 펼치며 일본군 헌병대와 우편수송대를 습격하고 다녔습니다.
대략 이렇게 동네 훈장님 같이 생기셨으나...
헌병대는 이해가 가는데 왜 우편수송대를 습격했냐...에 이해가 안 갈 분이 있을 겁니다.
당시 우편수송대는 일본 관리들과 군인들의 월급을 전달했고, 이들이 작전 명령서 전달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죠.(한마디로 털면 나올게 많습니다.)
아무튼 이분이 청주지역과 그 부근에서 1910년에 잡힐 때까지 여러차례 교전을 펼치며 전공을 올렸는데, 1908년에 문백면 도하리에서 벌어진 교전은 후대까지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교전 자체는 극히 평범했습니다. 지나가던 헌병대를 덮쳤고, 시마자키라는 상병 하나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나머지는 ㄷㄷㄷ하면서 튀었죠.
문제는 그 시마자키라는 상병에 대한 일본군의 조치로, 나중에 그가 죽은 자리에 애도의 표지석을 세워두었습니다.
근데 이게 해방이 되어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건데...
동네사람들 : 어르신, 해방도 되었는데 저놈의 비석도 그냥 부셔버리지요?
한봉수 : 안돼, 그거 내 공인 킬마크임.
...라고 했기에 남아 있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고 합니다. 믿거나말거나
아무튼 1970년 한봉수 의병장께서 돌아가시고 7년 후에 항일 의거비가 세워져 이 표지석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아 그럼 이 표지석은 그때 없어졌냐고요?
아래로 자리를 옮겨서 아직도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의병장의 킬마크를 함부로 없앨 수 없지.
영원히 고통받는 시마자키 상병
참고로 현재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이분의 손자로, 한장관이 취임할 당시 일부 매체에서 한봉수 의병자를 의병 잡는데 협력한 일제 앞잡이라고 왜곡해서 퍼트린 적이 있습니다만, 당시 충북경찰부장이 경무국 보안과장에게 보낸 전보와 공주재판소 청주지부 검사의 사실 조회서를 보면 일치하지 않기에 학계에서 그의 독립운동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봉수 의병장은 1910년 체포되어 강도살인혐의와 내란죄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일제가 합방대사면을 내려 풀려났습니다. 회유책의 일환이었지만, 한봉수 의병장은 이후로 1919년 3.1운동에 동참하였다가 옥고를 치뤘고, 해방이 될때까지 요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만 전국구가 아닌 지역구 독립운동가에 여느 독립투사들과 달리 천수를 누렸다는 점에서 다소 박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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