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지에서 온 검객이 난약루(蘭若樓)를 며칠째 점거하고 있다는 하소연을 듣고, 연적하가 찾아갔다.
과연 범상치 않은 기운을 흘리는 흑의검객이 일 층 가운데 의자를 놔두고 앉아있었다. 연적하가 들어서자 그는 감았던 눈을 뜨고 냉소했다.
“제법이군.”
“금화(金华)의 연적하외다. 귀하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하후 형.”
기억을 더듬은 연적하는 하나의 별호를 떠올리며 눈을 부릅떴다.
“수라쾌검(修羅快劍) 하후형? 당신이 그 하후형이란 말이오?”
하후형은 흡족한 마음에 검을 들어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이 촌구석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알아보는 무인을 만난 것이었다.
“그렇다. 수라쾌검 하후형이 바로 나다!”
그는 쾌검(快劍)으로 일가를 이룬 중원의 패자였다. 이런 변성(邊城)에서 진을 치고 소란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비검(比劍)의 공증인이 될 사람을 찾는다.”
“비검! 당신이 누구와 검을 겨룬단 말이오?”
연적하가 묻자 하후형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대답 대신 되물었다.
“연적하라고 했나? 내가 볼 땐 당신도 그럭저럭 쓸 만하군. 당신이 비검의 공증인이 되는 게 어떻겠나?”
비록 하후형만큼 명성을 얻진 못했어도 연적하 역시 일생토록 검을 갈고 닦아온 자였다. 호기심이 일어 흔쾌히 응낙했다.
“좋소이다! 이 연 모, 하늘에 부끄러움 없는 공증인이 될 것을 맹세하오.”
무식한 검귀가 언제나 나갈까, 마음 졸이던 난약루 장궤의 안색이 환해진 것은 덤이었다.
말을 달린지 반나절 만에 목적지 마을에 도착하자, 연적하는 굉장히 놀랐다.
‘이리 가까운 곳에 수라쾌검과 견줄 검객이 살고 있다고?’
들은 바 없었다.
하후형은 성큼성큼 한 모옥을 찾아 들어갔다.
마당에 볏짚을 뿌려놓고 새끼를 꼬던 젊은 부부가 놀라 일어섰다.
“뉘십니까?”
* * *
“일케……? 아닛, 이르케……?”
촌부는 작대기를 휘둘러보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연적하는 의혹을 느꼈다.
‘저리 볼품없고 어리숙한 청년이 하후형에 비길 검객이라고?’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닌지 슬쩍 하후형의 눈치를 살폈다.
공증인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였을까, 하후형은 냉랭하게 읊조렸다.
“검을 깊이 수련해야 얻는 심검지기(心劍之氣)가 저 자의 몸을 두르고 있다. 평범한 촌부는 아닌 게지!”
그 말을 들은 촌부는 하후형을 보며 씨익 웃더니 수중의 작대기를 던져버렸다.
“손에 익지 않은 물건을 휘두르려니 힘들군요.”
그는 마당에 흩뿌려진 볏짚 사이를 헤집어 한 자 어림 되는 나무 꼬챙이를 집어 들었다. 새끼를 꼬아 짚신을 만들 때 쓰는 도구였다.
한결 가볍게 꼬챙이를 휘둘러 본 촌부는 그제야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돌아섰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서 삭은 검이라도 끄집어내올 줄 알았다. 하후형은 분노하여 벌떡 일어섰다.
“죽어도 원망치 말아라. 네가 자초한 일이니!”
연적하는 지금이라도 말려야 되는 것 아닌가 갈등했다. 동향의 젊은이가 애꿎게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연적하는 말리지 못했고, 두 검객은 좁은 마당에서 마주섰다.
수라쾌검 하후형.
그는 허리를 최대한 비틀어 오른손으로는 검갑을 잡고 왼손으로는 검병을 쥐었다.
얼마나 많은 검객이 그의 발검술 아래 혈화(血花)로 스러졌던가.
반면에 촌부는 나무 꼬챙이를 중하단으로 내리고 보폭을 비스듬히 벌린 자세였다. 연적하가 어떤 유파인지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가 없었다.
『스으… 스으… 쓰으읍…….』
하후형의 호흡이 미세하게 거칠어졌다. 그리고 호흡이 멈춘 순간, 폭발하듯 몸과 검이 하나가 되어 촌부를 덮쳤다.
천지가 멈춘 듯 보였다.
그리고 하후형은 그대로 촌부를 지나쳐 모옥 벽에 처박혔다. 요란한 충돌이었다.
그륵그륵 피를 게워내는 하후형의 목에는 나무 꼬챙이가 꽂혀 있었다.
“…ㄴ… …ㄴㅓ……!”
하후형은 불신 가득한 손가락으로 촌부를 가리키려다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촌부는 착잡한 모습이었다.
연적하는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후형의 쾌검은 눈으로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외려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촌부가 나무 꼬챙이를 들어 올리는 광경이었다.
“나는… 나는…….”
연적하는 숨이 거칠어지고 말문이 잇지 못했다.
촌부는 하후형이 듣고 싶어했던 대답을 연적하에게 들려줬다.
“그의 검은 너무 빨랐기에 진 것입니다.”
“너무… 빠르다……?”
촌부는 바닥에서 지푸라기 하나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어 내렸다.
그러자 연적하의 눈에도 보였다. 물결을 가르는 것처럼 허공이 갈라졌다.
순간, 연적하의 뇌내에서 수많은 빛이 폭발하며 서로 이어져 새로운 정보를 창출해냈다.
말로서 가공되지 않은 의(意)!
몸이 덜덜 떨려 참을 수가 없었다.
연적하는 검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이마를 바닥에 댔다.
“저, 저를…….”
그러나 촌부는 말을 잘랐다.
“스스로 참구하십시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다 드렸습니다.”
연적하는 집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며 ‘너무 빨랐다’는 그 한 마디 검결(劍訣)을 연구했다.
동문이 찾아와 함께 수련하기를 권했으나 거절했다.
삼 년 후에는 검을 고쳐 잡았다.
십 년 후에는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검객들이 비검을 청하였으나 그를 이기고 돌아간 검객은 단 한 명도 없게 되었다.
너무 빨랐다.
너무 빨라서 졌다.
그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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